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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7화 (27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7화

277화

1450년 7월 중순 모일.

심요도. 안시성.

요하 동쪽에 있던 명나라의 여러 고을은 조선의 영토가 된 이후로도 계속 이전의 이름을 써왔다. 하지만 대한이 선포되고 명나라의 황제가 대한을 천자국으로 인정하며 도움을 청하는 서신까지 보내자 더는 명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각 고을마다 가까운 곳에 있던 고구려의 옛 성 이름을 가져와 새로운 이름으로 삼았다.

지금 양녕이 있는 이곳 안시성 역시 해주위에서 개명해서 지금의 이름이 된 것이었다.

"병력 집결과 편성은 다 끝났고, 군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 수송은 척동상단에서 보조하기로 했습니다."

서쪽을 돕는다 하여 익태군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번 원정군의 실질적 총지휘관인 익태군단장 김문기의 보고에, 익태군 도원수를 맡게 된 양녕이 말했다.

"대한과 국경을 접한 북원 세력은 아마 우리가 집결했다는 사실을 지금쯤 알았을 것이오. 하지만 그들은 오이라트를 견제하려고 하니 에센에게는 최대한 늦게 전달하지 않을까 싶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출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소."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럼 출정할 때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알겠소."

보고를 마친 김문기는 무언가 떠오른 듯 양녕에게 말했다.

"그런데 저하, 금나라가 어떻게 나올지가 좀 걱정됩니다. 대한이 군대를 크게 일으켜 서쪽으로 간다는 것은 금나라에서도 알지 않겠습니까?"

"나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오. 하지만 금나라는 우리에게 여러 정보들을 알려 주었소. 우리가 에센과 오이라트를 꺾어야 자신들도 유리해지니, 괜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오."

"예. 하지만 아무리 대한이 강하다고 해도 원정을 한 번 하고 나면 어느 정도 힘이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때를 노려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대한이 원정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서 무언가 진행할지도 모릅니다."

김문기의 걱정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길러미섬과 쿠이섬은 물론이고 일본 본토 일부까지 점령한 금나라가 철과 화약의 생산을 늘리고 구리와 사람을 사들이자, 조선이 명나라를 통해서 그것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모든 것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들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말았다. 정작 그 시초가 된 금나라는 전혀 견제가 되지 않은 채 말이다.

"아예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 걱정할 것도 없소. 비록 전쟁에서 전략과 전술, 병력의 질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국력의 강성함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않소."

"그렇지요."

"그런데 금나라가 아무리 세를 키웠다고는 하나 대한에 비하면 국력이 한참 모자라오. 게다가 저들은 우리 익태군의 원정 계획과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 않소. 괜히 섣불리 움직였다가 오히려 우리에게 명분만 줄지도 모르는 일이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인 김문기에게, 양녕이 싱긋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금나라를 견제하는 것은 실패한 게 아니오. 아직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을 뿐이지."

"역시 이미 계획하시는 바가 있으셨군요. 그렇다면 저도 괜한 걱정은 접어두고, 지금은 원정에만 집중하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그나저나 삼한이 요하를 넘어 중국을 치러 가는 거점이 안시성의 이름을 이은 곳이라니, 정말이지 오묘한 일이지 않소?"

* * *

1450년 7월 하순 모일.

심요도. 산해관 동쪽 모처.

출정 이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격한 익태군은 산해관을 앞에 두고 잠시 멈춰 섰다. 보급선을 정비하고 새롭게 확보한 요하 서쪽 땅의 방어를 굳히면서, 장성의 일부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해관을 어떻게 공격할지 계획을 짜려던 것이었는데, 정찰 결과 의외의 사실이 밝혀졌다.

"정말로 장성 끝이 바다 위까지 연장되어 있단 말이오?"

"예, 그것도 제법 견고하고 높게 지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간 사신들이 산해관을 많이 지나긴 했지만, 거기까지는 갈 이유가 없었기에 가 본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안 알려졌던 모양입니다."

좌군사단장 유응부의 말에 양녕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산해관 동서의 나성과 남북의 익성, 그리고 산해관 바깥의 여러 요새가 지어지기 이전 시기이고 새로 지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어서 서달이 쌓은 그 상태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군. 아무래도 요동을 넘겨주면서 혹시라도 조선이 다른 생각을 품을 때를 대비해서 증축한 모양이다. 괜히 잠재적 적국으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여 조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어서지, 아니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이상 증축하지는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가.'

"역시 천하제일관이라는 이름이 그냥 붙은 게 아니로군요. 바다 쪽으로 우회하기가 어려워졌으니, 어떻게 뚫어야 할지 막막합니다."

중군사단장 이징옥의 말에 김문기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지휘소 천막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끊겨 버렸다.

"양녕공, 백 아무개요.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천막 안으로 들어온 주기진은 옆에 있던 병사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더니 양녕에게 말했다.

"회의 중인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산해관을 앞에 두고 막막해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소."

주기진은 옆에 있던 익태군 병사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우선 궁금한 것인데, 산해관에는 명나라 황제 폐하의 서신이 먹히지 않은 것이오?"

"그렇소. 꿈쩍도 하지 않더이다."

양녕은 주기진에게 대한의 황제에게 보내는 도움 요청 서신과는 별도로, 명나라 군사들에게 대한에 협력할 것을 명하는 칙서도 작성하게 했다. 익태군이 접근하면 처음에는 경계하던 명나라 요새의 병사들도, 그 서신을 보여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순순히 협력했다. 이미 조정이 남경으로 천도하고 오이라트의 손아귀에 버려지면서 사기가 바닥나 있었는데, 우방국에서 군사를 이끌고 도와주러 오면서 황제의 칙서까지 가져왔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역시 쉽게 열어 주지 않는군.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말해 보면 어떻겠소? 사실 황제 폐하를 도우러 가면서 가장 큰 난관이 산해관을 넘는 것이니, 어떻게 해서건 그걸 극복하는 게 급선무 아니겠소?"

