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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3화 (28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3화

283화

1453년 7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승화당.

동궁, 즉 태자궁의 전각인 승화당은 본래 태자의 경연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이도가 이향에게 일부 정사의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이향이 정무를 보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었다.

대리청정이라는 것은 사실상 태자에게 양위하기 전 단계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탓에, 군주가 대리청정을 명하더라도 당사자인 태자를 비롯한 온 문무백관이 나서서 만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나 지금의 대한은 원래 역사와 달리 이향은 물론이고 이도까지도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으니, 원래대로라면 대리청정은 얘기조차 나오지 않았어야 했다.

"그럼 경원부와 거솔도는 날씨가 덥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 여름에 눈이 올 정도로 춥단 말이오?"

"예, 전하. 다행히 동북의 백성들은 항상 흉년을 대비해 꾸준히 식량을 비축하는 양풍이 있어서 당장 기근이 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부터 진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부상서 최만리의 말에 이향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양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태평양 해저 화산 분화의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흐린 하늘과 추운 날씨가 이어졌고, 비도 제대로 내리지 않았다.

그런 기상이변이 경원부와 거솔도만이 아니라 대한 전역에서 일어나서 이도 혼자만으로는 도저히 상황을 다 돌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때문에 이도가 이향에게 일부 정사를 대리청정시키겠다고 했을 때도 신하들은 형식적으로 한 번만 반대하고는 바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백부께서 정말 정확하게 내다보셨소. 남방에서 들여온 양곡이 없었다면 지금 진휼할 식량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겠지. 참, 대한 말고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고 들었소. 대한과 교역하던 나라가 크게 흔들리는 일이 생기면 대한의 이익은 둘째 치고 세상의 균형 자체가 위험할 것인데, 그 부분은 괜찮소?"

"안 그래도 대화국에서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대한도 진휼이 시급해서 힘들고, 곧 남방에서 양곡을 추가로 들여올 것이니 그때부터 싸게 팔아 주겠다고 했는데, 상황이 절박하다며 간곡히 부탁하기에 폐하께서 우선 지금 있는 양곡의 일부를 무상으로 전변항을 통해 보내 주셨습니다."

대화국은 일본 최초로 선양으로 세워진 나라인 만큼 이런 재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정통성이 확고해질 수도, 그대로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거기다 대한에 친화적이면서도 대한이 원하는 이상적인 균형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나라이기까지 하니,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화국에 문제가 생기면 대한에도 영향이 올 수 밖에 없으니 미리 도와주는 것이 맞지. 그런데 얼마나 절박하게 부탁했기에 아바마마께서 지금 당장 쓸 양곡 일부를 보내 주셨단 말이오?"

"왜황의 징표로 대대로 전해 내려온, 왜황조차도 함부로 볼 수 없는 세 신기가 있는데 대화국왕이 몇 년 전에 관례를 깨고 상자에서 꺼내서 실물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때 신기들을 보고 정밀하게 그린 그림과 문양을 떠낸 탁본을 바쳐 왔습니다."

그 말에 이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징표라면 옥새나 다름없는 물건일 텐데, 아무리 그림과 탁본이라지만 그것을 대한에 바쳤단 말이오?"

"예. 말하기로는 전조의 사서를 편찬하면서 자료로 쓰고자 실물을 꺼내 보았고, 아무래도 삼한에 그 연원을 둔 물건으로 보여서 대한에 확인을 요청하고자 보내는 것이라고 하긴 했습니다."

"실물이 아니라 그림과 탁본이니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지. 하지만 몇 년 전에 꺼내서 확인하고 만든 것들을 굳이 지금 도움을 요청하면서 보냈다는 것은, 삼한과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운 것이 정말인가 보오. 아바마마께서 바로 도와주실 만했군."

"폐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다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양곡을 살 대금이 혹시라도 부족하다면 대화국에 전해지는 각종 보물을 대금 대신 받아줄 수 있냐는 뜻도 내비쳤습니다."

"정말로 큰일인가 보오. 직접적으로 대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화국이 이 정도라면 남조는 대체 어떻단 말이오?"

이향의 걱정 섞인 질문에 최만리가 대답했다.

