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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6화 (28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6화

286화

1453년 9월 하순 모일.

대분부. 동부 교역소.

대한이 쿠루시마 해적들을 통해 남조와 밀무역을 가장한 교역을 하는 거점인 이곳 교역소 항구에서, 양녕은 쿠루시마 천호 홍윤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 왜황과 그를 따르는 기존 남조 가문들의 세력이 커지고 있군. 이번 이변이 도움이 되었어."

평야가 넓고 기후가 따뜻한 관동부라고 해도, 이변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아무런 피해도 없을 수는 없었다. 남조 각지에서 점점 식량이 부족해진다는 소식을 접한 대한이 홍윤성을 시켜 남방에서 들여오는 식량 이야기를 꺼내자 남조는 바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존의 남조 중심지인 카마쿠라 일대는 남조 영토 전체는 물론이고 관동 평야에서도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탓에, 가져온 식량을 전부 카마쿠라에 내리면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 관동 평야의 중심부에 가까우면서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수운도 활용하기 좋은 항구가 있었다.

바로 남조 왜황이 자리 잡은 스미다강 하구, 남조에서는 아시하라노미야코라고 부르고 대한에서는 동왜경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예. 저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내륙의 백성들도 조금씩 동왜경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 백성들이 원래 살던 곳의 호족들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동왜경에서 식량을 충분히 가져올 능력도 없는데, 차라리 직접 가서 식량을 가져오겠다는 백성들을 막았다가는 굶어 죽나 칼에 죽나 똑같다며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니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이지. 다 지금까지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과하게 뜯어내서 사치를 누리던 업보일세. 그렇게 온 백성들이 정착하게 하는 건 어떤가?"

"자연스럽게 정착하게 되는 흐름이라 그런지 순조롭습니다."

남조 조정, 정확히는 왜황을 중심으로 한 기존 남조 세력들은 식량을 찾아 모여든 백성들에게 식량값을 요구했고, 없으면 농경지 개간이나 항구 건설이라도 도우라고 했다. 당연히 대부분은 일을 돕는 수밖에 없었고, 남조 조정은 은근슬쩍 백성들을 자신이 개간한 농경지에 정착하게 했다. 이런 소문이 점점 퍼지며 남조 조정의 세력은 강해져갔다.

"다행이군. 혹시 일개 밀무역상이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식량을 구해 오는 것인지 의심하지는 않던가?"

"부두령이 말하기를, 고려 잔당이라고 오해하고 있어서 그런지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대신 궁금한지 슬쩍 물어보기에, 먼 남쪽은 날씨가 따뜻해서 한 해에 쌀 농사를 두 번도 지을 수 있어서 값이 싼 것이라 설명했더니 그러냐며 수긍했다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바깥세상을 잘 모르는 놈들이라 다행이군. 좋아, 지금의 이변이 잠잠해질 때쯤이면 남조 조정의 세력도 충분히 커져 있을 걸세. 그때 목화솜 밀무역으로 천천히 넘어가면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조를 도와주다가 자칫 너무 강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입니다. 지금도 서쪽으로 대화국의 영토를 빼앗지 않았습니까."

"그거라면 크게 걱정할 것 없을 걸세. 남조가 빼앗은 땅이라고 해 봤자 평지보다 산이 더 많은 곳이야. 국력에 여유가 있어서 영토를 빼앗았다기보다는, 혹시라도 기근을 틈타 대화국이 공격할지 몰라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큰 산맥을 국경으로 삼고자 애쓴 것이라고 봐도 될 걸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자네가 말해서 떠오른 것인데, 지금 남조가 영토를 서쪽으로 넓히면서 상대적으로 국경에서 멀어진 코우즈케 일대의 산지에서는 유황이 많이 난다네. 그 지역 호족들이 유황을 캐서 자네들에게 팔게끔 해보게."

그 지시에 홍윤성이 궁금한 듯 물었다.

