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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9화 (27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9화

279화

"나를 협상에 내놓는다니, 대체 무슨 말이오! 경사를 탈환하고 나를 복위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소!"

양녕은 의자에 앉은 상태로 고개만 돌려 주기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중국인들이 중원을 통일해 큰 나라를 이루면 삼한에는 독이 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오. 강성했던 옛 조선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에게 공격받아 멸망하고 말았소. 반대로 한나라가 몰락하고 중원이 분열되자 고구려가 그 틈을 타서 힘을 키웠지. 그리고 또 당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무너져 버렸소."

양녕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나라가 무너진 혼란을 수습한 송나라는 비록 중원을 모두 얻었으나 거란족과 여진족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해 쩔쩔맸고, 덕분에 고려는 그 기세를 키울 수 있었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국인들이 중원을 되찾고 명나라를 세웠소. 두 나라가 이전과는 달리 전쟁 없이 무난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고는 하나, 그것은 우리가 명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하고 옛 제도를 쓰지 못하는 등 온갖 굴욕을 감내한 결과였소. 그러던 와중에 이런 기회가 찾아왔는데, 우리가 미쳤다고 명나라를 다시 세워 주겠소?"

그 말에 주기진이 눈을 부릅뜨고 양녕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중원을 분열시키려는 것이로구나!"

"그래. 아무리 네가 대한을 대등한 천자국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하지만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는 노릇이고, 설령 계속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명나라가 옆에 있으면 대한이 기를 펴기도 쉽지 않은 일이지 않으냐. 송나라 때 그러했듯이, 너희 중국인들은 강남에 찌그러져 있어 주는 게 우리에게는 가장 이로운 일이다."

"비록 이제 상국은 아닐지라도 이웃이 도움을 요청했는데, 네놈들은 이익에 눈이 멀어 이렇게 인의를 져버리느냐?"

주기진의 매도에도 양녕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여기서 인의를 운운하다니 네가 황제의 그릇이 아님은 잘 알겠다."

"뭐야?"

"사람의 인의와 나라의 인의는 다르다. 남의 것을 빼앗으라며 젊은이들을 목숨이 위험한 일에 내몬다면, 이것은 마땅히 사람의 인의를 져버리는 짓이다. 하지만 나라에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꼭 필요한 땅을 얻기 위해 병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낸다면, 그것이 사람의 인의를 저버리는 일이라 해서 하지 말아야겠느냐? 오히려 인의를 지키겠다고 요충지를 얻지 않았다가 훗날 큰 침공을 당해 많은 백성이 죽고 다친다면 그게 더 인의에 어긋나는 일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인의를 위해서 인의가 아닌 일을 행하는 것, 세상은 이것을 권도를 행한다고 한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

양녕의 대답에 주기진은 버럭 노성을 질렀다.

"어떤 궤변과 미사여구로 꾸미더라도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게 바뀌지는 않는다. 비록 당장은 이익을 볼지 모르지만, 나를 저놈들에게 팔아넘긴 일은 후대에 두고두고 비난을 받을 것이야!"

"자신을 전송해 주던 옛 조선의 제후를 살해하고 도주해 온 벼슬아치에게 벌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을 내리고 구실을 잡아 옛 조선을 침공해 멸망시킨 한 무제처럼 말이냐? 아니면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억지 명분을 가지고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애꾸가 된 당 태종처럼 말이냐?"

양녕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주기진을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우리의 천하를 무너뜨리려 든 적은 많아도, 우리가 너희의 천하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둘 다 후대의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수와 경중을 저울에 단다면 아마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진 탓에 제대로 잴 수도 없겠지. 그리고 애초에 후대에서 알지를 못할 것인데 어떻게 우리를 비난하겠느냐?"

"알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너희 조정에 자초지종을 알리고 저 군사들을 받은 것이지 않으냐."

"상황을 알리고 군사들을 받아오긴 했지. 다만 전부 알리지는 않았을 뿐이다."

