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4화
284화
"하지만 이번에 명나라와 몽골의 상황을 수시로 알려 준 덕에 대한이 큰 이득을 보았는데 그럴 수야 없지. 애초에 여진족의 선조인 말갈족 역시 고구려와 발해의 백성이었으니, 그 영토 일부를 나누어 갖는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은 없기도 하고 말이오."
금나라의 도읍인 상경부를 함락시키겠다는 정도를 넘어서, 쉽게 함락시킬 수 있는데 도움을 받은 게 있어서 봐준다는 듯한 말이었다.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이지만 대한이 작정한다면 불가능한 소리도 아닐 것이다. 여기서 식량 요청이 무산되고 금나라가 기근에 시달리게 된다면 그때는 대한이 굳이 작정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될 것이고.'
작게 한숨을 쉰 도르호치가 입을 열었다.
"만일 이번에 금나라와 대한의 국경을 확정짓는다면 그 북쪽으로는 올라오지 않을 것이오?"
"물론이오. 서신으로 남기는 것은 당연하고, 비석을 세워서 남기기도 할 것이오. 만약 이 조건을 받아들여준다면 교역소도 놔주겠소."
"교역소?"
"조약이 성사되면 대한이 금나라에 제공할 식량이 엄청 많지 않소. 다행히 심요도에는 요하가 남북으로 길게 흐르고, 상경부는 송화강을 끼고 있으니 수운으로 옮길 수 있소. 하지만 두 강이 이어져 있지 않은 탓에, 요하를 타고 온 식량을 한 번 내려서 육로로 송화강까지 옮겨야 하오. 보통 일이 아니지. 그런데 내가 말한 대로 국경이 정해지면 요하 전체에 더해서 송화강의 지류인 일독하의 중류까지도 대한의 영토에 들어올 것이오.."
"일독하? 아, 여진말로 이퉁강이라 하는 거긴가 보군. 남에서 북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그 강을 말하는 거라면 맞소. 그렇게 되겠지."
양녕이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결국 요하와 송화강을 잇는 육로가 대한의 것이니 식량을 요하에서 일독하로 옮기는 것은 대한이 해주겠소. 다만 우리가 거기서 또 배에 싣고 상경부나 국경까지 운반해주기까지 하는 건 어렵소. 그러니 옛 부여성 서쪽, 산지에서 흘러온 일독하가 평야를 만나는 곳에 새로 고을을 만들고 부여성의 이름을 잇게 하고, 일독하에 큰 나루를 만들겠소."
"배를 타고 거기로 와서 식량을 가져가라는 것이겠군."
"맞소. 대한의 국경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기는 하겠지만, 식량을 운반할 배만 오가는 것이니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소. 어떻소?"
양녕의 말에 도르호치는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협상을 해서 국경을 옛 부여성 남쪽으로 결정하더라도, 그때는 땅을 일부 지킨 대신 우리가 직접 식량을 육로로 옮겨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는군. 식량 운반을 굳이 조건으로 거론한 것도 아마 그런 문제를 겪지 않으려면 옛 부여성까지 대한에 넘기라는 뜻이겠지. 이 위기상황에 2년 가까이 식량을 받는 것에 더해서, 언젠가는 대한에게 빼앗겼을 땅을 미리 내어주는 대신 더 북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못 박아둘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일지도 모르겠는데…….'
한참 고민하던 도르호치가 마침내 양녕에게 말했다.
"아무리 내가 권한을 하사받았다고 하지만, 단순한 교역이 아니라 국경을 정하는 중대한 일이니 나 혼자서 정할 수는 없을 것 같소. 한께 말씀드리고 그 명을 따르거나, 조약으로 국경을 정하는 권한까지도 하사받거나 한 다음 다시 와도 되겠소?"
"물론이오. 오히려 그렇게 확실히 해 주는 게 좋지.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우리라고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말이오."
"알겠소.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소."
미소 짓는 양녕의 입에서 마지막까지 협상의 여지 비슷한 말도 나오지 않자 도르호치가 쓴웃음을 지었다.
* * *
1453년 8월 중순 모일.
칸발리크. 궁성 봉천전.
