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2화 (28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2화

282화

1451년 4월 중순 모일.

위해부. 위해목 항구 인근 건물.

대한은 청나라에게서 넘겨받은 산동성의 네 고을을 바로 대한식 군현으로 개편했다. 내륙의 문등을 제외하면 위해, 성산, 정해 모두 항구에 자리 잡은 고을이었지만 양녕의 건의대로 위해가 중심 고을인 목이 되었고 다른 세 고을은 군이 되었다.

"직접 와서 보니 실로 천하의 요항입니다. 저하께서 왜 여기를 중심 고을로 삼자 하셨는지 알겠습니다."

"하하하! 알아주어서 고맙네. 화북 전체에 대한의 영향을 퍼뜨리는 기반이 될 곳이니, 규모, 입지, 지형 모두 이 정도는 되어 줘야지."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과 물자가 대한 본토와 위해부를 오가야 했기에 척동상단에게도 어느 정도 권한을 주어 위해부의 일을 돕게 하기로 했다. 거기에 대비해서 척동상단의 대방 한명회는 대한에서 각종 물자를 싣고 온 첫 선단에 같이 타고 와 위해목을 둘러보았고, 지금은 양녕을 만나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저하, 이번에 요청하신 물자 대부분은 팔아서 이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한의 풍습이 화북에 퍼지게 해서 화남과 화북을 다르게 만들기 위한 물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맞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제가 위해목을 둘러보니 이곳 주민들이 입고 다니는 옷에 삼한과 닮은 것이 많았습니다. 이건 심요도도 마찬가지였지만 심요도에는 원래 삼한 혈통 백성도 많았고 대한과 가까운 곳이니 그러려니 했지요. 그런데 이제 막 대한이 발을 들인 이곳의 옷이 대한과 이미 비슷하다면 중국과 삼한의 풍습이 원래 비슷했던 것은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삼한의 풍습을 퍼뜨리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삼한과 옷이 비슷한 것은 자네가 정확하게 보았네. 하지만 그 이유는 달라. 원래 비슷한 것이 아니라, 삼한의 옷이 중국, 정확하게는 화북 일대에 퍼진 것이네."

양녕의 말에 한명회가 흥미를 보였다.

"삼한의 문물이 이미 중국에도 퍼졌었단 말씀입니까?"

"그렇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이래로 원나라에 건너간 삼한인들이 많았네. 그들의 옷이나 음식 같은 풍습들이 원나라 황실을 비롯한 고위층을 중심으로 유행했고, 그게 점점 퍼져가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지."

"그래서 원나라 시절부터 도읍이던 칸발리크를 중심으로 화북 일대에 퍼진 것이겠군요."

"맞아. 그렇기에 삼한의 풍습을 퍼뜨리려는 걸세. 이미 고위층이 받아들여 고급스러운 것으로 여겨진 지 오래이니 장차 백성들에게까지 퍼뜨리기도 좋고, 화남과 구별되는 화북의 특색이니 두 지역을 다르게 만들기도 좋지. 게다가 삼한과 몽골의 풍습은 비슷한 구석이 많지 않은가. 삼한의 풍습이 깊이 스며들면 몽골의 풍습과도 잘 섞이게 될 걸세."

"옷만이 아니라 옷본에 신발까지 많이 있던 이유가 그것이로군요. 백성들도 삼한 의복을 만들어서 입게 만들고, 신발까지도 삼한의 것으로 물들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신발은 청나라 황제가 직접 요청한 것이기도 하네."

"직접 말입니까?"

한명회의 질문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황제는 물론이고 초원 부족들 대다수가 전족이라는 것을 화북에 와서 처음 보고 그 모습에 기겁했다더군. 어린아이의 발을 비틀리게 만드는 잔혹함도 잔혹함이지만, 말 위에서 일생을 보내다시피 하는 그들에게 발을 못 쓰게 만드는 전족은 정말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짓이니 말이야."

"중국의 온갖 풍습이 여러 나라로 퍼졌지만 전족만은 퍼지지 않은 이유가 있지요. 아, 그래서 삼한 신발이 많았군요. 삼한 신발을 신으려면 전족을 할 수가 없고, 전족은 중국의 고유한 풍습이니 전족이 사라지게 하면 화북이 중국이 아니게 하기도 쉬워질 것이니 말입니다."

