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9화
289화
"네가 직접 조와국까지 가고자 한다니.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것이냐?"
양녕의 질문에 이유가 고민을 털어놓듯 말했다.
"백부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저는 문법 정리나 인쇄, 고고학 같은 여러 분야에서 많은 것을 이루고 명성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습니다. 주로 무언가 새롭고 위험한 것에 도전해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지요."
"모험심이로구나."
"예. 젊었을 때는 아바마마께 관심을 받고자 말을 타고 달리다가 뛰어내려 착지하고 하는 짓도 자주 했었지요. 아바마마께서 그러다 다친다며 걱정하시기도 했고, 백부 덕분에 여러 학문에 관심이 생기면서 그런 짓은 안 하게 되었지만……."
이유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바마마께서 붕어하시고, 순례길을 되찾기 위해 사람들이 간다는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모험심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마흔이 넘어서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느냐. 내가 산해관을 뚫은 것도 환갑이 거의 다 되어갈 때지 않았느냐.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겼고 너도 불심이 워낙 깊으니 가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사람들도 많이 가는지나 두 나라의 요청이 불심에서 나온 것인지를 물어본 것이었구나."
이유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래서 여쭈었던 것은 맞으나, 사실 모험심이나 불심만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다른 동기가 있는 모양이구나."
"예. 제가 간다면 대한에서 가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신분이 높겠지요. 어쩌면 척동상단의 배를 타고 가는 모든 이들 가운데서 가장 높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위에 있어도 보고, 거느려도 보고, 군대를 통솔해 보고도 싶습니다. 섬라곡국과 조와국 임금은 불심이 명분이었는지를 물어봐 놓고서, 정작 저는 이렇게 명예욕이 목적이라니 새삼스레 마음에 걸리는군요."
'교육과 환경에 따라 사람이 바뀔 수 있다지만, 역시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인가. 하긴, 그렇기에 누구나 군자가 될 수는 있지만 쉽게 될 수는 없는 것이겠지.'
원래 역사에서의 이유의 행적을 떠올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녕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두 임금도 불심만이 아니라 세속의 이익도 같이 있지 않았느냐.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그럼 너는 순례길을 되찾는 데에 직접 갔다오고자 하는데, 멀기도 멀고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지라 고민이 되는 것이겠구나."
"그렇습니다. 백부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내가 너와 함께 정음에 관한 일을 할 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해야 하는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 도와주겠노라고 했던 말 말이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던 이유가 눈을 크게 떴다.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래. 물론 네가 순례길을 되찾는 데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이유만으로 가려 한다면 다들 말릴 것이다. 그 멀고 위험한 곳에 황자가 간다니 걱정을 안 할 수 없을 것이고, 내가 거들어 주더라도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게 나라의 일을 위해 가는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느냐?"
"나라의 일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양녕이 슬쩍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서 말했다.
"너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번에 대한이 직접 남쪽으로 힘을 쓰는 김에 명나라를 한 번 더 쪼개려고 한다."
"이미 화남만 남았는데 또 쪼갠단 말씀입니까?"
"그래. 화남만 가지고도 여전히 국력이 강하니, 미리 꺾어두려는 것이지. 운남과 귀주, 광서의 세 성을 떼어내어 새 나라를 만들 것이야."
"운남이라면…… 대리국을 다시 만드시려는 것이겠군요. 광서까지 포함된다면 원래 대리국보다는 조금 더 크겠지만 말입니다."
"맞아. 명나라의 국력을 확실히 꺾어 두고, 대리국이 바다에 접하게 하기 위해서 광서도 포함시킨 것이지. 그렇게 대리국을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일을 직접 현지에서 주도할 사람이 마침 필요했는데, 거기에 너를 추천하마."
"조정에서 반대하지는 않을까요?"
"내가 이미 대군의 신분으로 칠주도나 동북면에서 군대를 이끌고 정복에 나서서 영토를 얻어냈던 적이 있지 않느냐. 거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문제 되지도 않을 것이야."