"관동부 쪽은 생각 외로 큰 문제가 없는 모양입니다. 양녕공께서 말씀하시기를 관동부는 평야가 넓고 바다에서 따뜻하게 습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는 곳이라 그리 기근이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 하시더군요. 다만 야마토와 키이 일대는 관동부에서 먼 데다가 산지라서 식량 부족을 겪는 것 같아서, 무라카미 해적들을 통해서 양곡을 조금 보내주었습니다. 물론 무라카미 해적들에게는 밀수해온 것이라고 하면서 팔라고 했지요."

"대화국과 남조의 균형이 이지러지면 어쩌나 했는데, 백부께서 이미 파악하고 계시다니 다행이오. 하긴 그러니 이번에도 금나라와의 일을 직접 맡으신 것이겠지."

약간 안도한 표정이 된 이향이 이어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또 위기를 기회로 만드실지도 모르겠군."

* * *

1453년 7월 하순 모일.

심요도. 심양성 객사.

양녕은 탁자 너머에 마주 앉은, 금나라의 사절로 온 도르호치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진족이 삼한에 식량을 요청하는 건 엄청나게 오랜만인 듯하오."

그 말에 도르호치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나 말이오. 우리도 식량을 많이 비축해 두긴 했지만, 갑자기 기후가 이상해지니 어쩔 도리가 없더이다. 옛날에 부족마다 나뉘어서 살 때는 부족원 대부분이 식량 생산에 투입되었고, 여차하면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라도 식량을 얻어내면 그만이었소. 하지만 지금은 철기 만드는 장인이나 쿠이섬을 오가는 선원더러 하던 일을 멈추고 농사 지으라고 떠밀 수도 없고, 나라 안에서 식량을 두고 싸우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지 않소."

"대신 이렇게 외국과 식량을 교역해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수는 있게 되었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대한이 금나라에 식량을 팔면, 그 대금은 무엇으로 낼 것이오?"

"모피는 어떻겠소? 대한도 날씨가 이상해졌다고 들었는데, 이번 겨울이 얼마나 추울지 모르니 모피를 사두어서 나쁠 일은 없을 것이오."

"모피는 이미 면포를 팔면서 그 대금으로 받아왔고, 쿠이섬 교역소에서 쿠이들에게 사 오기도 해서 많이 있소. 게다가 대한에는 따뜻한 지역도 많아서 온 백성이 모피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오."

양녕의 거절에 도르호치는 다음 패를 꺼냈다.

"그럼 금은 어떻소? 사할리얀, 그러니까 흑룡강 일대에서 금이 제법 나오."

"금이라면 괜찮지. 하지만 날씨가 이런 데다가 식량까지 부족할 정도인데, 식량 대금으로 치를 만큼의 금을 캘 여유가 되겠소?"

"그건…… 흠, 아무래도 이미 원하는 물건이 있는 모양이구려."

양녕이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정확하게는 물건으로 교역하는 게 아니라 두 가지 조건으로 조약을 맺고자 하오. 금나라가 그 두 조건을 들어 주면 대한에서는 2년 뒤, 그러니까 대한의 연호로 경덕 6년 3월까지 식량을 꾸준히 제공해 주겠소. 어떻소?"

만 2년 가까이 식량을 제공해 줄 정도라면 그 조건이 절대로 가볍지는 않을 것이었기에, 도르호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일단 들어보겠소. 무엇이오?"

"2년 전, 대한이 금나라에 면포를 팔아 주는 조건으로 쿠이섬에 설치한 교역소가 있지 않소? 그 규모를 확장하고 대한 백성들을 보내 정착지로 만들게 해 주는 것이 첫째 조건이오. 쿠이섬을 탐내서가 아니라 오히려 유지하는 것을 도와주려 하는 것이니 그 부분은 안심하시오."

"유지하는 것을 도와주다니?"

"지금 금나라 본토도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 아니오. 이런 상황에서 쿠이섬 유지를 잘 할 수 있소? 설마 온 세상의 날씨가 이런데 쿠이섬만 풍년이지는 않을 것 아니오."