승상의 보고를 듣던 청나라의 칸, 에센이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올해도 농사는 흉년인데, 추위를 피해서 초원에서 화북으로 이주해온 부족들은 더 늘어난 것이오?"
"예, 폐하."
"이거야 원. 식량이 모자라지는 않을지, 명나라가 공격해 오지는 않을지 걱정이로군."
"다행히 폐하께서 식량을 비축해 두라 하신 덕에 아직까지 기근 걱정은 없습니다. 거기에 대한에서 조금 더 사들이면 이주해 온 부족들을 먹이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명나라의 공격도 근심하실 것 없습니다."
"명나라에 무슨 일이라도 있소?"
"명나라에 가까운 남쪽에서 들어온 소식인데, 명나라도 폭설이 내리고 바다가 얼어붙는 등 온갖 이변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기후가 따뜻하고 농사도 잘되던 지역에 갑자기 그런 이변이 일어난 탓에 얼어죽거나 굶어 죽는 이가 부지기수고, 명나라 조정에서는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애쓰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입니다."
승상의 말에 에센이 피식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우리보다 기후도 좋고 인구도 많은 명나라가 지금쯤 공격해 왔을지도 모르는데, 이변이 일어나면서 시간을 번 셈이로군."
"예. 게다가 원래는 화북으로 올 생각이 없던 부족들까지 추위에서 살아남고자 이주해 오면서 인구가 늘고 있으니, 따져 보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셈입니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되오. 우선 이주해 온 부족들을 각지로 분산시켜 거주하게 하시오. 한 곳에 인구가 모여 있으면 식량도 빨리 떨어질 것이고 한데 뭉쳐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분산시키면 그런 걱정도 없고 화북에 몽골의 풍습이 더 빨리 자리잡게 할 수도 있을 것이오."
"예, 그리 시행하겠습니다."
에센의 말에 대답한 승상은 깃털 붓에 먹물을 찍더니, 조금 전 에센이 내린 지시를 종이 위에 정음으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에센이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풍습을 바꾸는 것은 잘 되어가고 있소?"
"아주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식량을 나누어 줄 때 변발하고 몽골옷을 입은 이들에게 가장 먼저 주니, 옷은 입어도 변발은 안 하려던 백성들마저도 하나둘 변발을 하고 있습니다."
"목숨이 달렸으니 그렇게라도 해야지. 백성들에게 정음을 퍼뜨리는 것은 어떻소?"
"까막눈을 면할 수 있고 과거를 보아 관리도 될 수 있다고 했을 때는 시큰둥하던 백성들도, 관리가 되면 식량을 못 받을 걱정은 없다는 말이 퍼지자 너나 할 것 없이 배우려 들고 있습니다. 곧 알아서 퍼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 말에 에센이 흡족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양녕공이 실로 좋은 것을 주었어."
사실 양녕이 처음으로 정음을 보여주고, 사람과 책을 보내 줄 테니 화북에 널리 퍼뜨리라는 말을 했을 때까지는 에센도 정음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글말인 한문과 입말인 백화는 그 형태가 많이 달라 잘 통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글자인 한자는 그 수가 많아서 백성들은 자주 쓰이는 글자나 자기 이름 정도만 아는 까막눈이 많지요. 또 몽골문은 글자끼리 이어지면서 모양이 변하는 것만 익숙해지면 배우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한문과 섞어서 쓰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음은 수가 적고 모양이 일정해 배우기 쉬우면서, 몽골말과 중국어를 섞어 쓰기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두 백성이 서로 섞이게 하기는 좋겠구려.'
하지만 양녕이 이어서 한 설명에는 에센도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씀이오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중국은 그 땅이 넓은 탓에 지역마다 말이 다릅니다. 화북은 그나마 사방으로 열린 평야라서 화북 내에서는 말이 잘 통하는 편이지만 화남은 산이 많은 탓에 말도 많아서 서로 잘 통하지 않지요. 다만 같은 한문을 쓰기에 같은 중국인이라는 생각으로 묶여 있을 수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정음을 가르치면 화북 백성들이 한문은 물론이고 한자도 배우지 않고도 자신들의 입말을 글로 옮길 수 있게 됩니다. 말도 글도 통하지 않고, 몽골과 삼한의 것이 섞여 풍습까지 달라진다면 그때도 화북과 화남이 같은 중국인이라는 생각을 갖겠습니까?'