이유는 그 말에 잠시 안심하는 듯했지만, 곧 다른 걱정거리가 생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명나라를 쪼개는 일이면 명나라와 싸우기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 능력으로 감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번에 명나라를 쪼개어 청나라를 일으킬 때도 산해관에서 오이라트 군대와 싸웠지 명나라와 싸웠던 적은 없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굳이 대한이 명나라와 싸울 필요는 없다."
"오이라트처럼 명나라와 대신 싸울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대리국이 원나라에 멸망했을 때 마지막 군주였던 천정현왕(단흥지)이 대리총관이 된 이후로 단씨가 대리총관을 세습해왔어. 비록 명나라가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운남도 정복한 이후로는 옛 대리국 땅 일대가 아니라 대리부 운룡주라는 작은 지역만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대리국의 황통 자체는 이어져 오는 셈이지. 주변 지역도 거의 토관들이 세습해가며 다스리고 있다."
"그들을 도와서 대리국을 다시 일으키게 하면 되는 것이로군요."
양녕이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리고 대리국의 옛 땅 남쪽으로는 안남국(월남)이 있다. 안남국은 남쪽에 있는 점성국(참파)과 싸우느라 여력이 없는데, 화남으로 밀려난 명나라가 자신들 쪽으로 세력을 뻗어올까 걱정하고 있을 것이야. 만일 대리국이 다시 세워진다면 명나라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니, 이런 내용을 알리고 협조나 인정을 바란다고 하면 안남국도 반길 게다."
양녕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또 안남국의 군주는 명나라에는 안남국왕으로서 조공을 바쳤지만, 나라 안에서는 대월국의 황제로서 군림한다. 나라마다 천명이 있고 그 천명을 받은 천자가 다스리며 서로 대등한 황제로서 대한다는 사상을 전해주면 대외적으로도 천자국을 선포하며 대한과도 통교할 수 있으니 그 역시 반길 게야."
"그러려면 트집 잡을 명나라가 약해야 하니, 그것때문에라도 대리국을 다시 세우는 걸 돕겠군요. 기왕이면 그 나라들에 정음을 전해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한자에 의지하지 않고 중국과는 다른 자신들의 말과 글을 정리할 수 있고 백성들을 잘 가르쳐 인재를 키워낼 수 있으니, 장차 명나라를 견제하기 좋을 것 아닙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하는 김에 네가 했던 일들을 살려서 각 나라에서 쓰는 말의 문법을 정리하게 하고, 책도 찍게 하고, 나라의 보물도 잘 관리하게 하면 실로 세상에 이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재능과 업적, 황자라는 신분까지 정말 이번 일에 적격인 인물은 너뿐이로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자신감이 생깁니다."
칭찬에 눈을 빛내는 이유에게 양녕이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가서 안 올 것도 아니고, 멀다고 하지만 척동상단의 배가 능히 오갈 수 있는 곳이고, 위험하다고 하지만 네가 직접 전쟁터에 뛰어들 일도 없다.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 사내로서 뜻을 펼쳐보거라."
* * *
1458년 10월 중순 모일.
한성부. 돈의문 밖.
이유가 처음으로 자신도 순례길을 되찾는 데에 따라가겠다고 말했을 때는 형인 이향은 물론이고 조정에서도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확고하고 양녕의 추천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능이나 신분까지 따져봤을 때 실제로도 이유만한 적격자가 없었던 덕에 이유는 원하던 대로 조와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이유가 떠나는 날이었다.
"월나라는 천자국으로서 황자들에게 왕작을 내린다고 한다. 섬라곡국이나 조와국은 그런 제도는 없지만 명나라나 월나라와 교류해 왔으니 그걸 익숙하게 여기겠지. 내가 네게 왕작을 내려 수양왕으로 삼고 면류관과 장복을 하사한 것은 백부께서 정동군을 이끄실 때 축자후로 책봉되셨던 전례를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그 나라들이 네가 황자이면서도 공작이라고 무시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니 절대로 주눅 들지 말고 서러운 일도 당하지 말고 당당히 행동하거라."
