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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8화 (28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8화

288화

"조정에서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대한에도 급하고 중요한 일인 겁니까?"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듯 묻는 황보인에게 양녕이 말했다.

"당장 급하지는 않으나, 그 중요성을 생각하면 조정이 직접 나서야 할 세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오. 우선 조와국은 나라의 영토를 빼앗겨서 중요한 항로를 쓰지 못하게 되었고, 섬라곡국도 거기에 휘말려서 피해를 보고 있지 않소?"

"그렇지요."

"그런데 그 상대는 큰 나라가 아니라 여러 회교도 세력들이오. 그들을 막아 내지 못해서 땅을 빼앗기고, 두 나라가 힘을 합쳐서 되찾지도 못해서 온 세상을 다니며 도움을 청하고 있소. 과연 이들이 여러 나라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도움만으로 항로를 되찾을 수 있겠소? 되찾는다고 하더라도 잘 지킬 수 있겠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조문하는 친서에 도와달라는 내용을, 그것도 두 나라 임금이 뜻을 함께해서 보낼 정도라면 정말로 힘에 부치는 것이겠지요."

그 말을 들은 좌의정 김종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한보다도 그 항로와 가깝고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나라들이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맞소. 그리고 그렇게 도움을 준 나라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한 번 도와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도와주고자 하겠지. 그렇게 한다면 도와준 나라가 항로는 물론이고 조와국과 섬라곡국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럼 한 가지 묻겠소. 조와국과 섬라곡국에 가깝고, 그들을 꾸준히 도와줄 국력이 있고, 천축으로 가는 항로에 관심을 보일 만한 나라가 있소. 어디일 것 같소?"

그 질문에 김종서의 눈이 휘둥글졌다.

"명나라겠군요."

"그렇소. 지금 명나라는 화북을 잃고 화남으로 쫓겨 내려간 데다가, 몇 년 전의 이변에 시달리기까지 했소. 하지만 화남은 원래부터 화북까지도 먹여 살릴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니 곧 국력을 회복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화북을 되찾고자 할 것이오. 물론 대한이 청나라를 돕고 있으니 쉽지 않을 것이고, 명나라도 이것을 알고 있으니 다른 방법을 찾겠지."

"조와국과 섬라곡국에 영향력을 키우려 들겠군요."

"영향력만이 아니오. 천축은 실로 크고 넓은 땅인지라 약재, 염료, 광물에서 가죽과 융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물건이 다 나오. 천축이 원산지인 목화로 만드는 면포의 빼어남은 말할 것도 없고,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솜씨마저도 뛰어나니, 명나라에서 천축에 팔아서 이익을 낼 만한 마땅한 물건이 없소. 그런데 딱 하나, 온 세상에서 탐을 내는 명나라의 물건이 있소. 바로 도자기지. 마침 경덕진이나 용천과 같은 유명한 도자기 산지도 다 화남에 있소."

양녕의 말에 호부상서 최만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명나라가 조와국과 섬라곡국을 도와 영향력을 키우고 항로를 확보한 다음, 그 항로로 직접 천축과 교역을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것이오. 저 먼 서쪽까지 함대를 보내서 기린을 잡아오기도 했던 명나라요. 천축까지 가는 건 어려울 것도 없지. 게다가 화북을 잃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소. 청나라는 회하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고, 청나라가 막고 있으니 원나라를 걱정할 필요가 없소. 화남의 식량을 화북으로 보낼 것 없이 화남에서 온전히 쓸 수 있으니, 어쩌면 이전보다 더 국력이 강해질 지도 모르오."

"그렇게 되면 명나라도 대륙에만 머무르지 않고 바다로 눈을 돌리겠지요. 그리고 조와국이나 섬라곡국과 대한을 잇는 뱃길은 무조건 명나라의 바다를 지나야 하니……."

양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력을 키우고 바다로 나온 명나라가 작정하고 대한을 견제하려 든다면 거리까지 먼 우리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소. 그러니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 두 나라를 돕고 영향력을 키워서 명나라가 끼어들 자리가 없게 해야 하는 것이지."

"명나라가 자리를 잡기 전에 먼저 대한이 포석을 두어 막는 셈이로군요."

최만리가 포석이라는 말을 쓰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소.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요."

그 말에 중신들이 다들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예부상서 민신이 말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이유가 세 가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명나라를 미리 막는다고 하더라도, 화북을 잃고 기근까지 겪었는데도 바로 세를 회복하고 다른 나라에 영향력을 미치려 할 수 있는 그 국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오. 대한이 직접 남쪽의 일에 나서는 김에, 명나라를 한 번 더 쪼개 버릴 생각이오."

* * *

1458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승록사.

조와국과 섬라곡국을 돕는 것이 단순히 안정적인 교역만이 아니라 명나라를 견제하는 중요한 일임을 알게 된 대한 조정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직접 나서기로 했다.

다만 두 나라에 영향력을 키우려 하거나 명나라를 견제하려 한다는 목적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어디까지나 조문에 감사하는 의미로 친서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형식을 취했다.

"등청해서 일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아마 너도 그렇겠지."

"예, 백부. 이렇게 백부와 함께 일하는 것은 더 오랜만이지요."

그런데 친서의 부탁, 즉 천축으로 가는 순례길 확보에 도움을 준다는 형식을 취하자니, 불교를 억압하지는 않아도 숭상하지도 않는 대한 조정의 관리들이 직접 나서는 것도 이상한 일이 되었다.

