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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8화 (27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8화

278화

1450년 7월 하순 모일.

북직례. 산해관성 관아.

장성 끝에서 육지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는 장성에 붙여서 지어진 영해성이라는 성이 있었다. 바다에서 오는 공격은 전혀 상정하지 않고 그저 장성 끝 쪽을 지키기 위해서만 지어진 작은 성인 탓에, 석주중대와 조총수들이 장성 끝 위에서 진격해와 성벽을 점령하자 순식간에 함락되어 버렸다.

"우회로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군단장의 작전이 실로 명안이었소."

지금 상황을 보고하러 왔던 김문기가 양녕의 칭찬에 웃으며 말했다.

"그저 저하께서 심양성을 함락시킬 때 쓰셨다던 방법이 떠올라 응용해본 것뿐입니다."

영해성을 점령한 익태군 병력은 영해성과 장성 끝 사이의 성벽에 통로를 냈다. 완전히 철거할 여유는 없어서 그저 성벽을 최대한 무너뜨리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낮은 둔덕으로 만들었을 뿐이지만, 말을 타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게 생겨난 우회로를 통해 장성을 넘은 기병과 보병들이 산해관성 후방을 포위하고, 장성 위에 올라간 보병들이 산해관성 성벽까지 진격해오니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조차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하하! 고맙소. 그래서 지금 영해관 상황은 어떻소?"

그리고 산해관성 관아를 점령하고 임시 관아를 차린 양녕은 영해성을 직접 살피고 온 김문기의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원래는 성벽을 일부 헐어내고 그 재료들로 화성을 응용해 증축할까도 했는데, 그랬다가는 다시 명나라에 돌려주었을 때 대한의 축성기술이 넘어갈 수 있어서 그렇게 하지는 않기로 했다 합니다."

김문기가 말한 화성은 심요도에 새로 성들을 짓는 데에 쓴 새로운 구조, 즉 원래 역사에서 성형 요새라는 이름이 붙었던 바로 그 구조였다.

이향이 설계도를 보고 꽃을 닮았다고 한 데에서 붙은 화성이라는 별명이 널리 쓰이다가 결국 정식 명칭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다행이오. 비록 명나라 사신이 오가며 이미 화성을 여러 번 보았다고는 하나, 눈으로만 보고 따라하는 것과 직접 뜯어보는 것은 그 이해도가 다를 수밖에 없지."

"예. 대신 영해성 서남쪽에서 바다까지 이어지게 성벽을 쌓게 했습니다. 그러면 영해성 남쪽 해안은 동, 서, 북으로 성벽이 막고 있고 남쪽으로만 바다와 이어진 안전한 항구가 되지요. 그것 외에는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짧은 성벽을 쌓는 정도라면 별다른 기술도 쓰이지 않고 병사들 공력도 많이 들지 않으니, 나중에 명나라에 돌려주더라도 별 손해는 없겠군. 잘하셨소."

"감사합니다, 저하. 그나저나 저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김문기가 가리킨 관아 중정에는 커다란 나무판과 종, 북이 옮겨져 있었다.

"아, 뒤집혀있어서 뭔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겠소. 나무판은 진동문(산해관성 동쪽 성문)에서 떼어온 현판이고, 종과 북은 산해관성 중앙의 종고루에서 떼어온 것이오."

"진동문의 현판이라면 천하제일관이라 새겨진 그것 아닙니까? 게다가 종고루의 종과 북은 대체 왜……."

김문기의 궁금해하는 표정을 본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정에 보낼 전리품이오. 대소신료들은 물론이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과연 이번 원정이 성공할지 걱정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우리가 천하제일관으로 이름 높은 산해관을 함락시키고 장성을 돌파했다는 증거인 저 전리품들을 받아보면 한결 마음이 놓이지 않겠소."

"그런 것이었군요. 중국의 천명이 기울고 삼한이 떨치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천하에 보이는 증거도 되겠지요.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저 현판을 전리품으로 가져간다고 하면 백공은 마음에 안 들어했을 것 같습니다."

"맞소.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더군.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가 뭐 어쩌겠소. 산해관이 대한에게 뚫렸다는 것이 명확하고 널리 알려지게 해야 에센과 오이라트의 위신이 깎여 놈들의 지배력이 약해지고, 그래야 놈들을 몰아내고 경사를 되찾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자 알겠다면서 대신 나중에 잘 돌려달라고만 하더이다."

그 말에 김문기가 껄껄 웃더니 말했다.

"저하 말씀대로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쩌겠습니까. 그나저나 이제 산해관을 손에 넣었는데, 다음에는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 병사들의 휴식과 치료, 무기 수리와 군수품 보급 등의 정비를 서두르고, 그게 다 끝나는 대로 바로 경사를 향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하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리 진행하겠습니다."

작게 끄덕인 양녕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덧붙여서 말했다.

"좋소. 그리고 추가로 이번에 사로잡은 오이라트 병사들, 기왕이면 높은 계급에 있는 이들을 내게 좀 데려와 줄 수 있소? 뭘 좀 알아내고자 하는 게 있어서 말이오."

* * *

1450년 8월 초순 모일.

북직례. 풍윤 남쪽 평야.

저 멀리 보이는 익태군의 대병력을 바라보는 에센의 표정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조선이 황제국을 선포하고 국명을 대한으로 바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에센은 일이 잘 풀리고 있다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서 황제국을 선포하고 나선 것이니, 이번 전쟁에 대한이 끼어들 일은 없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벌써 여기까지 왔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로 그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런데 별안간 대한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북원 부족들을 통해서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산해관이 함락되어 버렸다.

