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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94화 (29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94화

294화 후일담. 백년하청.

[국립 칸발리크 박물관 특별전 '황하' 홍보용 소책자]

문명 발생 초기부터 회하 이남과 이북은 서로 구분되는 문화권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문화적 특성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는 조금 뒤입니다. 유목계 국가인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패권을 잡으면서 비로소 농경과 유목의 두 문화가 섞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나라는 지금의 청나라 영토와 거의 일치하는 세력권을 구축했고, 그 중심에는 황하가 있었습니다.

[그림. 유목계 국가와 강남계 국가의 역대 수도가 표시된 지도.]

황하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유목계 국가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초나라에서 기원한 강남계 왕조인 한나라가 회하 이북까지 점령한 다음 수도로 삼았던 곳들도 모두 황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한나라의 통치는 오래가기는 했지만 영원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나라가 멸망한 뒤로 황하 일대에는 다시 유목계 왕조들이 자리잡았습니다.

한때 송나라가 회하 남북을 모두 지배하고 황하 옆의 개봉에 수도를 둔 적은 있었지만 금방 강남으로 밀려났고,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로 이어지는 유목계 왕조가 다시 황하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원나라는 당나라 이후로 강남까지 지배한 마지막 유목계 왕조였습니다.

[그림. 청나라와 명나라의 유전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나타낸 지도]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이번에는 강남계 왕조인 명나라가 회하 이북까지 지배하게 되었지만, 한나라 때와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며 강남과는 많이 달라져 버린 회하 이북을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청나라가 세워지며 명나라는 다시 강남으로 물러가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회하 남북을 억지로 묶어놓고 있던 천하 관념과 화이사상 역시 무너지게 되었고, 유전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달랐던 유목계와 강남계는 마침내 완전한 분리를 이루게 됩니다.

청나라라는 테두리 안에 모여 마침내 하나의 정체성을 갖게 된 다이친인들은 자신들의 기원이자 생명줄, 하지만 지금은 진흙탕이 흐르게 되어버린 황하를 다시 맑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황하가 시대별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영향을 주어왔는지를 유물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부. 태평성대의 상징

청나라의 황하 치수는 건국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상기후가 이어지는 와중에 홍수까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청 태조가 황토 고원의 모든 고을을 비우라 한 것입니다. 황토 고원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살던 곳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황하 범람으로 생겼던 모든 피해의 책임을 지고 황하 준설에 강제로 동원되기까지 했지만, 항상 홍수 걱정에 시달리던 황하 중하류의 백성들은 동정은 고사하고 싸늘한 시선만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사진. 8폭 병풍 '황하청'. 청나라. 종이에 채색.]

홍수를 막기 위해 내린 이 일련의 지시들은 실제로 황하의 범람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예상 밖의 결과도 불러왔습니다. 백 년을 기다려도 맑아지지 않고 오직 성인이 탄생하거나 태평성대가 왔을 때만 일시적으로 맑아진다던 황하가 점차 맑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청 태조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 여겨졌고 청나라의 정통성은 그때까지 황하를 통치했던 어떤 왕조보다도 높아졌습니다. 지금도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세워놓는, 마을 하나 없는 황토 고원과 그 옆을 세차게 흐르는 맑아진 황하를 그린 황하청 양식의 병풍들이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2부. 수운의 대동맥

황하가 맑아지고 깊어지면서 황하를 오가는 배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황하가 청나라 남부 수운의 중심이 되자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의 황하는 하류에서 회하에 합쳐져서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명나라와의 국경인 회하를 거치지 않으면 바다에서 황하로 들어올 수가 없으니, 만일 국경에서 명나라와 분쟁이 생긴다면 황하의 수운이 통째로 마비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림. 시대별 황하 물길의 변천을 나타낸 지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나라 조정에서 처음으로 계획한 것은 황하를 아예 중류부터 북쪽으로 틀어서 송나라 이전의 물길로 되돌리고, 기존의 황하는 지류로만 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황하 본류를 칸발리크가 있는 청나라 북부와 남부를 잇는 거대한 수로로 쓰려는 이 야심 찬 계획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바로 대한 때문이었습니다.

청나라 동북쪽 바다인 발해만은 칸발리크의 외항인 다구가 있는 중요한 곳이지만, 위해부와 타기열도의 대부분을 가진 대한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틀어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황하 하구를 발해만으로 옮기는 것은 제 손으로 대한에 목줄을 하나 더 잡혀주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진. 코끼리가 그려진 항아리. 대월. 청화백자.]

결국 청나라 조정에서는 황하 하류의 물길만 북쪽으로 약간 틀어 회하와 분리하고, 회하 하구 북쪽에 황하 하구가 따로 생기게 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청나라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만락국이 자리를 잡고 남방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황하 하구가 청나라가 대한의 간섭을 피해서 남방의 많은 나라와 교역할 수 있는 중요한 항구가 된 것입니다.

3부. 전쟁과 기근

소빙하기가 되면서 청나라에도 여러 사건이 생겼습니다. 농업 생산량이 떨어지면서 각지에 기근이 일어났고, 이자성의 난이 일어난 틈을 타서 명나라가 침공해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진. 소구경 화포. 명나라. 청동.]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던 청나라가 회하를 넘어 파죽지세로 진격해오는 명나라 군대를 막을 수 있던 것은 황하의 도움이 컸습니다. 황하를 해자 겸 물자 보급로로 삼은 덕분에, 청나라 군대가 난을 진압하고 도우러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나라 군대는 결국 황하를 건너지 못한 상태에서 청나라 기병대에게 후방을 차단당했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명나라 군대 총사령관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명나라의 침공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청나라가 소빙하기를 극복하는 데 황하가 도움이 된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상기후가 점점 길어지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방에서 미곡을 대량으로 사 와 기근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남방에서 들여온 미곡은 황하를 통해 청나라 내륙까지 운반되었고, 특히 기근이 심각했던 황하 상류의 섬서 일대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황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또 한 번 탈바꿈하게 됩니다.