"안 되오."

황제인 것을 밝히더라도 산해관만 지난다면 그 뒤로는 막힐 것이 없지 않겠냐는 주기진의 말을 딱 잘라서 끊은 양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는 첫째 이유는 정찰 결과 산해관 성벽 위로 보이는 병사들 대다수가 몽골식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오."

"설마 오이라트 병사들이오?"

"그럴 것이오. 오이라트라고 해서 산해관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고, 화포도 이제 곧잘 다룰 줄 아는데, 산해관 방어를 중국인 병사들에게만 맡기지 않는 건 뭐 당연한 일이지 않겠소."

"그렇게 오이라트 병사들이 잔뜩 있다면 폐하의 측근이 아니라 폐하께서 직접 가서 열어 달라고 하신들 열어줄 리가 없겠군."

"둘째로 요동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지세가 극히 좁기 때문이오. 여기는 북쪽에는 산, 남쪽에는 바다가 있는 좁은 길목의 안쪽이라 방어에 유리해서 산해관이 지어진 것 아니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그 좁은 길목에 들어와서 산해관을 공격하는 상황인 데다가, 여기 북쪽은 적들의 영역인데다 오이라트는 산이나 숲에도 익숙하니 언제 어디서 습격해 올지 모르오. 여기서 잠시 멈춘 것 자체가 이미 위험을 감수하고 한 것이지."

"거기다가 여기에 중요한 인물이 있다고 알려 주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포위해 달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겠소."

"그렇소. 여기까지 오면서 강 하구마다 항구를 만들고 그 항구를 보호하는 요새를 만든 것은 보급선을 위한 기항지로 쓰려는 것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에 바다로 탈출하기 위함이기도 하오."

양녕의 말에 주기진은 작게 끄덕이더니 말했다.

"알겠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거 괜히 회의만 방해했구려. 앞으로는 공을 믿고 얌전히 기다리겠소. 그저 산해관을 함락하면서 명나라 병사와 백성들이 많이 다치지 않게만 해주시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말을 마친 주기진이 어딘가 힘없는 표정으로 일어나서 천막 밖으로 나가자, 그 뒷모습을 보던 유응부가 말했다.

"저하를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많이 초조한 모양입니다."

"뭐, 그럴 만도 하지. 그럼 일단 회의를 재개하겠소. 어떻게 해야 더 늦지 않게 산해관을 뚫을 수 있겠소?"

양녕의 말에 김문기가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리려다가 못한 것인데, 우회가 어렵다면 아예 우회로를 만들어 버리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 * *

며칠 뒤.

산해관 남쪽 황해 해상.

바다로 뻗어 나온 장성 끝을 포위하듯 떠 있는 서해수군의 수많은 판옥선의 중심에는 수자기가 내걸린 대장선이 있었다. 그 대장선 망루에서 장성 끝을 노려보던 서해수군의 총지휘관, 서해수군통제사 이변에게 군관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통제사, 정찰선이 깃발 신호를 보냈습니다. 역시 장성 끝 너머에 오이라트 기병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역시 놈들도 대한이 함대로 우회해서 상륙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게로군. 상륙이라는 게 그리 쉽지 않으니 기병을 두어 견제하면 되겠다 생각한 것이겠지. 과연 생각대로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말이야."

이변이 저 멀리 익태군 본대가 있는 방향을 보자, 마침 하늘 높이 날아오른 화살이 터지며 사방으로 붉은 불꽃을 날렸다.

"시작하게."

이변의 짧은 지시가 군관의 호령이 되고, 다시 태평소와 깃발 신호가 되어 전 함대로 퍼졌다.

장성 끝 위에 있던 오이라트 병사들은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일단 성가퀴 뒤로 몸을 숨겼지만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백린 화살은 막을 수 없었다.

"장성 끝으로 접근해라!"

그 지시에 판옥선 몇 척이 장성 끝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불붙은 백린이 쏟아져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몇몇 오이라트 병사가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성가퀴를 박살 내고도 포탄이 계속 날아갈 정도인 판옥선 함포의 상대는 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성 끝 위에는 박살 난 시체와 벽돌 조각만이 남게 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오이라트 기병들이 어떻게든 해보려고 다가왔지만, 머리 위에서 백린 화살과 불꽃 화살이 터지자 황급히 퇴각했다.

"석주중대는 상륙 준비하라!"

"예!"

석주중대원들이 탄 판옥선이 장성 끝을 향해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수면 위로 튀어나온 암초에 선저가 긁히며 와지직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덕에 속도가 적당히 줄어들어 장성 끝과 충돌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멈출 수 있었다.

"배 모는 솜씨가 마음에 드는군!"

"와하하! 고맙소! 엄호는 우리에게 맡기고 칼솜씨 좀 보여 주시오!"

"물론이오!"

판옥선 장대의 군관과 호탕한 대화를 주고받은 등자사는 계림도를 뽑아 들고 외쳤다.

"저놈들이 우리가 성벽 위로 올라오기 좋게 이렇게 단까지 쌓아 줬구나! 판을 깔아 줬으면 날뛰어 주는 게 예의지! 상륙 개시!"

시퍼런 계림도를 든 석주중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수군 병사들이 판옥선 갑판과 장성 끝 위에 걸치게 놓아준 널빤지를 밟고 성벽 위로 쇄도해 들어갔다.

저 멀리 산해관 쪽에서 치솟는 연기와 상륙 장면을 번갈아 보던 이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이기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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