'전혀 아니오. 게다가 몽골문과도 다른 글자이니, 이주해 온 부족들도 정음을 쓰다 보면 자신들이 몽골인이었다는 생각이 흐려지겠지. 이런, 내가 이런 대단한 글자를 못 알아보고 있었구려. 대한의 황제께서는 어떻게 이런 걸 만드신 것인지 아주 놀랍소. 내 아주 잘 쓰겠다고, 감사하다고 전해 주시오.'
그렇게 정음의 유용함을 깨달은 에센이 바로 시행한 것이 관에서 쓰이는 모든 문서를 한문과 한자가 아니라 백화와 정음으로 쓰게 하는 것이었다.
지명 또한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 예로 칸발리크가 있던 순천부는 성경부(盛京府)로 개명됨과 동시에 '칭깅부'가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기존의 토호들은 한자를 버리고 오랑캐의 글자를 쓸 수 없다며 버텼지만, 일반 백성들은 정음을 익혀 하나둘 관리가 되어 청나라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폐하, 다음 보고를 드리겠나이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에센은 승상의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말씀하시오."
"궁성 남쪽에 있던 태묘와 태사를 각각 궁성 동쪽과 서쪽으로 옮기라는 명을 일전에 내리셨는데, 지금 이변이 이어지는 통에 나라에 여유가 없으니 이를 재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태묘만을 헐었다가 새로 짓고 그대로 쓰는 것이 어떠하올는지요."
"여유가 없다면 나중으로 미루어도 좋으나, 때가 되면 시행은 할 것이오. 첫째로 그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이오. 본래 원나라는 예법에 따라 칸발리크의 동서에 태묘와 태사를 두었소. 그런데 예법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땡중의 후손이 그것을 궁 남쪽으로 옮기며 예법이 이지러졌으니 되돌리고자 하는 것이오. 둘째로 황성 밖에 태묘와 태사를 두고 제사를 지내러 행차하는 모습을 수시로 보여 내가 청나라의 황제임을 백성들에게 보이려는 것이오."
"우둔한 신이 폐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명하신 대로 잠시 미루어 두었다가, 여유가 되는 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보고는 이상이옵니다."
"지금 바로 하나 명할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귀기울여 듣는 승상에게 에센이 말했다.
"황하를 거슬러 가다보면 서쪽으로 쭉 가다가 북쪽으로 꺾어지고, 곧 고원이 나오지 않소?"
"그렇사옵니다."
"그곳의 모든 고을을 비우시오. 군대를 보내 전부 끌어내고 앞으로 들어가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며, 그 고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역모나 관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이라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오."
"폐하, 그것이 대체 무슨……."
기이한 명령에 당황한 승상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에센은 태연한 얼굴로 양녕에게서 들은 것을 떠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말라붙은 사막을 지나면서도 멀쩡하던 황하가 그 고원만 지나면 진흙이 되어 흐르고, 그 진흙 때문에 황하 강바닥이 점점 높아져 홍수가 나 농경지와 마을을 덮치는 것이오. 이게 다 그 고원에서 사는 이들이 황하 주변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고 농사를 지은 탓에 흙이 강물에 쓸려가서 생기는 일이지. 제 욕심을 채우고자 황하 중하류에 사는 수많은 다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놈들이니 끌어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특히나 지금처럼 농작물 하나하나가 귀할 때라면 더더욱 말이오."
"하오나 폐하, 그들을 모두 끌어낸다고 바로 홍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오. 하지만 나는 당장의 홍수만을 생각하고 명한 것이 아니오. 고원에 다시 나무가 무성하게 해 흙이 쓸려가지 않게 하고, 진흙이 줄어든 황하 강바닥을 꾸준히 준설해서 낮출 것이오. 그리해서 내가 황하를 맑게 만들 것이외다. 청나라는 수에 속하는 나라이고, 치수는 제왕의 중요한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