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91화
291화 후일담. 서방정토를 찾아서.
강연장에서는 '문명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조약의 결과로 대한은 당시의 쿠이섬에 있던 교역소를 정착지로 확대하게 됩니다. 이시카르펫강 하구에는 대한이 직접 만든 큰 항구가 들어서고, 항구 주변에 대한인들의 마을이 생기고 요새까지 두르게 되지요. 그리고 대한인들은 여기를 기반으로 삼고 내륙까지 들어가 교역을 하게 됩니다."
강연자의 말에 방청객 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금나라에서 반발하지는 않았나요?"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인들이 정착지에서 점점 주변으로 뻗어나갔다면 영향력을 키우는 게 눈에 보이니 반발했겠지만, 대한인들은 강을 따라서 내륙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교역할 식량을 배에 잔뜩 싣고서 말이죠. 대한인들이 정착지를 넓히지도 않고, 그 주변에 아이누인들이 모여들지도 않고, 운반에 드는 수고까지 덜어주는데 반발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한이 기술이 넘어갈까 봐 어지간히 걱정스러운가 보다 하고 생각했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죠? 자, 그렇게 대한이 진출한 내륙이 바로 여기입니다."
강연자는 기기를 조작해 확대된 지도를 띄우더니 이어서 말했다.
"이시카르펫강을 따라 올라가다가 그 지류인 투예피라강을 타고 올라가서 나오는 평야였습니다. 아이누인들은 이 일대를 말라붙은 큰 강, 즉 삿포로펫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는 지명이 나오자 방청객들 사이에서 아아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대한은 거기에 작게 교역소를 만들고 아이누인들에게 여러 가지를 전파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각종 필기도구와 한글인데, 아이누인들이 글을 아예 몰라 교역이 불편하다면서 전파한 것이었지만, 한글을 익힌 아이누인들은 여진말이나 대한말과는 다른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하면서 점점 정체성을 갖춰나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누인이라는 정체성인 거죠?"
옆에 앉아 있던 사회자의 질문에 강연자가 끄덕이더니 말했다.
"맞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냥 코탄, 즉 마을이나 부족 단위로만 가지고 있던 동질감이,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로 확대된 거죠. 그리고 똑같이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던 쿠이, 쿠르, 아이누 중에서 신과 대비되는 인간을 뜻하는 말인 아이누가 이 정체성의 이름이 됩니다. 아이누국의 지역 구분 명칭도 이때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아이누국 전체 지도가 나타났다.
"중앙의 본섬은 육지의 세상이라는 뜻으로 야운모시르, 동쪽의 열도는 많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포로모시르, 북쪽 길러미섬은 바다 건너 세상이라는 뜻으로 레푼모시르, 그리고 바다 건너 남쪽은 이웃한 세상이라는 뜻으로 사모르모시르가 되었습니다."
"아이누인들이 하나로 뭉치면 금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아 할 것 같은데요."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금나라는 니브흐인들을 모아서 누르간부를 만들어서 통제했던 적이 있어서, 아이누인들이 모이는 것도 자신들이 잘하고 있어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한이 아이누인들에게 전파하는 갖가지 것들도 그냥 호의에서 나온 것이고 자신들의 아이누 지배에는 별 영향을 안 준다고 생각했죠. 그게 전부 양녕공이 남긴, 대한이 아이누를 금나라에서 독립시키려는 계획의 일부라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잠시 말을 끊어 방청객들을 집중시킨 강연자가 말을 이었다.
"양녕공도 예상하지 못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불교였죠. 불교를 전파한 것 자체는 의도한 거였어요. 옛 삼한이 그랬던 것처럼, 지역색이 강해서 통합에 쓰기 힘든 민간신앙 대신 체계가 잡힌 불교를 이용해서 아이누인들이 뭉치게 하려는 거였죠. 그거까지는 좋았는데, 아이누인들의 불심이 생각보다 강하고, 주로 퍼진 게 복잡한 의식이나 힘든 수행이 필요 없는 정토 신앙이고, 여기에 대한이 전해준 지식이 섞이면서 이게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정토 신앙이면 염불법이네요."
"맞습니다. 염불을 외서 내세에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염불을 외던 아이누인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강연자는 목소리 톤을 바꾸어서 말을 이었다.
