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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90화 (29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90화

290화. 후일담. 수양의 항해.

전쟁으로 보는 세계사 8화, 천축으로 가는 길 2부 촬영장.

촬영장비가 모두 준비되고 신호가 떨어지자 진행자가 말했다.

"네, 전쟁으로 보는 세계사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이어서 천축 순례길 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난화에서는 태시 2년에 드디어 수양공이 수양왕이 되어서 사람들을 이끌고 조와국으로 떠나는 데까지 했는데요. 박사님,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나요?"

"늦가을 계절풍을 타고 남쪽으로 가는 것이라 가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조와국 왕성까지 무사히 도착했죠. 그리고 조와국에서는 대한의 황자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도우러 왔다는 것에 감격해서 크게 환영 행사를 열었습니다. 국왕이 애지중지하던 코끼리들까지도 데리고 나왔지요."

"엄청 거창하게 했네요."

"사실 이게 순수하게 환영하는 목적으로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위신이나 권력 때문에 한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습니다."

진행자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자기 위신이요?"

"땅도 빼앗기고 사원도 공격당해서 먼 나라에까지 도움을 요청했는데, 갑자기 황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을 이끌고 도와주겠다고 온 거예요. 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무슨 위해를 끼치지는 않더라도, 수양왕이 이끄는 사람들이 잘하면 잘할수록 자기가 무능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잖아요?"

"아, 백성들에게는 '우리가 힘들어서 도움을 요청했다'가 아니라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도움을 요청했다', 뭐 이렇게 보이려고 한 거네요. 새로 온 사람들에게는 '우리도 충분히 강하니 다른 생각 하지 마라'는 의미도 있을 거고요."

박사가 맞다는 듯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렇죠. 그 환영 행사에서 국왕이 키우던 코끼리 여덟 마리를 다 왕궁 입구에 나란히 뒀는데, 이게 사람이 많은 곳에 두기에는 위험해서만이 아니라 커다란 짐승들을 앞에 둬서 기선제압을 하려고 한 거라고 보기도 하죠. 그런데 이 코끼리들이 예상 못 한 변수가 됩니다."

"뭐였죠?"

"왕궁 입구로 들어오던 수양왕이 들어오니까 코끼리들이 머뭇거리더니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코끼리들이요? 아니 코끼리들이 황자라는 신분을 알아보는 것도 아닌데 그게 되나요?"

"양쪽 기록에 모두 남아있으니 그런 일이 일어난 것 자체는 확실합니다."

"신기하네요. 처음 보는 사람이 처음 보는 옷을 입고 들어와서 겁을 먹었나."

"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이 예상 못 한 일이 수양왕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진행자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남방에서는 코끼리가 좋은 상징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거랑 관련이 있나보네요."

"예. 군주의 위엄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석가모니의 태몽이 흰 코끼리가 품에 들어오는 거였죠. 그런데 지금 조와국 백성들은 물론이고 수양왕을 따라온 사람들도 전부 불자잖아요?"

"아!"

"대한인들에게는 '영물인 코끼리가 우리 황자님에게 예를 표했다!'가 되는 거고, 그냥 옆나라 황자로만 생각하던 청나라나 금나라, 대화국 사람들도 놀랄 수밖에 없죠. 사실 조와국 사람들은 코끼리가 사람 피하는 걸 많이 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 사람들은 코끼리 자체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잖아요. 그것도 수양왕이 코끼리를 처음 보고도 당당하게 성큼성큼 걸어가면서 신기하다는 듯 구경을 했다고 해요."

"더 그럴 수밖에 없네요. 그럼 이제 다들 수양왕을 잘 따르게 되겠네요?"

박사가 앞에 놓은 기기를 조작해 뒤에 보이는 화면에 군사 편제표와 지도를 띄우며 말했다.

"사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수양왕 본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엄청 자신을 얻었죠. 그해서 자신을 따라온 사람들로 군대를 꾸리고 항마군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게임에서도 많이 나오는 그 항마군이 이거였네요."

"맞습니다. 이 항마군은 대한인, 화북인, 여진족, 대화국인이 다 있으니까 궁수, 포수, 기병, 살수까지 부족한 병과가 없어요. 그 항마군이 공세를 시작하니까 이번에는 회교 세력이 위기감을 느낍니다. 사실 전에는 별문제 없이 썼던 항로인데 힘으로 빼앗았던 거라, 이번에 다시 뺏기면 다음엔 쉽게 못 쓰게 될 거 아니에요."

"괜히 뺏었다가 척을 지게 됐네요."

"그래서 조와국이 했던 것처럼 다른 회교 세력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항로가 걸려 있는 상인들이 후원하고, 신자들은 직접 참여하고 하면서 규모가 커지니까 이게 그냥 항로를 두고 하는 싸움이 아니라 지하드, 성전이 되어 버린 거예요."

뒤에 뜬 자료화면의 지도에 회교 세력을 나타내는 녹색 화살표와 항마군과 주변국가들을 나타내는 주황색 화살표가 나타났다.