"정확히 보았네. 그런데 청나라 황제가 사내는 무조건 변발을 하게 하고, 여인은 전족을 금하고 삼한 신발을 신게 하는 칙명을 내리고자 한다기에 내가 말렸지."

"예? 말리셨다니요? 어째서입니까? 아니, 그보다도 말리셨다면 저 신발들은 다 무엇입니까?"

한명회가 당황하자 양녕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같은 중국인도 아니고 자신들을 정복한 몽골인 지배자가 강요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인 풍습이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고, 나아가서는 절대로 내려놓지 않는 저항의 상징이 되어버릴 수 있네. 수많은 이들을 죽이면 겨우 강요할 수야 있겠지만, 저항의 상징으로는 더 굳건해질 것 아닌가."

"하긴, 중국의 황제가 막북을 점령하고 변발을 금지했다고 반대로 생각해 보니 바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도 신발을 많이 요청하신 것을 보니,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래. 비천하고 뒤처진 것으로 여기게 만들어 화북인들이 스스로 버리게 하라고 했지. 우선 전족인데, 창부는 무조건 전족을 하고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하고, 전족을 안 했다면 발이 작아 보이는 신발이라도 신어야 한다는 칙명을 내리라고 했네."

한명회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 그러면 금지하지 않으면서도 전족을 꺼리게 만들 수 있겠군요?"

"이미 한 전족을 없앨 수는 없지만 칙명을 내린 이후로 전족을 한 여인이 있는 집안의 사내는 과거를 볼 수 없게도 하라고 했지. 비슷하게 변발도 천민은 할 수 없고, 과거를 보려면 무조건 변발을 해야 한다는 칙명도 내리라 했네. 마침 지금 이주해온 부족들만으로는 나라를 이끌기 어려워 벼슬아치를 많이 뽑아야 하는 상황이니, 지금을 기회로 여기고 전족을 멈추고 변발을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야."

"학식이 빼어나고 변발을 하지 않은 사내와 공부는 좀 부족해도 변발을 한 사내가 있다면, 전자는 아예 과거를 볼 수 없으니 후자가 벼슬아치가 될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거기다 더해서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조언도 해 주었네.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는 자가 있는 집안에 전족을 새로 한 여인이 있는지 확인할 때 가세도 확인해 보라고 했지. 그래서 되도록 못사는 집 출신을 뽑으라는 것이지. 이러면 점차 변발과 삼한 신발은 출세의 상징이 되고, 중국식 머리 모양과 전족은 천민과 창부의 상징이 될걸세."

"정말 묘수입니다. 화북과 화남이 딴판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군요."

그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계획대로 잘 풀렸을 때의 일일세. 아직 여기 위해부에 삼한 백성들이 얼마나 이주해 올지도 알 수 없으니 또 모르는 일이지."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소식이 퍼지자마자 이주해오기를 원하는 백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벌써 말인가?"

"예. 칠주도는 이미 대한의 땅으로 자리를 잡았고, 심요도와 거솔도는 춥고 황량하며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위해부는 이제 막 대한의 땅이 되어 개발이 시작되는 곳이니 기회가 많고, 크게 걱정할 요소들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다른 의도로 오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위해부 동남쪽이지요."

한명회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챈 양녕이 미소 지었다.

"청해진 대사가 우리를 또 돕는군."

"맞습니다.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던 적산이지요. 이미 대한인들 사이에서는 배를 타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니더라도, 재물의 풍요나 집안의 평온을 기원하며 장보고를 모시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적산은 완도에 버금가는 성지이니, 적산이 대한의 땅이 된 것을 기뻐하며 법화원을 다시 세우고자 할 만도 하지요. 심지어는 대화국에서도 장보고를 섬기는 이들이 돈을 보태려 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주 좋군. 그렇게 많은 이들이 와서 자리를 잡으면 정음을 퍼뜨리기도 좋겠어."

"정음도 퍼뜨리십니까?"

