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97화
297화 후일담. 계응3부, 거솔도 주요 관광지 안내
[계응3부 부별 주요 관광지 안내 요약본]
1. 계응3부 소개
계응3부는 본래 계응국이라는 나라로, 대한의 봉신(외번)이면서 대화국의 봉신(슈고)이라는 특별한 지위의 나라였습니다. 계응국의 이러한 이중 봉신 지위는 대화국 건국 초기에 대한과의 협정으로 시작된 이래 수백 년간 이어져 왔지만, 142년 전 계응국이 대화국과의 봉신 관계를 청산하고 대한만의 봉신이 되면서 끝났습니다.
곧이어 마지막 계응후 고홍달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계응국후지인을 조정에 바치면서 계응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계응국 땅에는 세 개의 부가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계응후는 물론이고 계응국 백성들도 스스로 대화인이 아니라 대한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계응국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완전하게 대한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런 인식 덕분에 대한과 계응국 모두 마침내 진정한 삼한일통이 이루어졌다며 축하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계응3부에는 이런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특색있는 문화와 풍습, 유물과 유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2. 응주부
대한의 다른 부는 중심 고을이 먼저 있고 그 이름을 따서 부의 이름이 붙었지만, 계응국을 개편해 계응3부를 설치할 때는 반대로 기존 지역 이름을 그대로 부의 이름으로 쓰고 중심 고을을 같은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개편 직후에는 장문부와 주방부의 두 고을이었지만, 계응국에서 이어지는 역사성을 살리면서 고을의 격도 맞추고자 두 부를 통합하고 응주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1) 응주 청동기 박물관(응주목)
고대에 대한 본토에서 만들어진 초기 청동기는 구리 자원이 부족한 탓에 그 크기도 작고 생산량도 많지 않았지만, 구리가 풍부한 칠주도로 전파되면서 점점 대형화되고 생산량도 증가했습니다.
칠주도에서 확립된 대한 남부 특유의 청동기 양식은 계응3부 지역까지 확산되었고, 그 출토 범위와 대화국식 청동기의 출토 범위가 겹치는 지역은 지금의 대한과 대화국 국경과 거의 일치합니다.
비록 계응3부는 칠주도 북부에 비하면 대한 남부식 청동기의 출토량은 부족하지만, 대한 남부식 청동기야말로 임성태자가 자리를 잡기 전부터 계응국 지역이 삼한의 영향을 받은 땅이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 역대 계응후의 후원을 받은 덕분에 전국에서 청동기 연구가 가장 발달한 지역입니다.
응주 청동기 연구소 부속인 이 박물관은 연구소와 박물관의 설립 주체인 응주 고씨 가문이 전 세계에서 수집한 각종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이 매주 개최되는 세계적인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3. 석견부
석견부는 지역 대부분이 산지인 탓에 큰 고을은 없지만, 대한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던 석견 은광이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또 석견부는 동쪽으로 옛 삼한과 연관이 깊은 대화국의 이즈모 지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서, 석견목을 거점으로 잡고 서쪽의 석견 은광 유적과 동쪽의 이즈모를 함께 관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1) 석견 은광 유적(이마현)
석견 은광은 남에파스 대륙의 포톡시 은광과 더불어 전 세계의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던 거대 은광이었습니다. 석견 은광은 석견목의 위치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은광 개발 초기에 석견부와 가까운 이즈모 지역 호족들에게 은광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을 막고, 만약 은광의 존재가 알려지더라도 섣불리 넘볼 수 없도록 이즈모 지역에 가까운 은광 동쪽에 큰 고을을 만든 것이 지금의 석견목입니다.
석견 은광은 지금은 폐광되었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받아 중요 유적으로 지정되어있으며, 안전한 갱도를 일부 개방해놓아 직접 들어가 볼 수도 있습니다. 또 갱도 외에도 은 채굴이 활발하던 당시 만들어진 전통 건축 거리 등의 볼거리도 풍부합니다.
4. 안예부
안예부는 옛 일본의 영토였을 당시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한적한 땅이었지만, 계응부의 일부가 되면서 동쪽으로 대화국과 국경을 맞댄 지역이자 계응 내해의 섬들을 통제하는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계응국은 접경지인 안예부를 영토로 확고히 하고자 태천강 하구를 간척하고 이주를 장려했고, 그 결과 안예부는 대화국과 인접하고 옛 일본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음에도 대한의 문화적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색있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1) 궁도 대원사(좌백현)
안예만의 큰 섬인 궁도에 지어진 사찰인 대원사는 밀물 때면 바다 위에 뜬 것처럼 보이는, 갯벌 위에 지어진 건물들로 유명합니다.
원래 그 건물들은 원래 고대 일본 시기 건설된 변재천을 모시는 사당이고 대원사는 그 옆의 마른 땅에 지어진 사당 부속 사찰이었지만, 응주부 출신 이주민들이 늘고 대한 불교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반대로 사당이 대원사에 통합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찰 부속 사당이 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당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해서, 예술과 학문의 호법신인 변재천의 가피를 받고자 찾아오는 학생과 예술가들로 지금도 붐비는 곳입니다.
[거솔도 주요 관광지 안내 요약본]
1. 거솔도 소개
심요도와 함께 대한 북부 지방을 이루는 거솔도는 대한이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회복하면서 가장 먼저 진출한 지역입니다. 인구 밀도가 낮아서 발전은 더디지만, 대신 옛 건축물과 풍부한 자연이 잘 보존되어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비우군와 용정군은 두만강 이북의 고을이지만 거솔도가 아니라 경원부에 속한 고을로, 많은 책에서 거솔도 관광지와 묶어서 소개되지만 본 안내 요약본에서는 제외되어있습니다.)