"유황을 말입니까? 너무 내륙이라서 운반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운반할 것도 아니고, 농사가 어려운 지역이라 그거라도 캐서 팔려고 할 테니 알아서들 힘들게 운반해올 걸세. 그리고 내륙이라 더 좋은 걸세. 유황을 자네들에게 팔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항구가 동왜경뿐이니, 유황 교역이 더해지면 남조 조정의 세력도 더 빨리 커질 것 아닌가."

"유황이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그런 이유도 있었군요."

"그렇네. 이변이 끝난 다음에도 계속 유황을 사들여서, 장차 남조가 농경지에서는 목화를 키우고 산지에서는 유황을 캐서 파는 게 중심이 되게끔 할 걸세. 그러면 그것들을 내다 팔아야 나라가 굴러가니 더욱 자네들과의 교역에 의존하게 되겠지. 그 상황이 충분히 자리 잡으면 쿠루시마 천호소를 정식으로 대한의 영토로 흡수하고, 쿠루시마 해적들이 아니라 척동상단이 교역을 맡게 할 것이야. 지금까지 대한의 손에서 놀아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남조 조정은 반발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목숨줄이 잡힌 지 오래인데 자기들이 반발하면 어쩌겠는가? "

"듣기만 해도 기대됩니다."

남조 조정이 반발하면서도 꼼짝못하는 상황을 떠올렸는지 즐거운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홍윤성을 보고, 양녕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되려면 남조의 세력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하네. 남조 조정이 너무 강해지면 우리가 놈들을 통해 힘을 쓰기 어렵고, 반대로 너무 강해지면 통제가 어려워져. 이건 조정에서 분석하고 지시를 내려줄 것이니, 자네는 남조의 상황을 신속하게 보고하고 지시에 잘 따르기만 하면 될 걸세."

"예, 저하."

"그리고 훗날 자신들과 교역하던 게 밀무역상이 아니라 대한이라는 걸 알게 되면, 대한을 원수로 여기는 남조 조정으로서는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대한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들 수 있어. 그때를 대비한 패도 마련해 둘 걸세."

"무엇입니까?"

"남조 조정이 대한을 원수로 여기는 이유가 그들이 남조 왜황과 그 충신들의 후손들이라는 것 때문이니 대한과 딱히 은원이 없는 이들로 남조 조정을 이루게 된다면 해결되지 않겠는가?"

"왜황은 물론이고 남조 조정을 모조리 죽이고 새로운 놈들을 앉히면 되겠군요."

그 말에 양녕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하하하! 자네다운 해결책이지만 그건 어렵네. 대한이 간섭하게 되면 없던 반발심도 생길뿐더러 새로 권력을 잡은 이들의 권위도 약해지니, 남조 안에서 알아서 반정이 일어나게 해야지. 그러기에 제일 좋은 건 역성혁명의 사상이 퍼지게 하는 것이지만, 이미 북조가 무너지고 대화국이 세워지는 걸 보았으니 남조에서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지는 않을 걸세. 그러니 이번엔 불교를 쓸 것이야."

"불교에도 역성혁명 비슷한 것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야. 하지만 왜황이 즉위식을 올리고 나면 즉위관정이라고 해서 관정을 받는 전통이 있네. 왜황이 일본인들의 괴력난신으로는 태양신의 후손이지만 불교적으로는 일개 불자에 불과한 셈이지. 남조에서 불교의 세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왜황은 후자로 여겨질 것이고, 태양신의 옥좌보다는 일개 불자의 옥좌가 더 끌어내리기 좋지 않겠나."

"지금 연호도 태양신이 했다는 말에서 따서 지을 정도로 그들의 괴력난신은 정통성의 근간인데, 불교의 세가 강해져서 자신이 일개 불자로 여겨지는 걸 가만히 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지금 대화국의 왜황이 진품 신기 셋을 전부 갖추고 즉위식과 다이죠카이를 올린 탓에, 남조 왜황은 태양신의 후손으로서 정통성을 내세우는 데에 약간 위태로운 부분이 생겼네. 성스러운 땅인 이세 역시 대화국 영토가 되어버렸지 않은가. 그렇게 흔들린 권위를 불교에 의지해서 회복하려 하게끔 유도할 걸세."