"아, 대한 조정에서 칸발리크로 바로 갔으니 자네는 모르겠군. 그래. 정음을 가르칠 이들이 책을 가지고 청나라 조정으로 갔네. 내가 먼저 청나라 황제에게 권유한 일이지."

"이미 뜻을 적는 글자로는 한자가, 소리를 적는 글자로는 몽골문이 있지 않습니까?"

"글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글자를 없애려고 퍼뜨리려는 걸세. 그렇게 해서 말과 말은 합치고 천하와 천하는 갈라놓을 것이야."

선문답 같은 그 말에 한명회가 어리둥절해하자 양녕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떠나기 전까지는 답을 못 듣겠군. 여유가 될 때 잘 생각해보다가, 답이 나오면 다음번에 만났을 때 들려주게."

"다시 칸발리크로 가십니까?"

"아니. 심요도로 가네. 주상께서 내가 맡기를 바라시는 일이 있어서 갔다 올 걸세."

"저하께 직접 맡기시다니. 어떤 일입니까?"

"지금까지 북원 세력이 금나라와 교역했던 것은, 오이라트가 명나라와의 교역을 독점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세력을 키우려던 결과였네. 금나라가 사들이던 명나라 면포도 명나라에서 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이라트가 사 온 것을 북원 세력이 또 사서 금나라에 팔았던 것이고 말이야."

"오이라트가 화북에 청나라를 세우고, 북원 세력이 다시 몽골을 지배하고 원나라의 부활을 선포하면서 그러던 것도 바뀌었겠군요."

양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세력이 서로를 칸으로 인정하고 화북과 몽골의 두 천하를 나누어 가졌네. 화북의 면포를 원나라가 사가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지. 반대로 금나라는 몽골의 분열이 끝나버렸으니 이제 원나라에 화약을 팔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 화약 말고는 마땅히 팔 게 없으니 면포를 사 오기 어려워졌고, 화약을 팔지 않는다는 것은 곧 비축한다는 소리이니 원나라도 금나라를 경계하게 되었지."

"면포를 구하기가 더 어려워졌겠군요. 결국 돌고 돌아서 어떻게 금나라를 견제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긴 했습니다. 그럼 그것 때문에 가시는 것이로군요."

"그렇네. 외교와 관련된 일이라 먼저 새어나가서는 안 되지만……. 자네하고는 상관이 있으니 미리 말해두는 게 좋겠군. 대한이 쿠이섬에 교역소를 설치하고 쿠이들과 모피 교역을 하는 대가로 금나라에 면포를 팔아주겠다고 할 걸세. 정말로 이게 성사된다면 쿠이섬 교역소는 척동상단이 맡게 될 것이야. 자네만 알아두고 있게."

양녕의 말에 한명회는 의문 가득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대한이 면포를 팔아주면 금나라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 대가로 받으시려는 게 조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모피는 금나라 본토에서 바로 사 와도 되는데 굳이 교역소까지 두어가며 쿠이섬에서 사 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당장 교역하려는 것이 모피일 뿐이야. 지금은 그 정도로만 알아두면 될 걸세."

"저하께서 계획하시는 게 또 있는 모양이군요."

"뭐 그렇네. 때가 되면 자네도 알게 될 걸세. 그보다도 자네가 지금부터 시작해 두어야 할 게 따로 있네."

"무엇입니까?"

"척동상단이 관리하는 항구들을 잘 정비해 두고, 배를 많이 건조해 두게."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이제 황해를 오갈 일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청나라와 교역하게 되면 각지를 오가는 물자도 늘어날 것 같아서 그리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 말하는 한명회를 보며 양녕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엷게 지었다.

* * *

1452년 4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4월 중순에 집들이 흔들릴 정도로 큰 지진이 있었다.

황제인 이도가 직접 점을 쳐 보니, 땅이 4월에 소리를 내며 움직이면 오곡이 익지 않고 백성들에게 큰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양녕은 점괘를 믿지는 않더라도 대비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며 섬라곡국과 안남국 등지에서 양곡을 사 와 비축하자고 건의했고 이는 바로 받아들여졌다.

모든 일이 양녕이 계획하고 대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