주기진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내가 쓴 서신이 갔을 것 아니냐."

"그 서신을 내가 불러준 대로 썼던 것은 잊었느냐? 대등한 황제를 대상으로 보내는 새로운 격식에 신경을 쓰느라 못 알아차린 모양이구나. 그 내용에 네가 심요도에 직접 왔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네 서신을 조정에 보내면서 첨부한 장계에 이렇게 적었지. 명나라 황제의 측근인 백 아무개라 하는 자가 목숨을 걸고 밀서를 가지고 왔다고."

"너…… 네 이놈……."

"이제 좀 상황이 파악되느냐? 물론 대한의 주상께서는 워낙 머리가 비상하시니 아마 다 파악하고 계실 것이고, 조정의 고관들도 일부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하지만 궁성에 유폐된 황제가 옥새를 들고 탈출해서 심요도까지 왔다는 생각을 다른 누가 쉽게 하겠느냐? 그리고 너를 구출한다면 네게 큰 빚을 지움과 동시에 명나라의 황통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황제국으로 인정받았다는 명분은 남는데 누가 군대를 일으키지 말자고 하겠느냐? 이번 익태군은 그렇게 결성되었다."

"그렇다면 기록은……."

"조정 고관들도 입을 다물거나 아예 모를 정도인데, 무슨 수로 후대까지 기록이 남겠느냐? 특히 내가 너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는 주상께서도 짐작하지 못하고 계실 것이다. 오로지 이 둘을 비롯한, 익태군 안에서도 입이 무거운 극소수만이 이번 일의 모든 진상을 알고 있지. 너와 함께 온 두 환관도 지금 그들에게 붙잡혀 이 휘장 밖에 포박당해 있을 것이다. 이게 다 북평왕 주군이 백 아무개 노릇을 열심히 해준 덕이야."

절망한 주기진이 양녕의 치욕적인 조롱에도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만 보던 에센이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오?"

"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려. 어디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소?"

"지금 둘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서 대강 파악은 했소. 그저 그대가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아직 감이 잘 안 올 뿐이오."

"어떻게 설명해야 하려나……. 일단 하나 확인하겠소. 이자에게서 선양을 받아 황제가 되되, 영토를 회하 이남으로 넓히려 하지는 않으려는 것 맞소?"

"맞소. 역사를 돌아보니 회하 남쪽으로는 얻기도 힘들도 얻어도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오."

"우리도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배운 대로 하려는 것이오. 중원은 쪼개져 있고 중국인들의 나라는 장강 일대로 쪼그라들어 있을 때 온 세상이 평온했었소. 그대와 협상해서 그 상황을 다시 만들려는 것이지."

"그 평온을 무너뜨린 것이 우리 몽골이었는데도 나와 협상한단 말이오?"

"우리 몽골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군. 그것은 황금씨족의 몽골, 황금씨족의 대원이었소. 그렇지 않소? 예케 몽골 울루스의 타이시이자, 초로스 가문의 수장이여."

그 말에 한참을 껄껄거리고 웃던 에센은 마음에 든다는 듯 끄덕거리며 양녕에게 말했다.

"오이라트 출신인 내 상황이 어떤지, 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해왔고,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전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구려. 그대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진짜였소."

"칭찬 고맙소. 그럼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지. 이자를 넘겨받는대로 곧 선양을 받았다고 하며 황제로 즉위하시오. 명분은 우리가 도와주겠소."

"대한이 내 명분을 도와준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유폐된 명나라 황제가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는 거기에 응해 황제를 구출하고자 군사를 이끌고 산해관을 뚫은 것이지 않소."

"그렇지."

"그런데 막상 이렇게 대치한 상황에서 그대를 만나보니 황제는 서신을 보낸 다음 생각이 바뀌어서, 이미 천명이 기울었으니 마음이 정리되는 대로 선양을 하겠노라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오."

