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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98화 (29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98화

298화 후일담. 심요도 주요 관광지 안내.

[심요도 주요 관광지 안내]

1. 심요도 소개

대한 서북부의 심요도는 옛 조선의 중심지로서 대한의 발상지이자, 대한 땅의 고대 국가들이 웅거하던 땅입니다. 고려 시기 500여 년간 상실되기도 했지만, 대한이 건국되면서 다시 대한인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 뛰어난 위치와 넓은 평야, 풍부한 자원으로 대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중요성과는 별개로 주요 고을을 제외하면 인구 밀도가 낮아서 거솔도와 마찬가지로 설치 당시의 행정구역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지만, 교통과 통신 등 각종 기술의 발전으로 북부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최근 부 설치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2. 천리장성 종주

제일 남쪽의 비사성에서 출발해서 북쪽으로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이루고 있던 성터들을 하나씩 거쳐서 부여성까지 가는 천리장성 종주는 태시 연간부터 시작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고구려의 상무 기풍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겸하는 무관의 행군 훈련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민간으로 점점 확대되었고 각 성터의 사당에서 도장을 받는 풍습도 이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심요도의 상징이자 대한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하고 싶은 일로 자리 잡았으며, 최근에는 종주 목적으로 외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도 늘고 있습니다.

3. 비사성

심요도 남단, 요동반도 끝에 자리 잡은 비사성은 그 자체로 천혜의 항구라 할 수 있는 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요도에서 바다로 나가는 항구이자 위해부에서 가장 가까운 대한 본토이고, 대한의 도읍인 서울부와 청나라의 도읍인 칸발리크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 중의 요충지입니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비사성은 건국 초 개발이 시작된 이래로 꾸준히 발전해왔으며, 북부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그 중요성은 더 커질 전망입니다.

1) 여순항

비사성 서남부의 여순항은 항구로 적합하고 방어에도 유리한 지형과 섬들을 따라가면 쉽게 청나라에 갈 수 있는 수로, 반도 끝이라는 위치 덕분에 비사성 일대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곳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사성을 오가는 선박들이 대형화되고 많아지면서 여순항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 이후 동쪽의 비사만에 비사항이 건설되면서 항구 기능 대부분은 비사항으로 넘어갔지만, 점석회로 짓고 겉에 벽돌을 두른 구 척동상단 여순지부 건물 등의 볼거리가 많아, 지금은 관광지로서 번성하는 고을입니다.

4. 안시성

당 태종의 군대를 막아낸 것으로 유명한 옛 안시성의 이름을 이은 안시성은 심요도의 대표적인 철강 생산지입니다.

고대에 이미 채광이 시작되었는데도 지금까지도 고갈되지 않고 채굴이 이어질 정도로 막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안시성의 철광석은 안시성 일대가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대한 남부의 기차는 석주부 소석탄을 써서 만든 철로 위에서 석주부 석탄을 때지 않으면 갈 곳이 없다는 말과 대구를 이루는, 대한 북부의 기차는 안시성 철로 위에서 심양성 석탄을 때지 않으면 갈 곳이 없다는 말도 이때 생겨났습니다.

한때는 철강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각종 오염 물질로 주변이 황폐해지는 문제가 있기도 했고, 지금은 철광석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매장량을 자랑하는 고토, 활석에서 옥에 이르는 더 많은 광물이 채굴되고 있지만, 오염 저감 기술의 발달로 오염 물질의 배출은 오히려 감소해서 안시성에서도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 백우사

옛 안시성 성터 안에 자리 잡은, 당 태종을 막아낸 고구려의 안시성주와 그 휘하 병사들을 모신 사당입니다.

백우사는 안시성 특산물인 옥으로 꾸며진 화려한 내·외관으로 유명한데, 그 가운데서도 백우사의 상징인, 거대한 옥판을 그대로 조각해서 만든 안시성 전투 부조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5. 요동성

요동성은 심요도의 여러 성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성으로, 고구려 시기 끊임없이 이어졌던 유목계 국가, 정확하게는 선비족 국가인 후연과 수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곳입니다. 비록 그 뒤를 이은 선비족 국가인 당나라의 공격에는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항복하지 않은 11곳의 성 중 하나로 유명합니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마저 멸망하면서 차례로 요나라, 옛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영토가 되었던 요동성은 금나라가 건국되며 금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대한(당시 조선)이 금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밀어내면서 마침내 다시 대한의 영토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1) 요동성 충렬사

고구려의 천리장성을 이루고 있던 성 가운데 유일하게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요동성은 당연하게도 다른 성들처럼 옛 성터가 없고, 옛 성터에 지어진 사당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동성의 천리장성 종주 도장을 받는 곳은 이곳 요동성 충렬사입니다.

요동성 충렬사의 대표적인 명물로 꼽히는 것이 둘 있는데, 하나는 백탑이고 다른 하나는 현판입니다.

요동성 충렬사 자리에는 원래 광우사라는 사찰이 있었지만, 회경군의 요동성 점령 과정에서 금나라 병사들이 군량고에 지른 불이 옮겨붙어 소실되었습니다. 그 터에 충렬사가 들어서면서 광우사는 기단만 남기고 사라졌지만, 광우사 경내에 있던 백탑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다른 하나인 현판은 산해관 동문에 걸려있던 천하제일관 현판입니다. 산해관 전투는 명나라의 정통제가 군대를 보내 도와달라는 밀서를 보내고 나서 마음을 바꾸어 청 태조에게 선양하기로 하고, 그 사실이 대한에 전해지지 않은 바람에 일어난 무익한 충돌이었습니다.

