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1화 (28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1화

281화

1451년 2월 초순 모일.

경사. 궁성 봉천전.

"다시 한번 즉위를 경하드립니다, 폐하."

"고맙소. 이리 와서 앉으시오."

양녕의 인사를 받은 에센은 자신의 오른편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원래 역사에서는 후에 태화전으로 이름이 바뀌는 봉천전은 궁성의 정전인 만큼 그 규모도 거대하고 옥좌도 높은 단 위에 있었지만, 에센은 단 아래 바닥에 작은 의자를 놓고 거기 앉아있었다. 앞에는 청동 솥을 놓고 불을 피워 화로처럼 쓰고 있었고, 양녕에게 앉기를 권유한 의자도 그 화로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여있었다.

"옥좌는 쓰지 않으십니까?"

의자에 앉은 양녕의 질문에 에센이 웃으며 말했다.

"건물이 이리 넓으니 안 그래도 추운데, 저 위에 앉아있자니 허전하기까지 해서 못 견디겠더이다. 즉위하고 조회하고 할 때야 별수 없이 옥좌에 앉아 있지만, 이 겨울날 평소에까지 저기 앉아있을 필요는 없지 않소."

"추우시다면 근신전(편전)에 계시거나, 화로를 여럿 놓고 불을 때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근신전에도 있어 보려고 했는데 넓어서 추운 건 여기하고 별반 차이가 없을뿐더러, 앞에 봉천전이 막고 있으니 답답해서 다시 여기로 왔소. 그리고 나 하나 따뜻하자고 이 겨울에 땔감을 마구 때는 것도 내키지 않소. 차라리 이렇게 화로 가까이에서 따뜻하게 불을 쬐는 게 마음이 편해서 말이오."

거기까지 말한 에센은 피식 웃더니 이어 말했다.

"아무리 화북의 황제로 즉위했다지만, 여전히 마음은 초원의 게르에 있는 모양이오."

"검소한 것은 군왕의 덕이지 결코 흠은 아닙니다. 대한의 태조 고황제께서도 즉위하시던 날 드신 것이 물에 만 밥이 전부였을 정도지요. 게다가 폐하께서는 칸이시기도 하니, 게르 화롯가의 온기를 아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 구중궁궐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하셔야지요."

"고맙소. 공의 말이 맞소. 그런 의미로 이 봉천전을 헐고 큰 게르를 지어 정전으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하하하!"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그리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진지한 반응이 돌아오자 에센이 약간 당황한 듯 말했다.

"정말이오?"

"불교에서는 오대라 하여 다섯가지 요소가 세상을 이룬다고 합니다. 동방의 오행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지요. 대일경소에 따르면 그 가운데 수륜, 즉 물에 해당하는 것은 형상은 둥글고 색은 흰색이라고 합니다. 대청은 물에 속하는 나라인데, 마침 게르는 그 형상은 둥글고 색은 흰색이니 정전으로 모자람이 없지요."

"흥미롭구려. 불교라……. 화북의 원래 백성들이 불교를 두루 숭상한다고 하고, 초원 부족들 가운데도 그런 이들이 많지. 내가 불자가 된다면 공이 말한 것처럼 불교의 힘으로 내 즉위를 뒷받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다스리기도 좋을 테니 생각해 봐야겠소."

에센의 조부 이름이 마하무드였던 것에서 보이듯, 오이라트는 전체적으로 이슬람의 영향이 강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이 으레 그렇듯 오이라트 역시 모든 종교에 유화적일 뿐만 아니라 그리 독실하지도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개종을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이 얘기는 이쯤 해두고, 대한의 상황은 어떻소?"

양녕에게는 지금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이었지만, 대한 조정의 눈에 보이는 중원 정세는 그야말로 급변의 연속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녕이 계속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양녕은 에센의 즉위식이 끝나자마자 한성부로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앞으로의 결정권도 새롭게 받아서 다시 돌아온 참이었다.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전쟁이 금방 끝나고 병사들이 무사히 돌아와서 백성들은 기뻐하고, 조정에서는 바빠질 대비를 하고 있지요. 아, 대한의 상황은 아니지만 명나라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명나라에서? 뭐라고 하오?"

