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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80화 (28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80화

280화

1450년 8월 중순 모일.

경사. 황성.

황성 서쪽 원림에 지어진 거대한 게르에서는 에센과 양녕이 만나고 있었다.

"게르를 짓고 지낸다는 얘기는 오면서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소."

"궁성에 황제를 유폐해 둔 탓에 그곳의 건물들을 쓸 수 없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사방이 벽돌로 틀어막힌 답답한 곳에 들어가 있자니 숨이 막혀서 말이오. 그래서 거주고 집무고 모두 여기서 해결하려다 보니 이리되어버렸소. 옛 원나라 황제들이 왜 이렇게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소. 허허허."

에센이 웃으며 말한 것처럼 집무실로 쓰이는 지금 게르 안에는 책상과 필기구는 물론이고 책들도 가득 쌓여있었고, 이 게르 가까이에 지어져 있는 거주용 게르만 해도 몇 동이나 되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겠소. 우선 명나라 황제의 밀서를 받은 우리 대한은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돌파했소. 물론 그 밀서는 황제가 궁성에 유폐된 상태로 보낸 것이고 말이오."

지금까지의 상황을 정리하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에센이 양녕의 말을 받아서 이었다.

"한편 황제는 그 이후에 마음이 바뀌어서 나에게 양위를 하기로 했소. 그런데 갑자기 대한이 공격해 오니 나는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고, 산해관까지 함락되면서 상황이 긴급해지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막으러 나갔지."

"그리고 전투에 앞서서 그대를 만난 나는 양위 얘기를 듣고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황제가 정한 양위에 대한이 끼어들어서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지. 그래서 밀서를 가지고 왔던 황제의 측근 백 아무개와 함께 경사로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했소. 물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군대는 이끌고 가기로 했고 말이오."

"그렇게 군대를 이끌고 당당하게 동직문을 통해 경사에 입성한 그대는 정말로 황제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확인했고, 나 역시 밀서를 황제가 직접 보냈던 것이 사실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렇게 되겠군."

에센의 말에 만족스럽다는 듯 끄덕인 양녕이 말했다.

"아주 좋소. 그럼 앞으로의 흐름은 이렇게 하겠소. 나는 명나라 황제에게 있던 천명이 그대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하고, 이왕에 경사에 온 김에 즉위식에도 참석하고 가기로 했소. 그런데 그대가 도움을 요청해서 즉위식 이후로도 한동안 남아 여러 도움을 주고 각종 약조도 맺게 되는 것이지."

"마음에 드는군. 그럼 황제가 아직 넋이 나간 상태이니, 정신을 차리는 대로 빨리 양위를 받아내도록 하겠소."

"그리하시오. 아, 남경에서 전해진 소식인데, 새로 즉위한 황제가 이전 태자, 그러니까 궁성에 유폐된 저자의 아들을 폐하고 자기 아들을 새롭게 태자로 책봉했다고 하오. 정신을 차리면 이것도 알려 주시오."

"남경 놈들도 당장 날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렸나 보군. 알겠소. 그 소식까지 들으면 괴로움에 못 견뎌서라도 양위를 해버리고자 하겠지. 그래도 계속 독하게 버티면…… 그냥 양위를 했다고 하고 즉위해 버리겠소. 황제가 가지고 달아났던 용포와 천자신보도 되찾았으니. 어차피 명나라는 절대로 양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대한이 인정해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오."

"하하하! 이거 기대가 막중하군. 혹시 바로 도와줄 게 있소? 필요한 물건이 있다거나 하면 즉위 축하 선물 명목으로 주면 되니 지금이 마침 적당한 시기기도 하오."

양녕의 말에 에센이 쓴웃음을 지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에서는 다 도와줬으면 하는 심정이오. 물건보다도 제도나 통치법이 특히나 시급하지. 당장 즉위식만 해도 그렇소. 내 즉위에 따라오는 여러 세력 사이의 균형 변화는 둘째 치고라도, 즉위식 자체를 어떻게 할 것인지도 문제요. 솔직히 초원에서야 일단 선포한 다음 반대하는 놈들을 힘으로 눌러버리면 그게 가장 권위를 드러내고 자격도 증명하는 즉위식이오. 하지만 화북의 중국인들이 받아들이게 하려면 세세한 예법도 중요하지 않소."