그 규모를 번갈아서 보던 진행자가 말했다.

"이건 쉽지 않겠는데요."

"바로 여기서 수양왕의 군사적 안목이 발휘됩니다. 항마군에서 군교에 해당하는 계층을 더 늘리고 주는 돈도 기존의 1.5배로 늘렸어요. 또 천축에서 염초가 많이 난다는 말을 듣고 최대한 사들인 다음 조와섬 동부의 유황을 들여와서 화약도 대량으로 제조했습니다. 아예 화약과 화포를 관리하는 부대인 총통대대를 만들 정도였죠."

박사가 화면에 홍윤성의 초상화를 띄우며 이어 말했다.

"게임이나 영화로 유명한 상장군 홍윤성도 바로 이때부터 활약합니다. 냉혹하고 무자비하지만 따뜻한 모습도 보여주고, 싸울 때면 항상 살수들의 선두에서 직접 계림도를 뽑아 들고 돌격해서 적들을 베어 넘기는 용맹한 장군으로 이름을 날리죠."

"중학생들의 영원한 우상이죠."

그 말에 박사와 진행자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자, 이렇게 승리를 거듭하면서 항마군에도 여유가 생기니까 수양왕은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지금의 대리국 자리에 명나라가 설치한 세 성이 있었는데, 거기의 옛 대리국 세력들에게 화약을 팔기 시작한 겁니다."

"지난 화에 말씀하셨던 그거네요."

"예. 대리국에는 화약을 팔아 주고, 대월국과 통교하면서 동의도 받습니다. 그리고 대리국에는 산지가 많아서 식량 생산이 어려우니까, 대월국에도 화약을 팔아 주고 그 값만큼의 식량을 바로 대리국으로 보내게 합니다."

"무상은 아니죠?"

"당연히 아니죠. 대리국에 판 화약과, 대월국에서 식량을 사 오느라 쓴 화약 값은 나중에 대리국이 영토를 다 확보하고 난 다음 항구로 받기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대리국 재건이 완성된 다음에 받는 거인 데다가, 갓 세워진 대리국 입장에서도 대한이 항구를 가지고 가까이에 계속 머물러 주면 안심이 되니 나쁜 조건은 아니었지요."

박사는 뒤에 항마군 점령지역 지도를 띄우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자, 그렇게 해서 항마군은 섬라곡국 남쪽의 육지는 거의 다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땅으로 이어진 섬라곡국이 북쪽에서 호응을 해줘서 가능했던 건데, 수마트라섬 서북쪽은 멀리 떨어진 데다가 거기서 또 작은 섬들로 이어져 있어요. 회교 세력들이 서쪽에서 배를 타고 증원을 보내는 걸 막기가 어려운 거죠."

"그래도 일단 항로는 되찾은 거 아닌가요?"

"항로는 되찾았죠."

"그럼 명나라는 항로에 손도 못 대보고 상황이 끝난 거네요. 명나라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기껏 남들이 열심히 싸워서 항로를 되찾아놨는데, 와서 숟가락만 얹으려고 하는 정도도 아니고 제일 기여한 대한을 견제하려고 들면 주변국이 좋게 볼 수가 없죠. 게다가 대한이 견제당하면 항로가 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잖아요."

"국력이 약해졌는데 적국을 늘리는 짓은 하면 안 되죠. 아니, 애초에 지금 대리국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이미 적국하고 전쟁 중이잖아요?"

"그렇죠. 대리국이 막 일어나는 중이지만 절대로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이때 항마군이 초석하고 유황에 여유가 생겨서 가끔 대한에 보내기도 할 정도였단 말이에요."

그 말에 진행자가 놀라서 물었다.

"남을 정도였던 건가요?"

"남아서가 아니라 지금 이렇게 잘하고 있다고 보낸 측면이 강하지만, 화약에 여유가 있던 건 확실합니다. 그렇게 풍부한 화약을 대리국에 계속 보내면, 대리국에서는 그 화약을 가지고 훈련도 하고 전투도 하는 거죠. 대리국 병사들은 높은 지역에 살아서 폐활량도 좋고, 지리도 잘 아는데 화약을 부담 없이 쓰면서 훈련까지 했으니 명나라가 쉽게 감당할 수가 없어요. 결국 대리국이 영토를 넓혀서 바다까지 도착합니다."

"대단하네요."

"이제 회교 세력도 충분히 꺾었고, 항로하고 순례길도 안전해졌고, 대리국도 기초가 잡혔어요. 이만하면 됐다 생각하고 수양왕이 돌아가려고 하는데, 현지 토호가 찾아와서 묻습니다."

박사가 말에 잠시 여유를 두고 입을 열었다.

"마하라자시여, 고향에는 얼마나 머무르다가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마하라자면……."

"대왕이라는 뜻이죠. 수양왕이 거기서 자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를 황자로서의 왕이 아니라 군주로서의 왕으로 여기고 있고, 여기를 내가 다스리고 있고 자신들은 그 백성이라고 생각하는구나 한 거죠."

