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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5화 (28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5화

285화

조금 전보다도 더 당황한 승상이 물었다.

"황하를 맑게 하신단 말씀입니까? 황하는 백 년을 기다려도 맑아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주나라 때 이미 나왔으니, 백 년은 물론이고 2천 년이 지나도록 맑아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기다리기만 하면 당연히 맑아질 리가 없는 것 아니오. 그래서 내가 한번 해보려는 것이오. 황하가 솟을 때부터 진흙인 것도 아니지 않소."

승상도 에센의 의도는 알 수 있었다. 황하는 비옥함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다루기 어려운 강이었다. 법(法)이나 다스림(治)을 뜻하는 한자가 치수에서 유래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우임금은 황하의 치수에 성공한 공으로 순임금에게서 선양받았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이처럼 황하가 맑아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과 동시에 성인의 탄생과 태평성대의 징표로 여겨졌으니, 만일 에센이 정말로 황하를 맑게 만든다면 청나라는 그 어떤 중원 왕조보다도 강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하오나 폐하, 외람된 말임은 신도 알고 있으나 치수라는 것은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임금의 부친인 곤도 치수에 실패하여 관직을 잃었고, 이후의 제왕들도 저마다 황하를 치수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치수에 많은 공을 들였다가 잘 되지 않는다면 그 여파가 클 것입니다."

승상의 말에 에센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이리 직언을 해주다니, 내가 정말로 좋은 승상을 두었소. 걱정마시오. 대외적으로는 황하를 맑게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시작할 것이니. 조금 전 말한 것처럼 이변이 이어지는 와중에 홍수까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이유를 대고 진행하시오. 황하 강바닥을 준설하는 것도 고원에 살던 이들을 시키면 되겠군."

"불만의 목소리를 막으려 하시는군요."

"그렇소. 지금까지 황하가 넘쳐서 생겼던 모든 피해의 원인을 그들에게 돌린다면 어떤 과한 노역을 시키더라도 다른 백성들은 그들을 동정하기는커녕, 자업자득이라며 손가락질할 것이오. 그렇게 안심하고 미워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 준다면 이변이 이어져 불안한 민심의 화살도 거기로 향하겠지."

승상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무섭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말로 폐하께서 황하를 맑게 하는 데 성공하신다면 그 명을 받아 시행한 나 역시 후세까지 칭송받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원래 적전에서 도주하다 포로로 잡힌 몸이었지만, 폐하께서 내 능력을 눈여겨보신 덕에 오히려 청나라의 승상까지 출세했다. 청나라가 지금 이변을 잘 넘겨야 나도 권세를 더 누릴 수 있는데, 그깟 백성 놈들 십만 정도 고생하는 게 대수인가?'

승상은 결심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알겠나이다, 폐하. 신 승상 석형,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1453년 8월 중순 모일.

상경부. 금나라 궁궐.

양녕이 제시한 조건을 두고 도르호치와 이야기를 나누던 야르하치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 같소. 버일러께서도 말한 것이지만 이대로 조약이 결렬되고 식량이 부족해져서 금나라가 기근에 시달리게 되면, 그때는 대한이 군사들을 앞세워 더 많은 땅을 빼앗아 갈수도 있는 것 아니오. 차라리 지금 조건을 받아들이고 서신과 비석을 남기는 것이 낫지. 대신 조건을 그대로 수용할 테니 식량이나 교역소, 교역에서 조금 더 챙겨달라고 하시오. 아마 그 정도는 받아들여 줄 것이오."

"하지만 국경이 너무 상경부와 가까워지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건 나도 찝찝하지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소. 저들은 국경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읍에서 먼 곳으로 사람과 물자를 보내야 하지만, 우리는 도읍 근처이니 그런 문제가 없소. 게다가 저들이 국경에 병사를 모은다면 우리가 항의할 수 있지만, 상경부는 도읍이니 병사가 많이 있다고 한들 저들이 항의할 명분이 없지 않소?"

병사를 모은다는 말에 도르호치가 작게 말했다.

"지금은 영토를 내어주되, 다시 찾아올 훗날을 기약하시는 것이군요."

"그렇소.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혹시라도 되찾지 못할 때를 대비한 굴도 동서로 하나씩 파둘 것이오."

