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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7화 (28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7화

287화

1457년 12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아직 절차가 많이 남기는 하였으나 급하고 중요한 일들은 마쳤으니, 주상께서도 마음을 추스르시고 옥체를 돌보세요. 혹시라도 국사를 돌봄에 있어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돕겠습니다."

양녕이 말하고 있는 상대는 이도가 아니라 이향이었다.

당뇨와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던 원래 역사와 달리 꾸준한 승마로 건강을 유지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까지 비껴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10월 하순, 대한의 황제 이도는 사망했다. 비록 몇 개월이긴 하지만 환갑을 넘겼으니, 이 시대 기준으로는 매우 장수한 편이었다.

"예, 백부. 그래야지요. 다행히 아바마마께서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과 고명으로 남겨 주신 것이 있어서 그리 바쁘지는 않을 듯합니다."

이향의 말대로 이도는 붕어 전에 많은 것을 준비해 두었다. 미리 광주부 여흥군에 장지를 마련해 둔 것은 물론이고,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자녀들과 중신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각종 사항을 고명으로 남겼다. 대부분은 자신이 추진하던 일들을 앞으로 어떻게 이어가라는 것이었지만, 선황제의 유지라는 강한 권위를 부여해서 후세에 정착시키고자 하는 제도들도 있었다.

"주상 말씀처럼 참으로 많은 것을 고명으로 남기셨지요. 저는 그 가운데서도 피휘의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하라는 것이 실로 천하의 묘안이었다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피휘는 지금 황제를 기준으로 위로 7대까지만 적용하며, 휘가 두 글자면 한 글자만 따로 쓰는 것은 피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예법으로 정하고 엄격히 적용하라고 하신 덕분에 반대로 여유가 생겼지요."

"많은 왕조에서 관습적으로 피휘를 7대 위로도 전부 적용해 왔으니까요. 특히나 전조 고려는 자주 쓰이는 글자로 외자 이름을 많이 지은 탓에 무반은 호반이 되고 요임금은 고임금이 되어버릴 정도였지 않습니까. 정음이 전국에 퍼지며 백성들도 글을 쓸 일이 늘었고 앞으로도 늘어날 것인데, 조심해야 하는 글자는 앞으로도 스무 자를 넘지 않을 것이니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향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실로 성군이셨습니다. 저도 그 위업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선 저도 이름을 두 자로 바꿀까 합니다. 저와 문성공(안향)의 이름이 같으니, 이대로 가면 제 뒤로 8대가 지날 때까지는 문성공이 제대로 이름을 불리지 못할 것 아닙니까."

"주상께서 먼저 그리하신다면 새로운 예법이 자리 잡기도 좋겠지요. 생각해 두신 새 휘가 있으십니까?"

"아직입니다. 내년부터 쓸 새 연호가 필요해서, 의정성에서 올린 연호 후보들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그 뒤에 천천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러고 보니 당장 한 달 뒤면 해가 바뀌는군요. 연호는 정하셨습니까?"

"예. 후보 가운데 태시(太始)라는 연호가 마음에 들어서 그것으로 하고자 합니다. 비록 아바마마께서 대한의 황제로 즉위하시고 저도 태자가 되었었지만, 그 전에 이미 명나라에서 왕과 세자로서 책봉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즉위와 동궁의 태자 책봉은 다른 누구의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고 대한이 스스로 존엄함을 세운 일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큰 시작이라 해서 태시라는 연호를 고르신 것이로군요. 아마 의정성에서도 그런 뜻을 염두에 두고 후보로 올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아바마마께 올릴 묘호도 고조로 정했습니다."

고조는 개국군주에게 태조 다음으로 많이 붙는 묘호였다. 조선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대한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은 이도였으니, 고조라는 묘호가 붙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참, 백부께서 이렇게 오랜만에 궁에 오신 김에 도움을 청하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물론입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지금 아바마마의 유지를 이어서 사서와 법전을 편찬하기에 앞서서 우선 실록청을 두고 실록을 편찬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실록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실록에 들어가지 않는다니요?"

"아바마마 대에 이룬 업적이 한둘이 아닌 탓에, 그것들을 전부 실록 본편에 넣으려고 하면 아무리 축약해서 넣더라도 분량이 너무 늘어나 버립니다. 그래서 아예 그 업적들을 별도의 책으로 편찬해서 지리지나 예법서를 내고, 그 책을 실록에 별도로 첨부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누락되는 것도 없고 실록 본편도 간결해지니 좋겠군요. 그런데 거기서 제가 도울 게 있습니까?"

"많지요. 백부를 빼놓고서 아바마마 대에 이루어진 업적을 논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백부께서 직접 만드시거나 건의하신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이 이룬 것들도 백부께서 쓰신 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습니다. 백부께서 도와주신다면 그런 것들을 더욱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돌아보면서 더욱 개선할 토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향의 말에 양녕은 짧게 긍정했다.

"그렇겠지요."

"지리지는 특히나 더 그렇습니다. 칠주도, 거솔도, 심요도 같은 땅은 백부께서 얻어내고 다스리고 개척하셨고, 각지에 제철감, 방직감, 염전이 들어선 것 역시 백부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이 모든 지역에 직접 다니기까지 하셨으니, 백부께서 지리지 편찬을 도와주신다면 그 내용이 더욱 완벽해질 것입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너무 오래 된 일이라 기억이 흐린 부분도 있겠지만, 주상께서 이 늙은이의 도움을 청하신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군요."

이향은 흡족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조금 전부터 옆에 와서 기다리던 우승지를 슬쩍 보았다. 양녕이 미소 지으며 작게 끄덕이자 이향이 우승지에게 말했다.

"무언가 용무가 있으면 말하시오. 괜찮소."