양녕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홍윤성을 보며 말을 이었다.

"우선 동왜경 일대의 한미한 불교 세력에 접근해 친분을 쌓고, 돈을 대서 동왜경에 큰 사찰을 짓고 꾸준히 시주하게. 우리를 그냥 밀수꾼이 아니라 고려 잔당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리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것이야. 그렇게 하고 나면 척동상단을 통해서 남방의 불경을 구해다 줄 테니 천축에서 건너온 불경이라고 하면서 그 사찰에 시주하게."

"불경을 말입니까?"

"그래. 불경만이 아니라 남방의 불상과 가사, 각종 법구도 구해다 줄 테니 다 천축에서 온 거라고 하게. 어차피 특이하게 생겼다는 것만 알지 정말로 어디서 온 건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으니 믿을 걸세. 그렇게 해서 그 사찰의 권위를 드높이고 세력을 키우게. 그러면서 남조 조정에 접근해서 불교를 통해 권위를 회복하게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이지."

"그들이 왜황에게 관정을 주게 하시려는 거군요."

"바로 맞췄네. 천축의 불상을 모신 사찰에서 천축의 가사를 두른 승려에게 천축의 법구로 관정을 받는 것이니, 말이 일개 불자지 엄청난 권위가 서는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권위를 우리가 다시 이용해서 그 사찰이 남조의 불교계를 장악하게 만드는 것이지. 불교의 세가 강해지면 자신들의 권위가 따라서 높아지는 데다가, 그 주체가 자신들과 협력하는 사찰이니 남조 조정도 막지 않을 것이야. 그런데 이게 점점 반복된다면 즉위관정이 새 왜황에게 축복을 내리는 의식이 아니라, 불교계가 새 왜황의 즉위를 인정하는 의식이 되게끔 할 수 있지 않겠나?"

양녕의 의도를 이해한 홍윤성이 눈을 크게 떴다.

"왜황의 혈통은 물론이고 방계조차 아닌 이가 반정을 일으켜 즉위하더라도, 그 사찰에서 관정을 받으면 왜황으로 인정받는 게 되는군요?"

"그렇네. 물론 태양신의 혈통만이 왜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약해질지언정 아예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니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이도 나올 걸세. 하지만 즉위관정을 받는 시점에서 반정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즉위를 정당화할 명분만 주면 돼."

"즉위가 정당화되고 나면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이들도 없어지겠지요. 없어지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표현에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게 내가 노리는 것일세. 물론 반정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왜황을 태양신의 후손이 아니라 일개 불자에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놓고, 남조의 불교계 전체를 대한이 장악하다시피 해놓는다면 두고두고 이로움이 있을 걸세."

"물론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열심히 해주게. 그럼 이제 자네까지 만났으니, 이번에 돌아가면 그 뒤로는 한성부를 떠날 일이 거의 없겠군."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이번에야 온 세상에서 이변이 일어나는 통에 워낙 중요하고 급한 일이 많아서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나도 이제 곧 환갑이지 않은가. 나이가 나이다 보니 일을 많이 하는 건 물론이고 돌아다니는 것도 쉽지가 않아."

"연세가 있으신 건 이미 알았지만, 저하께 직접 그 말씀을 들으니 걱정이 됩니다."

홍윤성의 걱정 가득한 표정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었다. 양녕의 건강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기 때문이었다.

"안심하게나. 내가 온갖 일에 다 대책을 마련해 놓는 사람인 거 알지 않는가. 건강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건강이 나빠지기 전에 대비하려는 걸세. 너무 걱정할 것 없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양녕은 홍윤성의 안도하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자네가 대한의 통제를 벗어나서 내 계획을 망치지 못하게 할 대책도 이미 마련해 두었지. 자네는 절대 모르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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