"저도 자세히 본 것은 아니지만 대한이 칭제건원 한 것이나 폐하의 즉위를 인정한 것 등등을 두고 화가 많이 난 모양입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화를 내면 뭐 어쩌겠습니까?"

"하하하! 그러게 말이오."

에센하고 같이 껄껄 웃던 양녕이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 청나라에서는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여러 일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 잘 풀렸소. 유폐해 놓은 전 황제도 공이 말한 대로 앵속각을 우려낸 술을 모자라지 않게 공급해 주니 항상 취해 있기는 하지만 얌전하오."

"초원은 어떻습니까?"

"북원 세력들이 내 즉위를 인정하고 화북의 칸으로도 인정했소. 물론 내가 몽골의 칸에게 초원의 모든 권력을 돌려주고 대원의 황제로 인정하는 대가였지. 초원 부족들도 많이들 이주해 왔소. 주드를 두려워하는 이들부터 한몫 잡으려는 상인들까지 다양하지."

"이제 정말로 장성 이북과는 갈라서게 되셨군요."

"아예 갈라선 것은 아니오. 으시테무르, 그러니까 내 차남은 초원에 남아서 마찬가지로 초원에 남기로 한 오이라트 부족들을 이끌기로 했소. 원래부터 초원이 체질에 맞는 아이기도 했고, 나로서도 초원에 연줄이 남은 셈이니 나쁘지 않은 일이지."

"다행입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도와드린 만큼을 정산받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양녕의 말에 에센은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소. 무엇을 원하시오?"

"땅을 받고자 합니다."

"땅이라……."

땅을 달라는 말에 에센이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화북에 원래 살던 백성들은 말을 잘 탈지언정 배에는 능하지 못합니다. 배는 화남 백성들이 잘 몰아서 흔히들 이를 가리켜 남선북마라고 하지요. 폐하를 따라 화북으로 이주해 온 부족들 역시 초원에 살던 이들이라 배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소."

"그런데 대한과 청나라 사이의 교역과 교류를 전부 육로로 하기에는 힘들 것입니다. 다행히 삼한은 예로부터 배에 능하니, 대한에서 배를 타고 오면 되지요. 이번만 해도 대한의 척동상단의 배가 은을 가져오고 양곡을 싣고 가지 않았습니까."

"아, 그건 정말 큰 도움이 되었소. 명나라 놈들이 달아나면서 조정의 은을 전부 들고 가 버린 탓에, 우리가 쓸 예산은 물론이고 화북 전체에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서 난리가 날 뻔했지 뭐요. 다행히 대한에서 산동의 양곡을 사가면서 은으로 값을 치러준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고, 즉위 시작부터 명나라가 일으킨 문제를 내가 수습하는 모습을 보인 덕에 백성들 사이에서 내 평판도 오른 느낌이오. 마침 대한에 식량이 많이 필요했던 모양이오?"

"뭐 그렇습니다. 이 이후로는 대한에서 딱히 식량을 많이 사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 폐하께서는 식량을 최대한 많이 비축해 두십시오."

"이유가 있소?"

원래 역사대로라면 1452년, 즉 현시점 기준으로 1년 뒤에 태평양 해저 화산의 큰 분화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 규모는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로 거대해서 가깝게는 일본의 전국시대 돌입, 멀리는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에도 각지에 기근이 닥쳤지만, 환곡을 어마어마하게 쌓아놨던 덕인지 실록에 구휼한 기록이 자주 나오는 정도로 그쳤지. 하지만 지금의 대한은 상황이 많이 다른 탓에 방심하다가 큰 재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로 말할 수 없어서 대한 조정에도 다른 이유를 대서 비축하게 한 것인데, 에센에게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지.'

"화북은 옛날에는 비옥한 땅이었지만 오래 농사를 지으며 척박해졌습니다. 당장 명나라만 해도 강남의 식량을 운하로 수송해서 화북을 유지했지요. 이제 강남의 식량이 공급되지 않으니 풍년일 때 많이 비축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기근이 들면 그 식량을 풀어 백성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이었군. 식량 비축의 중요성이야 우리도 잘 알지. 알겠소. 공의 말대로 하겠소이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앞으로도 대한과 청나라 사이에 배가 원활하게 오고 가려면 안정적으로 쓸 항구가 필요합니다. 또 화북과 화남이 달라져서 서로 합치려는 마음을 갖지 않게 하려면, 화북에 삼한의 풍습이 많이 섞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단순히 상인들만 오가는 항구가 아니라, 대한인들이 머물러 살면서 의복, 음식, 음악 같은 것들을 퍼뜨릴 정착지도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땅을 원하는 것이지, 넓은 영토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일리가 있군. 그럼 정확히 원하는 곳이 있소?"