하지만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던 산해관을 대한이 함락시킨 것은 명확한 사실이기에, 그것을 기념해서 천리장성의 가장 유서 깊은 성인 요동성의 충렬사 현판 아래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6. 심양성

예로부터 군사, 문화, 산업 면에서 대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을 남긴 심양성은 지금까지도 명실상부한 심요도 최대의 고을입니다.

1) 심양성 승전탑

칭제건원 당시 고구려의 옛 성과 가까운 성들은 그 이름을 가져와서 새 이름으로 삼았지만, 유일하게 심양성만은 가까운 성터인 개모성의 이름을 가져오지 않고 심양성이라는 이름을 유지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심양성이 금나라의 첫 도읍이고, 양녕공이 이끄는 회경군이 명나라 정로군의 도움을 받아 함락시킨 성이기 때문입니다. 즉 다른 성들이 고구려가 선비족 국가들을 막아낸 것을 기념해서 옛 이름을 이었다면, 심양성은 대한이 금나라를 몰아내고 요동을 탈환한 것을 기념해서 그 이름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양성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심양성 충렬사 옆에 세워진 심양성 승전탑입니다. 경덕 연간에 심양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서 만들어진 이 승전탑은 조형미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는 심양성 전투 당시 금 태조와 투구를 바꿔써 무사히 탈출시키고 자기가 대신 죽은 무명의 충신을 비롯한 금나라 전사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어서 여진인 관광객들도 상당수 찾아오는 곳입니다.

2) 심양 탄전 호박 공예관

심양성 일대에는 온갖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심양성 동쪽의 거대한 노천 탄광인 심양 탄전입니다. 심양성의 풍부한 석탄은 가까운 안시성에서 철강을 생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철도가 탄생하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심양 탄전에서 채굴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자원이 바로 뛰어난 품질로 세계적으로 이름난 심양 호박입니다. 심양 호박으로 만드는 장신구, 향로, 염주, 조각상 등의 공예품은 그 정밀함과 예술성으로 다수가 국보로 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예 기술 자체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 예로부터 진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던, 안에 작은 동식물이 들어간 심양 호박은 최근에는 중요한 고생물학 자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심양 탄전 가까이에 있는 심양 탄전 호박 공예관에는 다양한 심양 호박과 그 공예품이 전시되어있으며, 공예 체험 및 공예품 구매도 가능합니다.

3) 심요도 자연사 박물관

심요도 일대는 대한에서 화석이 가장 많이 발굴되는 땅입니다. 특히 이빨이 있는 원시 조류의 화석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 발굴되었으며, 다른 나라에서 발굴되는 더 원시적이고 깃털도 없는 화석들이 원시 조류의 것임을 밝혀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심양성 북부의 심요도 자연사 박물관은 이처럼 심요도 일대에서 발굴된 것은 물론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화석들도 함께 전시해 놓아서, 6,500만 년 전 멸종하기 전까지 다양하게 번성했던 원시 조류들의 다양성과 진화 과정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4) 철도 박물관

안락국이 건국되고 대한 국내는 물론 멀리 천축까지 오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그때까지의 선박의 속도와 적재량으로는 물류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경헌공 장영실의 아들과 손자가 발명한 것이 바로 증기선입니다. 증기선은 속도와 적재량 모두 기존의 선박보다 뛰어났고, 경유지마다 저탄소를 만들어두면 천축까지 갔다 오는 것도 문제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증기선도 단점이 있었는데, 크기가 커지다 보니 일정 크기 이하의 강은 거슬러 올라가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기선이 개발된 경주부 동래군을 포함한 대한 남부와 거솔도는 큰 고을은 대부분 해안에 있거나 큰 강을 끼고 있어서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깊은 내륙에 중요한 고을이 있는 심요도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증기선으로는 요하 상류까지 올라가기 어려우니, 금나라와 교역하는 물건들을 작은 배에 나눠 싣고 오가야 했던 것입니다.

금나라와의 교역이 점점 활발해지면서 이 문제도 더 심각해졌고, 그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바퀴 폭에 맞게 만든 철로 위에서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수레. 즉 철도와 기차의 발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증기선이 올라오기 어려운 요하 상류에만 놓였던 철도는 곧 심요도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심요도 철도의 중심인 있는 심양역의 구 역사에 개관한 철도 박물관은, 철도 발상지의 명성에 걸맞게 지금은 운행되지 않는 옛 기종의 기차들을 다수 전시하고 있어서, 대한 내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찾아오는 이들이 많습니다.

7. 부여성

금나라 국경 가까이에 있는 부여성은 북변의 대읍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합니다.

금나라와의 교역으로 발전한 고을답게 부여성에 방문하거나 거주하는 여진인들도 많아서, 거의 모든 이정표와 안내문에 여진어가 병기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1) 용안성 정계비

부여성 서북쪽 용안성에 세워진, 대한과 금나라의 국경을 표시하는 비석입니다. 후에 정밀한 측량을 거쳐 양국 간의 국경을 재확정하면서 정계비에 비문으로 남겨놓았던 당시의 국경조약은 효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국경의 상징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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