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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95화 (29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95화

295화 후일담. 모피가 바꾼 세계사

[상경부립 모피 역사 박물관 개관 홍보용 소책자]

짐승의 가죽에서 털을 남겨두고 무두질해서 만드는 모피.

지금은 기능으로는 각종 신소재에 밀리고, 호사스러운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해진 탓에 젊은 세대에게는 외면받는 모피지만 금나라 역사, 더 나아가서 세계 역사에서 모피는 생각하는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런 모피의 역사적 의의를 널리 알리고자 구 모피 교역소 건물을 새로 단장해 개관한 상경부립 모피 역사 박물관의 전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1. 모피 교역의 태동

금나라가 건국되기 전부터 여진인에게 모피는 중요한 교역상품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주된 교역 상대는 대한(당시 국명 조선)이었습니다. 일시적으로 회하 이북까지 점령하고 대한과 조공무역을 시행하던 명나라가 선호한 대표적인 물품이 모피였는데, 대한 영토 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모피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은 조공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모피가 필요했고, 당시 제철 기술마저 소실된 상태로 부족 단위로 생활하던 여진족은 식량, 철, 소금 등 생필품이 필요했습니다.

[그림. 금나라와 주변국들 사이에 어떤 물건들이 교역되었는지 화살표로 나타낸 지도.]

금나라가 건국되고 식량, 철, 소금은 물론이고 유황의 자급에도 성공했지만 모피 교역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확대되었습니다. 모피의 공급에 아이누인들이, 수요에 서수인들이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모피 교역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고, 교역 당사국들의 경제에도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모피 교역을 바꿔놓은 것은 바로 기후였습니다.

2. 소빙하기의 도래

[그림. 지난 2천 년간의 기후변동을 주요 역사적 사건과 함께 나타낸 도표.]

그것이 소빙하기라는 것까지는 몰랐겠지만, 점점 기온이 내려간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금나라였습니다. 당시 국가들 가운데 가장 북쪽에 농경지가 있던 덕분에, 북위가 더 높던 원나라보다도 일찍 알 수 있던 것입니다.

건국 초기의 국경조약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남쪽 영토 대부분을 대한에 내어준 금나라에게, 기후가 내려간다는 것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농경지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다는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물론 소빙하기가 금나라에만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대한과 청나라, 대화국에서도 낮아진 기온으로 여러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남방에서 들여오는 미곡과 개선된 농법 덕에 큰 기근이 들지는 않았지만, 갈수록 추워지는 겨울을 나는 것은 농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모피가 필요했고, 금나라는 흉작을 이겨내기 위해 식량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양쪽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면서 모피 교역의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3. 위기가 만든 기회

금나라의 모피 수출은 초기에는 순조로웠습니다. 대한에서 넘어온 강선 조총 기술과 아이누에서 넘어온 사냥견인 세타 덕분에 사냥으로 모피를 얻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덕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빙하기가 점점 진행되면서 두 가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진. 아이누 전통 문양으로 장식된 조총. 아이누. 금속과 목재.]

첫째는 금나라가 아이누 통제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금나라와 대한으로부터 각종 제도와 기술을 익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한 아이누인들은 금 태조가 제창한 바로 그 이론을 가져와 자신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천명이 있다며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자칫하면 니브흐인들도 따라서 독립을 선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금나라로서는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아이누는 금나라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구리와 유황 공급을 아이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황에서 아이누를 적으로 돌렸다가는 모피 사냥에도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독립하되 명목상으로는 봉신으로 남아달라는 제안도 거절당하자, 금나라는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길러미섬은 아이누인 마을이 많이 있는 남부만을 가져가고 북부에 거주하던 아이누인들은 남부로 이주할 것, 다른 나라의 봉신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 기존의 구리와 유황 교역을 유지할 것 등의 조건으로 타협한 금나라는 아이누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큰 충돌 없이 독립을 인정해준 덕분에 양국의 관계가 비교적 우호적이었다는 것과, 아이누인들이 에파스 대륙으로 활발히 오가게 되면서, 소빙하기로 더 추워진 북방 항로를 무사히 지나기 위해 모피가 더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금나라 모피의 좋은 수요처가 되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 금나라가 시기별로 획득한 영토가 색깔로 표시된 지도.]

둘째는 모피의 고갈입니다. 주변국의 막대한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사냥을 거듭한 결과, 당시의 금나라 영토 내에서 모피를 얻을 수 있는 짐승의 숫자가 점점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단 하나, 모피를 얻을 수 있는 땅을 더 얻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아이누의 독립을 인정해주며 떨어진 위신을 회복할 필요도 있었기에, 한의 명령을 받은 금나라 정규군과 사냥꾼들은 드넓은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4. 화합과 충돌

활이나 창이 고작인 현지 부족들은 총과 소형 대포로 무장한 금나라 기병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지만, 금나라 기병들은 애초에 현지 부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금나라 기병들은 오히려 만나는 부족마다 선물을 교환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쌓으려 노력했습니다.