"예, 폐하. 조금 전 섬라곡국과 조와국에서 조문하러 온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했습니다."

"벌써 말이오? 빠르기도 하군. 머무르는 곳은 이전처럼 마련하여주시오. 또 비록 이미 이일역월로 상을 마쳤다고는 하나, 조문하러 온 이들을 데리고 연회를 여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이오. 그러니 연회는 열지 않되 사신들이 가져온 예물에 대한 사례품을 조금 더 후하게 쳐서 주시오."

"예, 폐하.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이오?"

이향의 질문에 우승지가 가져온 종이를 몇 장 꺼냈다.

"섬라곡국과 조와국의 두 임금이 친서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원본이고, 이것은 사신들이 가져온 한문본입니다. 그리고 그 한문본에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우상(정인지)이 새로 번역한 것이 이것입니다."

"역시 우상은 대단하구려. 그나저나 그 먼 나라에서 조문하면서 친서까지 보내주다니, 실로 고마운 일이오."

그렇게 말하고 정인지의 번역본을 펼쳐 들고 읽어내려가던 이향이 갑자기 멈추었다. 한 부분을 유심히 보던 이향은 읽던 친서를 내려놓고 다음 친서를 펼쳐 읽더니, 역시 한 부분에서 멈춰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에 양녕이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조문하는 뜻으로 보낸 친서가 아닌 겁니까?"

"조문하는 친서는 맞습니다. 그런데 추가로 덧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두 나라의 친서에 모두 있는 것을 보면, 두 나라 임금이 뜻을 함께해서 보낸 모양입니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십니까?"

양녕의 물음에 이향이 대답했다.

"회교도들이 천축으로 가는 순례길을 막고 순례자와 승려들을 핍박해서 회교도들을 몰아내고 순례길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널리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중이니, 대한에서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주었으면 한다는군요."

* * *

1457년 12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에서는 이향과 중신들이 듣는 가운데, 이런 토론에 오랜만에 참여한 양녕이 간략한 지도를 펼쳐놓고 설명 중이었다.

"이렇게 섬라곡국 남쪽으로 길게 땅이 이어지고, 거기서 좁은 바다를 건너면 큰 섬이 나오고, 그 동쪽으로도 크고 작은 섬이 있습니다. 원래 조와국은 여기에 모두 걸친 큰 나라였지요. 그런데 길게 이어진 땅끝 영토와 거기서 바다를 건넌 섬 서쪽을 회교도들에게 빼앗겼으니, 당연히 두 땅 사이의 바다도 마음대로 쓸 수가 없게 되었지요."

양녕이 가리킨 두 땅 사이의 바다. 즉 원래 역사에서 말라카 해협이라 불렸던 해협을 보던 예부상서 민신이 말했다.

"사실 저도 친서를 보고서 두 나라 임금이 독실한 불자라서 덧붙인 내용인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지라 폐하께서 중신들을 소집하신 데다가 저하께서도 오신다는 말을 듣고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요. 그런데 지금 저하께서 설명하신 걸 들으니 알겠습니다. 단순한 순례길이 아니라 천하에 둘도 없을 중요한 항로로군요."

"그렇소. 그런 항로를 회교도들이 장악했으니, 불교를 숭상하는 두 나라 상인들이 오가기가 힘들어진 것이오."

우의정 정인지가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대한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고, 대한이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각종 약재나 후추 같은 것들도 천축까지 갈 것 없이 조와국이나 섬라곡국에서 나는 것인지라, 둘 사이의 항로가 막혔다 해서 대한에서 구하기 어려워질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이렇게 저하께서 직접 오신 것을 보면 무언가 대한에도 중요한 항로인 모양입니다."

"그렇소. 우상의 말대로 천축으로 가는 항로가 막히더라도 대한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은 충분히 구할 수 있고, 대한의 상인들이 그 항로를 오가던 것도 아니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항로가 대한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오."

양녕은 지도를 짚어가며 말을 이었다.

"아직 대한은 천축과 직접 교역을 하지 않소. 하지만 조와국이나 섬라곡국은 천축과 교역을 하고, 그 나라들은 다시 명나라나 안남국, 유구국과 교역을 하오. 그리고 대한 역시 그 나라들과 교역을 하지. 말하자면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들과, 그렇지는 않지만 불교가 깊게 자리 잡은 나라들이 서로 얽혀서 큰 집단을 이루고 서로 교역을 하는 것이오."

그 설명을 들은 호부상서 최만리가 말했다.

"두 나라가 천축과 교역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다면 돌고 돌아 대한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겠군요."

"바로 그것이오. 교역에 문제가 생기면 두 나라의 국력은 더 약해질 것이오. 그렇다면 회교도들에게 더 많은 영토를 빼앗길 것이고, 결국에는 멸망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새롭게 세워지는 나라는 당연히 회교를 숭상하는 나라일 것이오. 만일 그 나라에서 약재나 후추 같은 것들을 팔 때 서쪽에서 온 같은 회교도 상인들을 우대한다면 당연히 회교도 아닌 상인들이 살 때는 값이 더 오르거나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오. 그리고 거기서 멀리 떨어진 대한에서는 값이 더 오르고 더 구하기 어렵게 되겠지."

양녕의 설명을 집중해서 듣던 영의정 황보인이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큰일입니다. 비록 거리가 멀어 대한 조정이 직접 나서기는 어렵더라도, 친서에서 요청한 것처럼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주기는 해야겠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도움을 청했다고 하니, 온 세상 불자들이 조금씩 보탠다면 조와국이 항로를 되찾을 수 있겠지요."

"아니요. 이 사항은 대한 조정에서 직접 나설 것이오.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모은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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