이해한다는 듯 양녕이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예법을 아는 이들은 다 남경으로 달아났지. 알겠소. 내 도와드리리다. 물론 내가 명나라 예법을 다 아는 건 아니라서 대한의 예법에 가까운 형태가 되긴 할 것이오."

"그거면 충분하오. 오히려 명나라 예법 그대로가 아니면서도 중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니 더 좋소."

"다행이군. 그나저나 여러 세력 사이의 균형 변화도 신경 쓴다고 했는데 정확히 어떤 것이오?"

"내 출신과 기반에 관한 문제요. 나는 혈통 탓에 칸이 될 수 없소. 그런데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고 보니 여기가 칸발리크, 그러니까 칸의 성이라고 불린 것이 몽골에 점령된 이후가 아니라, 금나라의 대흥부였던 시절부터라고 하던 것이 기억나지 뭐요. 그 시절 몽골인들은 황제는 곧 칸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지. 그래서 여기를 점령하고 명나라의 황위를 양위 받으려 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소."

"황제가 되어 몽골인들에게 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우회적으로 칸이 되려 한 것이로군. 괜찮은 방법이오."

"하늘이 돕고 그대가 도와준 덕분이오. 문제는……."

작게 한숨을 쉰 에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문제는 그 이후요. 이은 것은 장성 이남 화북의 천명이고 다스리는 것도 화북의 백성들인데, 정작 내 세력 기반은 초원의 부족들이오. 백성들을 잘 다스리려면 화북의 황제여야겠지만 그러면 초원의 부족들과 멀어져 버리오. 그렇다고 초원에 집중하자니 이미 장성 남북의 천하가 다르다는 명분으로 즉위한 것이라 간섭할 명분이 부족하고, 몽골의 타이시라는 명목을 쓰자니 내가 몽골의 칸 아래로 들어가 버리는 꼴이 되지. 초원과 화북 사이에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균형을 잡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소."

"쉽지 않은 문제로군."

한참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있던 양녕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어떻소? 초원의 부족들을 화북으로 옮겨오게 하시오. 하나로 합쳐버리면 이리저리 기울 일도 없을 것 아니오,"

"부족들을 옮겨오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요. 화북의 군주로서 화북의 백성과 화북의 부족들을 함께 다스린다면 한쪽에 소홀하고 다른 나라에 간섭하고 하는 걱정이 없을 것 아니오. 물론 전부 억지로 끌고 오라는 것은 아니고, 옮겨오겠다는 이들만 오라고 하시오. 그래도 많이들 옮겨올 것이오. 사실 화북도 그리 겨울이 따뜻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겨울마다 주드 걱정을 하면서 살 필요는 없지 않소. 그렇기에 원나라 때도 많은 이들이 옮겨와서 살았을 것이고 말이오."

"주드라……."

에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폭설이 풀을 모두 덮거나, 반대로 눈이 오지 않아 목초가 말라붙거나, 갑자기 날씨가 풀려 녹았던 눈이 다시 얼며 사방이 빙판이 되거나, 혹한에 가축들이 얼어 죽는 것.

몽골어로 재해(주드)라고 하면 어떤 수식어가 없어도 그런 겨울의 이상기후를 가리킨다. 유목이 생업인 몽골인들에게 주드는 목숨을 위협하는 두려운 것이었다.

"화북으로 옮겨와서 산다고 꼭 농사를 지어야 하는 것도 아니오. 오히려 날씨가 춥고 목초가 없더라도, 비축해 둔 여물과 따뜻한 축사가 있다면 큰 걱정이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으니, 오히려 가축을 키우기는 더 좋을 것이외다."

"대신 초원에서의 내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겠소?"