"그건 맞소. 쿠이들이 겨울을 나는 데에 익숙하기도 하고, 석탄을 때서 난방하는 법을 배운 덕에 그나마 무사히 겨울을 넘겼다고 해야 할 정도니까."

"그리고 아마 버일러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대화국. 그러니까 일본 본토의 서쪽을 지배 중인 나라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소. 남조 세력이 그 틈을 타서 세를 키웠지."

"남조 세력이라면 쿠이섬 건너 일본 본토에서 우리와 국경을 마주한 이들 아니오."

"그렇소. 일본 본토의 중앙에는 남북으로 바다까지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 있어서 동과 서를 나누는데, 서쪽으로 대화국의 땅을 빼앗아서 그 산맥까지 이르렀소. 쉽게 넘을 수 없는 산맥을 기준으로 국경이 확정 지어진 셈이지. 남조 세력은 이번 이변에 상대적으로 별 피해를 보지 않아서 아직 국력이 남았을 것인데, 이제 서쪽으로 산맥을 넘어 확장하기 어려워졌으니 다음은 어디로 눈을 돌리겠소?"

"우리에게 땅을 빼앗겼던 북쪽이겠군."

양녕이 작게 끄덕이고 말했다.

"대한이 금나라의 쿠이섬 지배를 인정해 주었던 조건을 기억하실 것이오. 금나라의 전술이나 말 품종, 제조법을 비롯한 화약 기술이 남조 세력에 넘어가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지.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잘 안 될 것 같으니 대한이 나서려는 것이오. 애초에 기술이 넘어가거나 땅을 도로 빼앗겼을 때 가장 곤란한 것은 금나라 아니오."

"그건 맞소."

"게다가 금나라가 대한에서 사 간 식량을 쿠이섬까지 또 운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우리가 식량을 직접 가져가서 교역하는 게 피차간에 속 편한 일이지. 쿠이섬에서 대한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정 걱정된다면 정착지의 규모나 백성들의 숫자는 교역에 무리가 없는 선에서 타협해서 줄일 수도 있소."

한참 생각하던 도르호치가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조건이 두 개라고 하지 않았소? 일단 다음 조건도 마저 듣고 대답해 드리겠소."

"좋소. 다음 조건은 대한과 금나라의 국경을 확정 짓는 것이오."

말은 확정이라고 했지만, 만 2년 가까이 식량을 제공해 주는 조건이 지금의 모호한 국경을 확실히 하는 것으로 끝일 리는 없었다. 실질적으로는 땅을 내어 주는 형태가 될 것임이 분명했지만, 도르호치는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어떤 국경을 원하시오?"

"우선 동쪽으로는 미타호 북쪽 평야를 동서로 지나는 산맥을 기준으로 삼고자 하오. 산맥이 중간에 잠깐 끊어져서 남북으로 평야가 이어지는 좁은 길목은 관문을 짓고 두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면 될 것이오."

"서쪽으로는?"

"조금 전 말한 산맥을 서쪽으로 쭉 따라오다 보면 옛 고구려의 부여성이 있던 곳이 나오오. 그 서북쪽에 명나라가 두었던 역참인 용안참이 있는데, 바로 그 용안참을 경계로 삼고자 하오."

부여성과 용안참이라는 말에 도르호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지금까지 심요도 가장 북쪽의 고을은 철령성이었다. 그런데 용안참을 경계로 삼게 되면 단숨에 철령성에서 북쪽으로 600여 리에 이르는 땅이 전부 대한에 넘어가는 셈이었다.

'게다가 대한 국경에서 도읍인 상경부까지의 거리도, 금나라 건국 직후 도읍이었던 심양성과 당시의 조선 국경의 거리 정도로 가까워져 버린다. 아무리 어느 정도 땅을 내어줄 각오를 하고 듣기는 했지만, 그때 조선에 심양성이 함락당하고 북쪽으로 밀려나던 기억이 선명한데 이 조건은…….'

머뭇거리던 도르호치는, 뒤이어 날아온 양녕의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원래 대한의 목표는 고구려와 발해의 옛 국경을 모두 되찾는 것이었소. 그러면 상경부도 대한의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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