그리고 대한의 군대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에 입성하자마자 소문 하나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시작했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움을 청하자 대한의 황제가 거기에 응했고, 금나라를 요동에서 쫓아냈던 바로 그 대한의 황자가 군대를 이끌고 에센을 토벌하고 황제를 구출하러 오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무래도 완전히 뜬 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산해관 안쪽의 고을들이 저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그 도움을 받아 이렇게 빨리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요. 물론 말도 안 되는 부분도 있지만, 짚이는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장남 호르후다순은 주변의 듣는 귀를 의식해서 마지막 말을 모호하게 했지만, 에센은 그게 무슨 내용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이미 경사에서 달아났으니 구하러 와 달라고 할 리가 없다. 하지만 황제가 달아난 이후 환관 놈들을 문초하다가 황제가 숨겨 뒀던 옥새를 가지고 갔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대한의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에 그 옥새를 찍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그나마 황제가 다른 곳에 몸을 숨기고 대한에는 서신만 보낸 것 같아서 다행이다. 만약 황제가 대한에 직접 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대한의 군대와 함께 산해관을 넘었다면 더 걷잡을 수 없었을 거야.'

"그러게나 말이다. 음?"

익태군 진영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에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익태군 선두에서 빠져나온 누군가가 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몽골 병사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대체 뭐지?"

궁금해진 에센은 말에서 내려서 기다리다가, 한참을 달려 겨우 도착한 몽골 병사에게 직접 물주머니를 건네주며 물었다.

"일단 이걸 마시고 숨을 좀 돌리거라. 대체 무슨 일이냐?"

물주머니를 받아 벌컥벌컥 마신 병사는 투구를 벗고 머리의 땀을 닦더니 말했다.

"저자는 대한의 황자인 양녕공인데, 타이시께 전할 말이 있다면서 포로 중에서 저를 골라서 보냈습니다."

양녕의 이름이 나오자 에센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로 그자였군. 그래, 전할 말이라는 게 무엇이냐?"

"타이시와 대화를 하고자 한답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호르후다순이 당황한 듯 말했다.

"대화라니? 저들은 우리를 쫓아내고 황제를 확보하려고 온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애초에 무슨 조건을 내놓더라도 우리가 황제를 내놓고 초원으로 물러갈 리가 없으니,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저자도 잘 알 텐데?"

"저자가 그 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하자는 것이라는 말도 전하라고 했지요. 이게 전부입니다."

에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양위받아서 즉위하는 게 계속 늦어진 탓에, 잘못하면 황제가 달아났다는 게 들킬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게다가 저들의 강한 군대와 싸우게 된다면 얼마나 버틸지도 모르고, 어떻게 버티더라도 남쪽에서 명나라 군대가 협공을 가한다면 그땐 정말로 위험해진다…….'

한참 고민하던 에센은 이윽고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다. 어디로 가면 되겠느냐?"

* * *

잠시 후.

양 진영 사이 공터.

공터에 설치된 휘장에 도착한 에센은 따라온 호위 병력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몇 사람만을 데리고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 에센이 들어오자 휘장 안에서 혼자 기다리던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대한국 황제 폐하의 형제이자 익태군 도원수인 양녕공이라 하오."

"나는 예케 몽골 울루스의 타이시, 초로스 가문 사람, 토곤의 아들인 에센이오."

"내 요청에 응해 주어서 고맙소. 앉으시오."

에센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대화를 하자고 부른 것이오?"

"협상을 하려고 불렀소."

"협상이라……. 나에게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협상을 하려는 것이오?"

에센의 질문에 양녕은 대답 대신 다른 말을 했다.

"명나라의 황제가 대한에 직접 와서 도움을 요청했소. 지금 우리 군대에도 따라와 있지."

그 말에 에센이 놀라서 말했다.

"그걸 지금까지 숨겼단 말이오? 대체 왜? 그게 사실이라면 진작 밝히는 게 유리했을 것인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소. 들어오시오!"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양녕의 등 뒤로, 좌우로 익태군단장 김문기와 좌군사단장 유응부를 대동한 주기진이 들어왔다. 그대로 양녕의 옆에 선 주기진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에센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에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내 마음 같아서는 너를 붙잡아서 엄히 벌하고 싶으나, 내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환관의 말에 귀를 기울인 탓에 일어난 일이다. 또 내게 도움을 준 대한의 병사들이 다치게 하는 것도 옳은 도리가 아닌지라, 네가 순순히 초원으로 물러간다면 이번 일은 잘못을 묻지 않기로 했다."

황제가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도 여기까지 왔다면, 황제가 있다는 것을 밝힌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센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양녕에게 말했다.

"정말로 항복을 권하러 온 것이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양녕이 그렇게 말하며 손짓하자 김문기와 유응부가 순식간에 주기진을 좌우에서 붙잡고 바닥에 눌러 앉히더니, 허리춤에서 밧줄을 꺼내 그대로 포박하기 시작했다.

"양녕공?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주기진이 당황해서 양녕에게 외쳤지만, 양녕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광경에 에센조차 당황해서 굳어 버렸다. 그저 그대로 눈만을 움직여 포박당하는 주기진과 덤덤하게 앉아있는 양녕을 번갈아서 볼 뿐이었다.

이윽고 주기진의 포박이 끝나자 에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오?"

양녕은 태연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항복을 권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조금 전에 말했던 대로 협상을 시작하지. 우리 쪽에서 내놓을 것은 명나라의 황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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