[사진. 궁비라대장 소조상. 청나라. 황토.]

청나라 건국의 주역인 오이라트 부족들은 정통성을 확보하고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불교로 개종했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 통하는 교역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명나라를 압박하기 위해서 뵈첸포(당시 표기로는 토번)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청나라 내부에서는 불교의 교세가 커져갔고, 이는 황하 신앙에도 영향을 주게 됩니다.

본래 황하의 신으로 모셔지던 빙이는 낙수의 신인 낙빈을 부인으로 둔, 인신공양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 홍수를 일으키는 거친 신이었습니다. 인신공양이 근절되면서 빙이 신앙도 쇠퇴했지만, 황하 덕분에 기근을 무사히 넘기면서 다른 형태로 부활하게 됩니다. 바로 궁비라대장입니다.

궁비라대장은 불교에서는 약사여래를 수호하는 12신장의 하나로서 12지에서 돼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원래 천축 바라문교에서는 쿰비라라는 이름의 신령스러운 물고기로 성스러운 강가강의 어머니 신인 강가, 즉 항하의 탈것이었습니다.

미곡을 가득 싣고 황하를 거슬러 올라오는 선박은 굶주린 다이친인들에게는 물 위를 다니는 탈것이면서 약사여래의 수하이고, 재물과 복의 상징인 돼지의 모습을 한 궁비라 그 자체였습니다.

당연히 인신공양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기에 빙이가 갖고 있던 황하의 신의 자리는 궁비라에게 넘어갔고, 그 부인인 낙수의 신의 자리는 낙빈에서 항하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강가강의 신인 강가와 그 탈것인 쿰비라가, 황하의 영향을 받아 부부신인 궁비라와 항하가 된 것입니다.

이 신앙은 지금도 이어져서, 황하 가까운 마을에는 황토를 빚어 구워 만든 궁비라와 항하의 소조상을 모신 사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4부. 문화의 원천

지금은 말라버린 고대 황하 물길 옆에 있던, 상나라 수도 유적인 은허의 발견은 청나라 고고학의 큰 성과기도 했지만 세상에 큰 충격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무덤에서 발굴된 인골들과 갑골문의 내용으로, 사서에 과장되어 기록된 것으로만 여겨지던 잔혹한 순장 풍습이 모두 진짜였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뿌리를 주나라에서 찾던 청나라에는 정통성에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정통제가 사망한 해에 청나라는 명나라에 한 통의 국서를 보냈습니다. 사망한 정통제는 청나라에서 후하게 장사지낼 것이니 신경을 쓰지 말고, 청나라 땅에 있는 영락제, 홍희제, 선덕제의 세 황릉을 이장해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명나라를 기겁하게 한 것은 이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자께서는 용을 처음 만든 놈은 대가 끊어지리라고 하셨는데 황제라는 자가 산 사람을 죽여서 묻다니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시체를 꺼내서 구리채찍으로 쳐부수어 버려야 마땅하나, 선양의 공덕이 있는 정통제의 선조이니 그리하지는 않겠다. 대신 황제의 관곽만 그대로 꺼내서 명나라로 보낼 것이고 억울하게 순장 당한 이들은 청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제대로 장사지내며, 조선 출신인 이들은 고향에 묻힐 수 있게 대한으로 보내줄 것이다. 부장품은 그렇게 하는 비용으로 모두 쓸 것이니, 사람을 보내어 관곽만 가져가라.'

거부할 경우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 두려움에 빠진 명나라는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어 관곽을 가져온 적이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이렇게 거친 방법으로 명나라의 순장을 꾸짖은 것이, 비록 용을 만들어서 대신하기는 했지만 주나라가 상나라의 잔혹한 인신 공양을 줄인 것과 통한다는 주장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진. '후모무' 명문이 새겨진 정. 상나라. 청동.]

이런 일련의 흐름과는 별개로 은허의 발견은 문화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은허의 영향으로 전국적으로 발굴이 진행되며 고대 청동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입니다. 명문이 새겨진 대신 형태적으로는 단순했던 기존의 후기 청동기들과 달리, 새롭게 발굴되는 초기 청동기들은 명문이 새겨진 비율은 낮지만 특이한 조형이 많았습니다.

이 청동기들은 고고학적으로 큰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주나라 초기의 제기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그 형상은 청나라는 물론이고 대한, 금나라, 대화국 등의 제기에 반영되었습니다.

천여 년 전에 성행했던 것처럼 방고청동기가 다시 활발하게 제작되었고, 그 방고청동기를 만드는 틀로는 3천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황하 일대에서 캔 황토가 쓰였습니다.

마치며.

황하는 청나라 땅이 문명이 태동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자리잡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아온, 그야말로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강입니다.

이번 '황하' 특별전에서는 위에 작은 사진으로 실린 유물들만이 아니라 더 많고 다양한 유물들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고, 더 많은 설명과 체험공간이 있습니다.

본 소책자를 보고 관심이 생기신 분은 직접 방문하셔서 3천 년에 걸친 황하의 역동을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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