"하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자신들도 구해 주고 영토도 되찾고 코끼리들도 예를 표했는데 이제 다 끝났으니 영영 떠난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겠죠. 그냥 고향에 갔다 오려나 보다 하는 것도 당연해요."

"그래서 수양왕은 일단 대충 둘러댄 다음, 대리국 사신들과 측근 몇만을 데리고 한성부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태시제를 만난 자리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나라를 세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세하게는 몰라도 어떻게 됐는지는 아는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라고 했겠네요."

박사도 웃으며 대답했다.

"네. 대한은 중요한 항로에 우방국이 생기니 두고두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됩니다. 또 대화국이나 청나라에서 간 이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 또한 다시 돌아와 버리기라도 하면 기껏 멀리 보내 버린 보람이 없죠."

"대화국이나 청나라가 그 사람들을 보내 버려서 나라를 안정시키려고 했던 건데 돌아와 버리면 헛수고가 되고, 그러면 대한에도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승인해 주고 다시 떠나보내기 전에 나라 이름도 지어 줍니다. 수양왕의 거점인 말라카강 일대를 그때까지는 만랄가라고 옮겼는데, 명나라가 만든 표기일 뿐만 아니라 랄이라는 글자자 어그러진다는 뜻이라 그리 좋지가 않은 뜻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즐거움이 가득하라는 뜻으로 지어준 게 만락국이라는 이름입니다."

"만락국이라는 이름이 거기서 나온 거군요."

"예. 그렇게 나라 이름과 각종 제도에 관한 책을 받고, 추가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모으고, 가족들도 대동해서 남방으로 돌아옵니다. 이 이후에 잠깐 태자가 풍토병에 걸려서 앓아누웠었는데 금방 쾌차했고, 드디어 정식으로 대한의 아우 나라인 만락국을 선포하고 대왕, 즉 마하라자로 즉위하죠."

"섬라곡국이나 조와국이 반대하지는 않았나요?"

진행자의 질문에 박사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두 나라 다 찬성했습니다. 만락국이 세워진 땅은 원래 섬라곡국 땅이었던 적이 없어요. 만락국이 자리 잡고 항로를 안전하게 지켜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조와국은 자기 땅이었던 땅인데도 왜 찬성한 건가요?"

"애초에 그럴 힘도 없지만 만락국을 쫓아내더라도 기다리는 건 분노한 대한과, 남쪽으로 밀고 내려올 기회를 보는 섬라곡국과, 교역로가 다시 위험해져서 불만을 품은 주변 나라들.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다시 침공해 올 회교 세력들 뿐이니까요."

"대한이 빠졌으니 항로에 간섭할 기회가 생긴 명나라만 기뻐하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명나라가 항로에 손을 뻗고 강해지면, 나라를 세우는 중인 대리국은 물론이고 대리국을 방패로 삼으려는 대월국에도 좋지 않은 일이에요. 다 적만 남는 거예요."

"이거 뭐 찬성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하는 상황이네요."

"대신 만락국에서도 아무래도 좀 마음에 걸렸는지 수마트라섬에서는 인드라기리강을 국경으로 삼고, 그 남쪽에 있던 영토들은 전부 무상으로 넘겨줬습니다."

지도에 새롭게 국경이 그어지자 진행자가 말했다.

"지금 국경이네요."

"그리고 말라카강이 흘러서 그 지역이 말라카라고 불렸던 거였는데, 말라카가 나라 이름이 되어 버렸으니 그대로 쓰면 도읍 이름하고 똑같아져 버리잖아요? 그래서 강 이름을 만강이라고 고치고, 한강 북쪽에 있던 한양이 한성부가 되었던 것에서 따서 만성부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만성부가 그렇게 붙은 이름이네요."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보여드릴게요. 옛날 만락국 국기예요."

박사가 그렇게 말하자 화면에 붉은 바탕에 흰 코끼리 여덟 마리가 그려진 깃발이 나타났다.

"아, 코끼리 여덟 마리!"

"네. 사실 수양왕에게 인사했던 건 흰 코끼리는 아니었지만 기왕이면 더 좋은 상징인 흰 코끼리를 쓴 거죠. 하지만 이게 너무 복잡해서 바뀐 게……."

화면이 넘어가며 붉은 바탕에 중앙에는 흰 동그라미 여덟 개가 둥글게 배치된 깃발이 나타났다.

"지금의 만락국 국기입니다. 흰 코끼리를 흰 동그라미로 바꾸면서, 여덟 동그라미가 팔정도를 상징한다는 뜻도 같이 넣었죠."

"와, 신기하네요. 만락국이라고 하면 대한과 친하고 대한말이 통하는 나라, 교역의 중심지, 여름철 휴양지 이런 인식만 있었는데 생각보다 재밌는 내력이 있었군요. 오늘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박사님."

박사에게 작게 인사한 진행자가 화면을 보며 마무리했다.

"네,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더 참신하고 유익한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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