"역시 폐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치밀하시군요. 그런데 동서로 파신다니 어떤 뜻입니까?"

"우선 서쪽으로는 원나라와 교역을 재개할 것이오. 화약은 이제 팔기 위험한 물건이 되었으니, 모피를 팔아야겠지."

도르호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나라도 사냥에 능하니 모피를 구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겠습니까?"

"구할 수 있는 것과 많이 구할 수 있는 것은 다르오. 금나라에도 이변이 일어나고 대한에도 이변이 일어나고 원나라도 추위에 시달리는데, 청나라라고 추위가 비껴가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렇겠지요."

"그런데 숲에서 사냥하는 데 익숙한 오이라트들 대다수가 화북으로 이주했으니 원나라의 모피 생산은 줄었을 것인데, 또 화북에는 숲이 거의 없으니 이주해 온 오이라트들도 모피를 구하기 힘들지 않겠소?"

"이제 알겠습니다. 원나라를 거쳐서 청나라에 팔려 하시는 것이군요."

야르하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어차피 우리와 청나라는 국경이 닿아있지 않아 바로 교역하기 어렵소. 그렇다고 대한을 거치려고 하면 우리를 견제할 것이 분명하니, 우리를 견제할 여유가 없는 원나라를 통해야지."

"원나라에 여유가 없습니까?"

"명나라 시절에야 말 수량도 불리고 조공하러 온 사람 숫자도 불려서 명나라에서 이득을 뜯어낼 수 있었소. 하지만 지금은 조공이 아니라 교역일뿐더러, 청나라를 대상으로 그런 짓을 하다가는 화북으로 이주한 부족들의 기병과 상인들의 재력에 보복을 당할 것이오."

"이제 제값을 주고 교역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이윤을 내려면 교역량을 늘려서 흥정을 해야 하니 어찌 되건 교역품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청나라에서 필요로 하지만 원나라 내에서 구하기 힘들어진 모피를 금나라가 팔아주니, 그 사이에서 이윤을 얻으려면 금나라를 견제하기는커녕 힘을 합쳐야 할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소. 비록 모피가 써서 없어지는 물건은 아니나 헤지지 않는 것도아니고, 화북에는 부족들 말고도 백성들이 많으니 이 추위가 오래 간다면 계속해서 팔릴 것이오. 그런데 청나라에는 애초에 숲이 별로 없고, 원나라는 우리에게서 사가서 파느라 사냥으로 모피 얻는 법을 익히는 데에 소홀해질 것이니, 우리는 꾸준히 모피를 팔아서 필요한 것을 사 올 수 있소."

"대한이 간섭하지 못하는 곳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고,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이 있으니 대한이 금나라를 더 압박하려고 할 때 원나라에서 나서주는 것도 기대해볼 만하겠습니다. 그럼 동쪽으로는 어떤 방책을 마련하신 겁니까?"

그 질문에 야르하치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버일러께서는 대한이 쿠이섬에 직접 관여하려는 이유가 일본에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이라고 생각하시오?"

"다른 꿍꿍이도 있을 수 있겠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쿠이들이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게 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금나라의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만은 않게 만들 것이오."

"대한이 멀리 떨어진 쿠이섬에 그렇게 해서 얻는……. 아, 금나라의 군사력을 약하게 만들려는 것이겠습니다."

"그렇소. 석탄이나 철은 금나라 본토에도 충분하오. 지금처럼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는 게 독이 될 수 있으니 일본인들을 사 오는 것도 잠시 멈춰야 하지. 애초에 인구야 풍년이 이어지면 알아서 늘어나기 마련이기도 하고. 하지만 쿠이섬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면 유황과 구리를 들여오는 게 힘들어지오. 굳이 대한이 쿠이섬을 직접 장악할 필요도 없소. 쿠이들이 동질감을 가지고 뭉치게만 하면 그만이지."

야르하치의 말에 도르호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국경을 정하는 것만큼 확 체감되는 일이 아니라 느끼지 못했는데, 쿠이섬에 정착지를 만드는 것도 상당히 큰 조건이로군요."