"장성 남북의 천하를 확실하게 나눴으니 당당하게 화북의 칸을 칭하더라도 문제 될 것이 없고, 칸을 칭한다면 부족들 사이에서 위신은 더욱 올라가겠지. 그리고 영향력은 다른 방식으로도 투사할 수 있소. 화북에서는 지금까지 그대가 교역으로 사가던 수많은 것들이 생산되오. 이제 그대가 파는 입장이 되는 것인데, 그대는 초원의 부족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알고 있으니 중국인들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으로 교역할 수 있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

"0그리고 그대에게 우호적이지만 화북으로 옮겨오지 않고 초원에 남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이미 그대의 편을 든 상인들도 많으니, 그들을 통해서 잘 교역한다면 오히려 전보다도 영향력이 커질지도 모르오."

진지한 표정으로 들으며 끄덕이던 에센이 말했다.

"북원 잔당들도 오히려 반길지도 모르겠소. 나는 칸에게 몽골의 권력을 돌려주고 대원의 황제로 인정해주는 대신, 저들은 나를 화북의 칸이자 황제로 인정해 주는 것이지. 그렇게 깔끔하게 갈라서면 차라리 뒤탈이 없겠군."

"부족들을 옮겨와야 하는 이유는 또 있소. 중원은 지금까지 여러 번 분열되고도 다시 합쳐왔고, 그 분열된 기간은 갈수록 짧아져 왔소. 중원은 갈라지더라도 곧 하나로 합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점점 자리 잡아가는 것이겠지."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군."

"하지만 그것은 같은 중국인이기에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오. 그렇다면 화북의 중국인들이 중국인이 아니게 만들면 되지 않겠소?"

"이 많은 머릿수에 동화되어 사라져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 이들을 몽골인으로 만든단 말이오?"

"몽골인으로 만들면 이번에는 초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겠소? 초원의 부족들을 화북에 옮겨와 이들과 섞여 살면서, 그대의 백성들 모두가 몽골인도 중국인도 아닌,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여 그대의 천하를 독자적인 것으로 만드시오. 내가 도와주겠소. 어떻소?"

자신만만한 양녕의 말에 한참 고민하던 에센은 이윽고 결심한 듯 말했다.

"교역을 제한당한 위기가 역으로 황제를 붙잡는 결과를 낳았고, 황제가 달아난 것이 대한의 도움을 받는 결과로 돌아왔소. 한 치 앞을 알 수 없이 위기와 기회가 오가는 가운데 천운이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 몸을 사린들 무엇하겠소? 까짓거 해보겠소. 그대의 말을 믿고 따라보리다."

"좋소. 그럼 일단…… 참, 그 전에 궁금한 것인데, 새롭게 세울 나라의 이름은 정했소?"

양녕의 질문에 에센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오. 무엇으로 지을지 이전에 몽골어로 지을지 중국어로 지을지도 모호해서 계속 고민만 하고 있소."

"몽골인과 중국인을 합쳐 새로운 백성들이 되게 하고 칸이자 황제가 될 것이니, 두 말을 다 써서 지으면 되지 않겠소?"

"두 말을 다 쓰다니?"

"몽골어로 전사들의 나라, 다이친 울루스라 하시오. 그리고 다이친의 한자 표기는 대청이라고 하시오."

그 말에 에센이 흥미롭다는 표정이 되었다.

"몽골어로 된 국명이면서, 대금, 대원, 대명, 대한 하듯이 대청이라는 국명도 되는 것인가. 엄밀히 따지면 발음은…… 아니, 상관없겠군."

중국어로는 종성의 'ㄴ'과 'ㅇ'의 구분이 있지만, 몽골어로는 둘 다 'ㅇ'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그렇기에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혼자 끄덕이는 에센에게 양녕이 덧붙였다.

"그리고 발음은 같더라도 푸를 청이 아니라 맑을 청(淸)을 써서 대청이라고 하시오.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대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선양을 받은 것이지 않소? 명나라는 화에 속하는 나라이니, 명나라를 꺾고 세운 그대의 나라는 수극화의 원리에 따라 수에 속하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이치에 닿을 것이오."

"그럴싸하군. 다이친 울루스의 칸, 대청의 황제. 칸이자 황제라……."

혼자 되뇌며 점점 환희로 찬 표정이 되어 가는 에센을 보며, 양녕도 야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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