"오호. 그렇게 되면 황제가 선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을 대한이 인정해 주는 셈이 되는군. 그것도 황제를 구출하러 대병력을 몰고 왔다가 돌아가니 더더욱 신빙성이……. 설마 그 소문이 일부러 퍼뜨린 것이오?"

무슨 말인지 짐작한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황제의 소재를 숨기기 위한 책략이자, 이 협상을 위한 포석이었지."

"정말로 치밀하군."

"그리고 하나 더 해줘야 하는 것이 있소."

"무엇이오?"

"이자는 대한 땅에 도착한 다음에야 대한이 천자국을 선포했다는 것을 알았소. 혹시 경사에 그 소식이 늦게 전해졌던 것이오?"

에센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황제가 달아나기 전에 전해졌소. 그래서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조선도 너를 버렸으니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하며 압박하려고 했는데, 하필 그 전에 달아났을 뿐이오."

"다행이로군. 그럼 그때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줬고, 황제는 포기하기는커녕 대한에 몰래 서신을 보냈지만, 곧 생각을 바꿨던 것으로 해주시오."

"서신에 황제국 선포와 대한이라는 국명이 들어간 것이 시간순서와 어긋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로군. 대한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도움을 청하려 했다고 하면 충분히 설명 가능한 일이겠지. 알겠소. 그리하겠소."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오? 우리가 무엇을 요구할지 알고?"

의아해하는 양녕의 말에 에센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상황을 알고 있지 않소. 빨리 황제를 다시 손에 넣고 즉위식을 올리지 않으면 내 자리가 위험하니, 조건을 가릴 처지가 아니지. 그런데 정확히 뭘 원하는 것이오?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받아들이겠지만, 너무 과한 것이라면 힘들 수도 있고 들어주더라도 세상이 수상하게 여길 수 있소."

"우선 대한을 대등한 천자국으로 받아들이시오. 그리고 우리가 산해관에서 현판과 종, 북을 가져갔는데, 그건 그대로 넘기시오."

"그거야 당연하오. 나는 초원의 천명과 중원의 천명을 분리하고, 나는 중원의 천명을 이었노라고 하려는 것이오. 여러 천명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유리할뿐더러, 명나라 황제가 취한 태도를 그대로 잇는 것이라고 하면 내 정통성에도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가져간 것들은 그대가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 아니오? 당연히 그대에게 속한 것이오."

에센이 시원하게 인정하자 양녕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고맙소. 그리고 하나 더, 대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조건이오. 물론 우리가 무작정 도와주기만 하지는 않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받을 것이나,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것이니만큼 부담되지는 않을 것이오."

"선양을 받고 화북의 황제가 된다고 해도 남으로는 땅을 되찾으려는 명나라가, 북으로는 내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북원 세력 잔당들이, 영토에는 이질적인 백성들이 살고 있어 통치가 쉽지 않을 것이니 도와준다면야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오. 하지만 도와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힘들 때 도움을 청하라는 것도 아니고, 도움을 받는 것이 조건이라니 무언가 특이하군."

"조금 전에도 얘기가 나왔지만 우리는 중원이 나뉘어있어야 유리하오. 화북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아 다시 중국인이 중원을 모두 얻게 되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지. 그러니 무조건 우리의 도움을 받아들여 화북을 확실히 유지하라는 것이외다."

"그거야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내가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오."

양녕은 에센과 생각 이상으로 말이 잘 통하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좋소. 그럼 우리는 이자를 넘겨주고 선양의 증언을 해주며, 앞으로 그대가 화북을 통치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오."

"나는 대한을 천자국으로 인정할 것이며 명나라 황제는 나에게 잡혀온 이후로 궁성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할 것이오. 또 대한이 나를 도와준 대가를 지급할 것이오."

"그럼 협상은 일단 타결이로군. 그럼 이자와 두 환관은 여기서 바로 넘겨주겠소. 나머지는 경사, 아니 칸발리크에 가서 논하는 게 어떻겠소?"

그 말에 휘장 안의 모두가 흡족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주기진만이 흐느끼듯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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