이것은 여진인에게 당연한 초원의 전통을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우선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모피를 바치라고 하는 것보다 소금이나 면포 등과 모피를 교역하는 편이 더 이익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한에 모피 한 장을 주고 사 온 면포 한 필을 서쪽 먼 곳에서는 모피 열 장과 바꿀 수 있었고, 그것도 부족마다 모피를 미리 준비해두고 금나라 기병들이 오기를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사진. 금나라 기병들이 건설한 요새의 축소 모형.]

현지 부족들은 유용한 진출 거점이 되어주기도 했습니다. 귀한 손님인 금나라 기병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중요한 소식과 정보도 적극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금나라 기병들은 부족들의 도움을 받고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해가며 점점 서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서진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금나라와 마찬가지로 모피를 얻기 위해 동쪽으로 진출하던 루스 차르국과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루스 차르국의 봉신으로서 동쪽으로 진출하던 코자키인들은 뛰어난 기병이었고, 화약 무기를 다룰 줄도 알았고, 초원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타고 다니는 말의 품종도 우수했습니다. 모피를 둘러싼 두 세력의 만남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림. 금나라 기병과 코자키 기병의 전투 기록화.]

말의 품종이나 본국과의 거리 면에서 불리하긴 했지만, 이 전쟁은 금나라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금나라 기병들의 강선 조총이 코자키 기병들의 초보적인 화승총보다 성능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두 세력의 다른 진출 정책이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코자키 기병들은 현지 부족들을 거칠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모피 교역도 수탈에 가까운 방식이었습니다. 반면에 금나라 기병들이 현지 부족들에게 요구한 것이라고는 금나라의 봉신이 되는 것뿐이었으니, 현지 부족들이 금나라 기병들에게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금나라는 루스 차르국의 진출을 꺾고 우랄산맥 서쪽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우랄산맥은 그리 험하지도 않고 금나라 중심지에서 멀기까지 한 탓에 방어에 그리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루스 차르국이 언제고 다시 산맥 동쪽을 넘볼 수 있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금나라에 손을 내민 것은 카자크 구룬의 칸이었습니다.

루스 차르국의 확장을 막는다는 일치한 목표를 가진 양국은 금방 긴밀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금나라의 기술과 카자크 구룬의 준마가 서로에게 넘어가며 두 나라는 더욱 강해졌고, 이미 여진인들의 무속과 섞여 있던 금나라의 불교가 비슷한 토속 종교를 가진 카자크 구룬에 빠른 속도로 전파되면서 종교적인 동질성도 생겨났습니다.

이 성공적인 협력의 결과 모피 확보가 좌절된 루스 칸국은 쇠퇴를 거듭하게 됩니다.

5. 동쪽에 남긴 것들

이처럼 서쪽으로 멀리 에우로파에까지 영향을 준 금나라의 모피 교역은 동쪽으로 에파스 대륙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사진. 차파 모피로 만든 방한모. 금나라. 모피.]

발단은 바로 북에파스 대륙에 서식하는 포유류인 차파였습니다. 차파는 나무를 쏠아 넘어뜨려 그것으로 강에 둑을 쌓고 둥지로 삼는 특이한 생태로 유명하지만, 물에 사는 동물답게 그 모피의 품질이 매우 뛰어나기도 합니다.

차파의 모피는 금나라, 대한, 청나라, 대화국은 물론이고 저 멀리 뵈첸포에서도 큰 인기를 끌 정도였고, 점점 그 값이 오르자 금나라 모피 사냥꾼들이 차파를 사냥하러 북에파스 대륙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몽골인 사냥꾼들도 따라서 넘어가고, 이 흐름은 점점 커져서 대량 이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이주한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과 닯은 북에파스 대륙의 평원에 정착하곤 했고, 평원 부족들과 섞이며 또 다른 변화를 낳게 되었습니다.

6. 현대에 남긴 영향

이처럼 대륙을 오가던 모피 사냥과 교역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림. 당시 모피 교역을 위해 만들어졌던 요새와 교역소, 교역로가 표시된 현대 금나라 지도.]

금나라 기병들이 모피 교역을 위해 만든 요새와 교역소는 점차 규모가 커지며 고을이 되어갔고, 그들이 오가던 길을 따라서 철도와 도로가 깔렸습니다. 철도를 통해서 금나라를 횡단하는 여행은 먼 옛날 금나라 기병들이 오가던 길을 따라가는 셈이기도 한 것이지요.

또 모피를 교역하던 현지 부족들이 남겨준 각종 지리 정보는 지금도 석유나 석탄, 화정을 탐사하고 개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국의 박물관에 전해지는 모피 유물들은 제작된 곳은 다 다르더라도 재료가 되는 모피는 금나라 사냥꾼들이 사냥으로 얻어내 판매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당시 유행하던 차파 모피가 언급된 문학 작품까지 따진다면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7. 마치며

시대가 흐르며 모피 산업은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생태 보호에 관한 인식이 커진 것도 있지만, 추위를 막는 데 더 효과적인 신소재가 개발되며 실용성이 떨어진 것도 큰 원인일 것입니다.

이처럼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어지는 모피이지만, 한때는 동서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교역품이었고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지금도 금나라의 주력 산업 중 하나입니다.

비록 모피 제품을 사용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새롭게 개관한 모피 박물관에 방문하셔서 모피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와 역사를 접하신다면, 이 겨울을 조금 더 따뜻하게 보내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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