"스님이 서방정토는 저 서쪽 멀리에 있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대한인들한테 배우기로는 우리가 사는 여기는 넓은 땅의 동쪽 끝에 있고, 세상은 평평한 게 아니라 공 모양이라고 하네? 그러면 여기서 바로 동쪽으로 가면 굳이 내세까지 안 기다리고도 서방정토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어때요, 천재적인 발상 아닙니까?"
그 말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사회자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지구가 조롱박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크리스토발 콜론에 비하면 엄청 과학적이네요."
"그러게요. 자, 하여간 이렇게 서방정토로 떠날 마음을 먹은 아이누인들은 본섬 동쪽 끝인 시레토크로 모입니다. 아무리 아이누인들이 배를 잘 타고 불심이 깊더라도 냅다 먼 바다로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시레토크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포로모시르의 섬들을 하나씩 따라가기로 한 거죠. 그렇게 좀 가다 보니까 육지가 나왔어요. 그런데 아이누인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가 서방정토는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스님 설법 시간에 졸았어도 서방정토가 농사는 꿈도 못 꿀 정도로 춥고 사방에서 화산이 터지는 땅은 아닐 거거든요."
또 웃음이 터진 방청객들을 둘러보며 강연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아무래도 더 가야 하나 보다 하고 일단 그 땅에 이름을 붙입니다. 뻗어나간 터지는 땅. 캄 차크 카. 네, 캄차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캄차카에 중간 거점을 만들고 동쪽을 보니까 또 섬들이 있는 거예요. 지금 말하는 우나간 열도죠. 여기 사는 우나간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계속 동쪽으로 갔더니 또 육지가 나왔습니다."
"거기도 추울 텐데요."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서 계속 남쪽으로 탐사하다가 드디어 기후도 제법 괜찮고 배 대기도 좋고 이미 사람들도 사는 곳에 도착합니다. 사람들하고 말은 안 통하지만 마을 이름이 지절알리치라고 하는 것도 어찌어찌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다 좋은데 여기도 서방정토는 아닌 거 같아요. 자, 그럼 이제 에이 허탕 쳤네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끝낼까요?"
강연자와 눈이 마주친 사회자가 대답했다.
"좀 더 찾아보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서 말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방정토가 있는 곳을 찾은 거 같다. 그런데 해안가에는 없고 내륙에 들어가야 있는 것 같다.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왜냐면 첫째로 거기 사람들한테 선물로 받아온 물건이 누구도 본 적 없는 물건이었고, 둘째로 갔다 온 사람들이 말하는 그곳 지리가 대한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지도의 서쪽하고 전혀 달랐던 거예요. 그 새로운 땅은 당연히 서방정토, 에파스 투르삭 모시르. 서쪽의 깨끗한 땅이라고 불렸습니다. 이게 바로 에파스 대륙이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동쪽에서 찾은 땅인데 서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참 오묘하죠?"
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는 방청객들을 향해 씨익 웃은 강연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방정토를 찾으려는 목적이건, 의심스러워서 확인해보려는 목적이건 수많은 이들이 에파스 대륙으로 모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절알리치에서 위말강을 따라 올라가고, 거기서 다시 왐파파강을 따라 올라가 마침내 대평원에 도착한 이들은 드디어 결론을 내립니다. 여기는 서방정토가 아니다. 세계지도에 있던, 서역보다 서쪽의 땅도 아니다. 지금까지 탐사한 일부만 해도 이미 대한보다 넓은, 우리가 모르던 거대한 땅이다 하는 결론이죠."
잠시 적막이 찾아온 촬영장을 가만히 둘러보던 강연자가 말했다.
"이 뒤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입니다. 저마다의 사연과 이유를 가진 많은 사람이 에파스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극서에서도 에파스 대륙이 천축이 아니라 미지의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게 수많은 사람과 기술, 풍습, 작물, 가축이 두 대륙을 오가면서 새로운 변화를 낳았습니다. 너무 많으니까 표로 볼까요?"
화면에 나타난 표에는 왼쪽에 구대륙에서 건너간 것, 오른쪽에는 에파스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 나와 있었다.