"예, 폐하."
이유를 만류하던 이향도 결국 사내로서 뜻을 펼쳐보고자 한다는 말에는 이길 수 없었다. 대신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하나하나 다 챙겨주었고, 이유가 떠나는 지금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당부하고 있었다.
"위험한 곳은 전쟁터건 늪지건 일부러 가지 말고, 습한 곳이라 모기가 많다고 하니 향을 자주 피워 쫓아내거라. 네가 튼튼하다고 하지만 어떤 풍토병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니, 조금이라도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으면 지체없이 의원에게 말하거라."
이향은 이어서 이유 옆에 서 있는 석신미에게 말했다.
"대한에서 조와국에 가는 많은 승려 가운데 자네를 그 대표로 삼은 것은, 자네가 수양과 친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번에 대창진이 창궐했을 때 막아 낸 공로가 있기 때문일세. 수양이 딱히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네가 옆에서 아프지 않도록 잘 살펴주게나."
"예, 폐하."
이향의 당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양녕은 짐을 챙겨놓고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직접 검토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말하자면 사실 이미 검토는 마쳤지만, 아직 검토가 남은 것처럼 하며 한 사내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있었다.
"자네가 지난 10여 년간 한 일들을 보면 이번 일도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맡기는 것이네. 잘해 주게나."
양녕의 말에 홍윤성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하."
"쿠루시마 천호소는 걱정할 것 없네. 남조에서는 자네 뒤에 더 큰 세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자네가 다른 곳으로 가고 새로운 이가 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애초에 오토모와 키쿠치 가문이 관동으로 떠난 뒤로는 밀무역에 관여하는 이들이 자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말이지."
"저를 갑자기 데려와서 저하께서 의심받으시지는 않을까요?"
"조정에서 쿠루시마 천호에 대해 아는 것은 이누가미라는 이름뿐이야. 재야에 묻혀 있다가 이번에 내 천거로 뽑힌 홍윤성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 할 걸세."
실제로도 양녕은 대한 곳곳을 다녔기에 어디 사는 누구를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고, 홍윤성이 시범삼아 무예를 선보이자 조정 신료들은 '이런 대단한 인재를 알고 천거하다니'라고 생각할지언정 의심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나던 날, 내가 맡긴 일을 잘 해내면 나중에는 세상에 드러나는 부귀를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었지. 지금이 바로 그때네. 지난 10년간 자네의 천성을 통제하고 들키지 않는 것도, 사람을 이끌고 다스리는 것도 익혔을 것이니 지금이라면 부귀는 물론이고 명예도 얻을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저하. 저하께서 주신 기회를 허투루 쓰거나 저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이번 일을 반드시 잘 해내겠습니다."
"고맙네. 그럼 내 조카를 가까이에서 잘 지켜주게나."
대화를 마친 양녕은 이향과 이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이향에게 말했다.
"마지막 확인도 다 마쳤습니다, 주상."
그 말에 이향은 감정을 정리하듯 심호흡을 하더니, 이유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너희 가족은 내가 잘 돌볼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거라, 아우야."
"예. 다시 뵙겠습니다, 형님."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천천히 놓은 이향은 이유가 일행을 이끌고 떠나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양녕에게 물었다.
"수양이 잘 해낼까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낼 것입니다."
"백부께서는 앞날도 전부 내다보시는 것만 같았는데, 모르겠다고 하시니 약간 의외입니다."
"허허허. 지금까지야 제가 제 뜻과 힘으로 여러 일을 해왔습니다. 제가 두는 판이니 내다볼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 두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 늙은이의 머리로 전부 읽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옳은 미래일 것입니다."
양녕은 흐뭇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살면서 쌓여온 역사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쌓여 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