2. 발해성
발해의 상경용천부 터가 발견된 것은 오래전 양녕공 시기였지만, 거솔도의 인구 부족과 금나라 국경에서 가까운 위치, 농사가 힘든 기후 등의 문제로 진출이 어려워 오랜 기간 최소한의 관리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로부터 몇백 년 뒤 에파스 대륙에서 북부에서 재배하기 좋은 작물인 감자와 옥수수가 들어오고 북부 개척이 활발해지면서 상경용천부 터도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발해성이라는 고을 이름을 받고 개발을 시작하자마자 큰 문제에 봉착했는데, 어디를 파더라도 유물과 유적이 계속 나오는 탓에 공사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결국 상경용천부 터에서 동북쪽으로 떨어진 곳을 대신 개발해 고을을 만들었고, 비우군에 있던 발해 역대 제왕의 사당인 숭현전도 그곳으로 옮겨왔습니다.
1) 상경용천부 발굴 전시관
발해성 서남쪽, 발해의 옛 도읍인 상경용천부 터는 지금도 발굴과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발굴 현장 옆에 지어진 본 전시관에서는 출토된 각종 유물은 물론 발해 당시의 상경용천부 모형, 당시의 생활상 재현 등의 다양한 전시가 진행 중입니다.
다만 발굴이나 보존 처리 등의 상황에 따라 전시 유물 혹은 개장 시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으니 사전에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공험성
고려의 장군인 윤관이 설치했으나 곧 버려졌고, 양녕공이 회경군을 이끌고 되찾은 것으로 잘 알려진 공험진에 설치된 고을입니다. 고려가 공험진 일대를 유지한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탓에 관련 유적은 공험진 성터와 후대에 지어진 윤관 사당이 전부라서, 공험성에 오는 관광객들은 선춘령을 보러 가는 도중에 머무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1) 선춘령 고려지경비
윤관이 고려지경비를 세웠던 선춘령에는 총 세 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사방에 석불이 있고 비문이 심각하게 손상된 중앙의 비석이 바로 윤관이 세웠던 고려지경비입니다. 공험진이 버려지면서 방치되고 훼손된 고려지경비는 시간이 흘러 양녕공에게 다시 발견된 시점에서는 비신석만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이미 비문의 훼손이 심해 위치만으로 고려지경비라고 추측할 뿐이었지만, 고려지경비를 확인하러 왔던 명나라 요동도사의 요청으로 땅을 파다가 고려지경이라고 새겨진 비대석이 발견되면서 확실하게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고려지경비 오른쪽의 비석은 비대석 발견 직후에 양녕공이 그 내력을 알리고자 세운 것이고, 왼쪽의 비석은 후에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되면서 대한어로 같은 내용을 새롭게 새겨 세운 것입니다.
비록 고려지경비 비문의 내용은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남은 부분에서 분석해낸 필체는 경원부 일대에서 발견된 다른 비석들이 고려 때 세워진 것임을 밝혀내는 데에 도움이 되었고, 고려의 영토 변동과 양녕공의 수복, 대한어의 변천 등의 사료적인 가치가 뛰어나서 세 비석 모두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4. 거양성
지금은 중소규모의 한적한 고을인 거양성이지만, 거솔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두 고을 중 하나인 만큼 역사와 문화로는 거솔도 제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거양읍성
토축 외성과 점석회 내성의 이중 구조로 쌓고, 내성 성문과 외성 성문이 엇갈리게 배치해 방어력을 극대화한 성벽입니다.
북방 개척의 요새로 지어진 탓에 규모가 작아서, 국경이 안정화되고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는 읍성 바깥을 중심으로 개발되고 읍성 내부는 발전이 더뎠지만, 반대로 그 덕분에 많은 건축물과 유적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2) 다문사
양녕공이 거양성에서 발견된 절터에 지은 임시 대웅전에서 시작된 사찰입니다.
당시 절터에 남아있던 당간지주, 고려인 유성이 함부로 부수었다가 동티가 나서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범종 등 국보로 지정된 고려 시대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습니다.
5. 솔빈성
거솔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두 번째 고을입니다. 고을의 상징인 쌍둥이 토축성에서 온 쌍성골이라는 별명과 넓게 펼쳐진 초원의 말 목장, 그리고 미타호로 대표되는 곳입니다.
1) 미타호 국립공원
대한에서 가장 큰 호수인 미타호와 그 주변의 습지를 포함하는 국립공원입니다.
양녕공이 남긴 기록에 이 일대를 개발하면 가뭄이나 홍수 등의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내용이 있어 오랜 기간 그대로 보존되어왔으나, 양녕공 시기보다 농업 기술이 발달했으니 개발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의견에 따라 60년 전 일부 지역이 시범적으로 개간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양녕공이 예상했던 문제들이 속출하자 개간은 취소되고 전 지역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한편 자연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던 시범 개간지는 인간이 손길이 닿지 않자 예상보다 빠르게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고, 이 사례는 솔빈성에서 국제 습지 보호 협약이 체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 제북성
제북항을 중심으로 발달한 거솔도 최대의 고을입니다. 대한은 물론이고 대한해에 접한 모든 나라에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지역 내의 거의 모든 표지판에 여진어와 아이누어가 병기되어있습니다.
1) 제북항
제북만을 가로지르는 교량 아래를 수많은 쇄빙선이 지나는 풍경으로 유명한 제북항은 북대한해 교역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회경군 진출 당시부터 집중적으로 개발된 유서 깊은 항구입니다.
오랜 기간 교역항으로만 인식되던 제북항이었지만 항공기가 발달하면서 접근성이 좋아졌고, 최근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풍부한 해산물, 서늘한 기후라는 장점을 살려 여름철 국내 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