"우선 에파스 대륙에서 건너온 것 중에서 주목할 만한 건 작물들입니다. 땅콩, 호박, 감자, 단감자, 옥수수, 토마틀 같은 식용 작물은 물론이고, 고추, 카카와틀, 담배 같은 향신료나 기호품들도 전부 에파스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지요. 이것들은 새로운 상품이 되고 문화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에 농사짓기 힘들던 땅을 풍족한 농경지로 바꿔놓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표의 오른쪽 부분이 사라지고, 구대륙에서 건너간 것들이 나와 있는 표가 확장되었다.
"반대로 구대륙에서 건너간 것 중에 우선 주목해야 하는 건 가축들입니다. 물론 작물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어요. 밀, 순무, 보리, 콩만 해도 4윤작법하고 같이 건너가서 인구 증가에 큰 기여를 했으니까요. 하지만 가축만큼은 아닙니다. 특히 소, 돼지, 말, 양, 닭은 에파스 대륙 전체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때 사회자가 질문을 던졌다.
"에파스 대륙에도 소는 있지 않았나요?"
"에파스 들소가 있는데 성질이 너무 거칠어서 아직도 가축화가 안 됐어요. 반면에 구대륙에서 데려간 소는 길들일 필요조차 없죠."
사회자가 알았다는 듯 끄덕이자 강연자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돼지는 사람이 못 먹는 것들을, 닭은 벌레나 풀씨를 단백질로 바꿔줍니다. 소는 풀을 단백질로 바꿔줄 뿐만 아니라 밭을 갈고 짐을 나르는 데에도 쓸 수 있습니다. 이 가축들과 작물 덕분에 에파스 대륙에서 농업이 번성하기 시작했죠. 또 양과 말은 에파스 대륙의 평원 부족들도 구대륙의 유목을 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이건 평원으로 이주한 이들 대부분이 몽골인과 여진인들이어서 더욱 그랬습니다. 양모로 모전을 만들어 게르를 짓는 법, 융단을 짜서 바닥에 까는 법, 농사를 병행하는 법, 말을 타는 법까지도 같이 배울 수 있었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면이 바뀌며 전리품을 옆에 쌓아놓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웃고 있는 사내의 흑백사진이 나타났다. 사진 하단에는 조금 특이한 한글 표기로 '타탕카 이요타케'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 각종 제도와 문화, 기술입니다. 한글로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하면서 아이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체성이 생기고,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부족끼리 합치고, 여진인이나 몽골인, 대한인의 제도를 따라 하면서 부족들은 점점 나라의 형태를 갖춰갔습니다. 규율을 갖추고 화약 무기로 무장한 군대도 생겼죠. 훗날 북에파스 대륙 동부 해안에 상륙해서 내륙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던 잉글랜드인들이 저항다운 저항도 못 해보고 졸전을 거듭하다 본토로 달아난 건 이미 이때부터 예견된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방청객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극서인들이 이주했던 남에파스 대륙에서는 전염병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죽었다고 아는데, 북에파스 대륙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나요?"
"오, 아주 좋은 질문이네요. 남에파스 대륙에 이주한 극서인들은 대부분 인구밀도가 높고 온난한 지역에서 가축과 부대끼면서 살던 이들입니다. 그들이 몸에 지닌 수많은 질병은 면역력이 없는 남 에파스 대륙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죠. 하지만 북에파스 대륙에 이주한 아이누인이나 몽골인, 여진인은 서늘하고 인구밀도도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살던 이들이라서, 오히려 원주민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전염병에 약할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기후가 온난하고 인구밀도가 높다고 하면 대한 정도인데, 대한인들은 비누로 씻는 문화가 있었고 대창진 접종도 대부분 받은 상황이라 역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질병이 퍼져도 조금씩만 노출되었고, 곧 종두법도 전파되면서 북에파스 대륙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면역을 획득했습니다. 이만하면 답변이 된 거 같네요."
질문자가 그렇다고 하자 강연자는 방청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실 북에파스 대륙이라고 해서 충돌이 없던 건 아닙니다. 이주해 온 이들과 원주민들이 전쟁을 하기도 하고, 서로 사기를 치거나 납치를 하기도 했죠. 하지만 역사상 문명과 문명이 만났을 때는 대부분 큰 충돌이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유례가 없는 이런 대륙과 대륙 간의 만남이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양쪽 모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는 건 분명히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제 강연은 여기까지지만, 이 강연도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강연자는 미소 지으며 방청객들을 향해 깊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