"예. 아마 지도를 보면서 설명해야 폐하께서도 확인하시기 좋을 것 같은데, 지도가 있습니까?"

"물론이오. 명나라가 남기고 간 지도를 가져와라!"

에센의 지시에 봉천전 안에서 기다리던 몽골인 관리 몇이 낮은 탁자를 가져와 에센과 양녕 사이에 놓고 그 위에 지도책을 놓았다.

"산동 쪽을 펼쳐 주시오."

몽골인 관리들이 산동성 지도가 있는 쪽을 펼치자 양녕이 눈을 빛냈지만,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지도 곳곳을 살피더니 섬 하나를 짚으며 말했다.

"우선 산동과 심요도 사이에 있는 여러 섬 중에 이 타기도라는 섬을 주시고, 타기도와 심요도 사이에 있는 섬들도 주십시오."

양녕이 가리킨 타기도를 지도에서 본 에센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이건 그냥 돌섬인 것 같은데 이걸 원한단 말이오?"

"예. 원래도 이 섬들은 산동과 심요도를 오가는 항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항로를 더 빈번하게 이용하게 될 것이니 대한에서 관리하는 기항지가 있으면 오가기가 좋겠지요. 딱 기항지로만 쓸 것이니 이 정도 섬으로 충분합니다."

"산동과 심요도 중간에 있으니 기항지로는 좋겠군. 타기도와 심요도 사이의 섬이라고 해 봤자 바위섬 하나인 것 같으니, 이 정도면 어려울 것도 없지. 알겠소. 그리하리다."

에센이 승낙하자 양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지도만 보면 에센의 말대로 타기도는 별 의미 없는 작은 돌섬일 뿐이다. 하지만 마땅한 측량 기술이 없을뿐더러 대륙 국가이기까지 한 명나라가 만든 지도라, 해양과 섬은 부정확하게 그려져있다. 실제로 타기도는 산동에 더 가까울 뿐만 아니라 크기도 절대로 작지 않고, 심요도와의 사이에 비슷한 크기의 섬도 여럿 있다. 먼 훗날 선박이나 무기, 탐지 기술이 발전한다면 발해만 전체를 봉쇄해 버릴 수 있는 요충지지.'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항구 겸 정착지로 쓸 곳으로는 여기 산동 동쪽의 위해, 문등, 정해의 세 고을과 그 동쪽을 주십시오."

양녕의 제안에 에센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심요도에서 배를 타고 와서 바로 닿는 곳인 등주가 아니라 여기를 말이오?"

"예. 그간 산동과 심요도가 활발히 오간 것은 심요도를 개간하는 동안 백성들이 먹을 식량을 산동에서 사 가려던 탓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청나라의 통치를 도우려면 대한의 중심인 한성부 쪽과도 활발히 오가야 하지요. 그러려면 한성부 쪽에 가까운 땅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양녕의 말에 작게 끄덕인 에센은 한참 동안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남북으로 길고 좁고 산도 많은 여기를 원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필요한 만큼만 얻으려는 것이겠지. 알겠소. 대신 통치하는 것은 확실하게 도와주시오."

"물론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대한의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양국의 황제가 서로 돕게 되어서 나도 기쁘오. 여봐라, 지필연묵과 옥새를 가져와라. 대청 조정에 내릴 칙서와 대한 조정에 보낼 신서를 쓸 것이다."

필기구를 받은 에센이 종이 위에 투박한 필체로 칙서를 써 내려가는 것을 보며 양녕은 자신의 성과를 돌아보았다.

'이것도 역시 지도 덕을 보았군. 실제로 내가 방금 얻어낸 땅은 지도와 달리 동서남북으로 균형 잡힌 지형이고, 화북이 워낙 넓은 탓에 지도로 봤을 때 작아 보일 뿐이지 제주도 정도 면적의 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녕의 입꼬리에 야심 가득한 미소가 살짝 걸렸다.

'황해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기도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