결국 불교 업무를 맡아서 하는 관청인 승록사와, 어찌 되건 관청이 아니라 상단인 척동상단이 주도적으로 맡아서 하게 되었다. 거기에 추가로, 이번 계획의 발안자인 양녕과 평소부터 불심이 깊었던 수양공 이유가 각각 도제조와 제조에 해당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간단히는 들었겠지만, 해야 할 일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어차피 친서는 청나라, 금나라, 대화국에 다 보냈다고 하니 우리가 따로 알려줄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는 각 나라에서 모인 사람과 물자를 척동상단을 통해서 조와국으로 보내주면 그만이지."

"그래도 백부께서는 연세가 있으시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그래야지. 그래도 이게 내 마지막 일일 것 같으니, 하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구나."

"예? 마지막 일이라니요?"

갑자기 이유가 깜짝 놀라서 묻자 양녕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다른 뜻으로 생각했구나. 그런 말이 아니야. 네가 말했듯이 나는 나이도 있고, 익성공(황희)이나 경헌공(장영실)도 모두 세상을 떴다. 내 건강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대한을 이끄는 일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때가 된 것이지. 그래서 이 일을 마지막으로 정말로 정무에서는 손을 떼려는 것일 뿐이야."

"그런 것이었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쉰 이유가 주제를 돌리려는 듯 물었다.

"백부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순례길을 되찾는 일에 시주하려는 마음으로 물자를 보내는 이들은 많겠지만, 직접 가고자 하는 이들도 많을까요?"

"많을 것 같구나. 특히 승려들 사이에서 소식이 빠르게 퍼지는 중이라는구나. 다른 것도 아니고 천축으로 가는 순례길이니 그럴 만도 하지. 물론 회교도들과 싸우고 살생을 저질러야 할 수도 있어서 꺼리는 이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불법을 지키기 위한 일인 데다가 전조 고려에서 여진족과 싸우는 데 승군을 편성했던 일도 있어서 생각보다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야."

이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또 질문을 던졌다.

"승려가 아닌 이들도 많이 갈까요?"

"청나라와 대화국에서 많이 갈 것 같다. 청나라는 애초에 사람이 많으니 가려는 사람이 많기도 하고, 화북에 원래 살던 중국인들의 비율을 줄이고자 청나라 조정에서 은근히 부추기고 떠미는 모양이야. 또 대화국에서는 가문마다 장남 아닌 아들들이 주로 가려고 한다. 장남으로서 제사를 이을 것도 아니고, 과거에 붙어서 관리가 될 자신도 없다면 차라리 다른 기회를 잡아보겠다는 생각이겠지."

"대한과는 생각하는 게 많이 다르군요. 흥미롭습니다."

"공맹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기도 하고, 장남 아닌 아들들이 권력 다툼을 피해서 출가하기도 했으니 그런 영향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이겠지. 사실 나는 네가 이리 관심을 보이는 게 더 흥미롭구나."

이유가 머쓱한 듯 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불교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번 일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하하하! 그럴 것 같았다. 내가 이 일을 맡았다고 하니까 효령도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더구나."

"역시 중부께서도 그러셨군요. 저, 백부. 하나만 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무나. 그것도 이번 일에 관련된 것이겠지?"

"예. 섬라곡국과 조와국 임금의 친서에는 순례길을 확보하고자 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는데, 백부께서 파악하시기로는 영토를 빼앗기고 항로가 막혀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순례길 운운은 도움을 청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일까요?"

이유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챈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명분으로 쓰려고 한 것도 없지는 않겠지만, 불자로서 절박해서 도움을 구한 것도 클 게다."

"그렇습니까?"

"그래. 회교도들은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을 닮은 것을 만드는 걸 계율로 엄격하게 막고 있어. 그래서 서예나 식물무늬가 발달했지. 당장 대한의 도자기에 자주 들어가는 당초문도 서역에서 건너온 것일 정도로 말이야. 그런데 그런 이들이 정복지의 사찰을 보면 어떻게 되겠느냐?"

"불보살상이나 탱화가 남아나지 않겠군요."

"그래. 물론 서역에서 먼 곳이니 회교도들도 그리 독실하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면 막 정복한 땅이니 민심을 생각해서 그리 탄압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신심이 깊은 회교도가 권력을 잡는다면 탄압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또 회교도는 회교도 아닌 이들에게 세금을 물려. 세금을 피해서 백성들이 하나둘 회교로 개종하게 된다면 권력자가 나서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불보살상이나 탱화를 파괴할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입니다."

"사실 실제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비록 불교가 천축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정작 천축에서는 세를 잃어가고 있어. 회교도들의 공세를 피해서 동쪽이나 남쪽으로 가고 있고, 승려들은 불경과 법구를 챙겨서 북쪽의 토번으로 피신하기도 한다는구나. 가까운 만큼 그런 소식을 더 자세하게 자주 접할 테니, 섬라곡국이나 조와국 임금도 불자로서 걱정이 되겠지."

"그렇군요."

두 나라의 도움 요청이 세속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불심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이유의 표정은 여전히 밝아지지 않았다. 그 표정을 가만히 보던 양녕이 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거나 고민이라도 있는 게냐?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라도 해보려무나.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지 않느냐."

"마음에 걸리던 것은 조금 전 백부께서 다 대답해 주셔서 해결되었습니다. 순례길을 되찾으러 가는 이들이 승려와 속인 모두 많고, 두 임금의 의도 역시 불심에서 나온 것이라서 마음을 놓았지요. 이제 남은 것은 하느냐 마느냐인데 이것이 고민입니다. 출가를 앞둔 석가세존께서 이런 마음이셨을까요."

"대체 무엇을 하려고 하기에 그러느냐?"

잠시 망설이던 이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순례길을 되찾는 데에 저도 직접 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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