"그렇소. 그렇다고 우리가 나서서 쿠이들을 분열시키려고 하다가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소. 명나라가 여진족을 분열시키려다가 오히려 하나로 뭉쳐 금나라를 세우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차피 쿠이들이 하나로 뭉쳐 세력을 이루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면, 대한보다 우리와 더 친하게 만들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하면서 최대한 유황과 구리를 들여와서 비축해 두고, 만약을 대비해서 주요한 항구는 쿠이들이 아닌 여진족의 고을로 확고하게 남겨 두어야 할 것이오."

"예, 페하. 길러미섬의 어투토로와 암바다룬에 더해서, 쿠이섬과 그 남쪽 바다 건너에도 여진족 항구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금나라 본토에서도 유황과 구리를 찾아야 하오. 설령 쿠이섬을 지켜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멀리 떨어진 섬에만 의존하다가는 만약의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 있소. 금나라 본토에서도 유황과 구리가 난다면, 지금처럼 대한이 쿠이섬을 통해서 우리 목숨줄을 잡으려 들 때 좀 더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지 않겠소. 비록 아직 광산은 찾지 못했지만…."

잠시 생각하던 야르하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철광산 중에 자연동도 같이 채굴되는 곳이 있지 않았소?"

"예. 자연동에서 구리를 뽑아 내려고 했지만 아무리 해도 되지가 않아서, 광산에서 일하다 뼈를 다치는 이들에게 먹이고자 일부만 약재로 가공해 두고 나머지는 한데 쌓아두고 있지요."

"다시 자연동을 가공해서 구리를 얻어내는 법을 연구해 보시오. 자연동도 이름대로 구리일 것이니, 방법이 어렵더라도 구리를 얻어낼 수는 있을 것이오. 어차피 석탄은 풍부해서 연료 걱정은 없으니 높은 온도로 굽거나 쪄 보는 것도 좋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때야 일본에서 구리를 싸게 들여올 수 있으니 금방 그만두었지만, 정말로 자연동으로 구리를 만들 수 있다면 큰 걱정 하나를 덜 수 있겠지요."

"그렇소. 유황과 달리 구리는 쓴다고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말이오."

그때 문득 도르호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폐하, 자연동으로 약재를 만들던 의원들에게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자연동은 가루내어 수비해 약재로 만들기 전에, 덩어리째로 불에 달구었다가 식초에 넣어 식히기를 반복해서 독을 빼냅니다. 그런데 그 의원이 말하기를 자연동을 달굴 때마다 유황 냄새가 나더랍니다. 처음에는 석탄에서 나는 냄새인가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석탄이 아니라 숯으로 할 때도 똑같이 유황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쿠이섬에서 막 유황이 대량으로 들어올 때라 그거 신기한 일이라고만 하고 넘겼는데, 어쩌면 자연동에서 유황을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호. 그거 흥미롭군. 좋소. 그럼 일단 버일러께서는 대한의 양녕공을 다시 만나 기존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대신 가능하다면 식량이나 교역소에서 조금 더 금나라에 좋은 조건을 추가해서 조약을 맺도록 하시오. 자연동에서 구리를 얻어내는 것은 그다음 금나라로 돌아와서 시작하면 될 것이오."

"예, 폐하."

"버일러 말대로 정말로 자연동에서 유황도 좀 얻어낼 수 있다면 좋겠소. 유황은 쓰면 없어지는 것이니 적은 양이라도 금나라 본토에서 생산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말이외다. 허허허."

야르하치는 자연동에서 구리를 얻어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자연동은 그 색이 황색인 탓에 동으로 여겨졌을 뿐, 실제 주성분은 황화철, 즉 유황과 철의 화합물이었다. 철보다 유황의 함량이 더 높은 자연동은 원래 역사에서는 후에 황철석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화승을 쓰지 않는 총기에 부싯돌로 쓰이기도 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하셨던 말씀입니다만, 모피를 꾸준히 파는 것은 좋지만 혹시라도 모피를 얻어낼 수 있는 짐승의 씨가 마르지는 않을까 걱정이 갑자기 듭니다."

"하하하! 버일러께서도 나이가 드니 별걱정을 다 하시는구려. 설마 짐승의 씨가 그리 쉽게 마르겠소? 정말로 금나라 안에서 씨가 마른다고 해도 북쪽과 서쪽으로 땅이 넓어 잡으러 갈 곳은 많으니, 버일러께서는 안심하시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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