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6화
276화
1450년 4월 초순 모일.
심요도. 심양성 관아.
양녕이 머무르던 방에 들어온 이징옥이 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말했다.
"저하, 아무래도 정말로 명나라 황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가지고 온 옥새야 제가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봐도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저하께서 물어보라고 하신 질문에는 정말로 저하께서 적어 주신 것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궁성 전각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써냈단 말이오?"
"예. 게다가 따라온 두 노인도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자진해서 보여 주겠다며 옷을 벗어 보였는데 정말로 둘 다 양물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양녕의 표정이 심란해졌다.
"그렇다면 둘 다 진짜로 환관이고 저 사내도 황제라고 봐야겠군. 이런……."
요동성에 정체 모를 이들이 나타난 것은 며칠 전이었다. 몽골 옷을 입은 일군의 사내들이 말을 타고 요동성 가까이에 모습을 드러내서 군사들이 잔뜩 긴장했지만, 곧 세 사람만을 내려놓고는 다들 재빨리 떠나갔다.
그 뒤 병사들이 정체를 확인하고자 그 셋에게 가까이 가자,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으니 빨리 이 성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만 했던 것이다.
"제 집무실로 들인 다음 제가 이 성을 지키는 장군이라는 얘기를 하자마자 자기가 황제라며 도와달라고 하기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정신이 좀 나간 몽골인인가 했는데 진짜일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소. 아무래도 에센이 황제가 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북원 세력들이 도와준 것 같긴 한데,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었소. 어찌해야 좋을지……."
양녕은 그대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토목보에서 황제가 붙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대한의 대응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친정 당시에도 요동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만 했고, 황하 이북을 되찾으러 병사를 모아서 보낼 때도 원군을 요청하지 않았으니 명분은 충분했었다.
'그저 가만히 있다가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면 그만이었는데, 갑자기 포로로 잡혔던 태상황제가 탈출해서 대한으로 오다니. 이렇게 되면 대한도 중원의 혼란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떤 선택을 하건 한 세력을 고르는 셈이 되니, 혹시라도 그 세력이 패배한다면 승리한 반대편과는 두고두고 척을 지게 된다.'
양녕의 심각한 표정을 살피던 이징옥이 물었다.
"저하. 폐하께서 심요도에서 급박한 일이 생기면 조정에 보고하기 전이라도 판단에 따라 어떤 대응이라도 할 수 있는 큰 권한을 저하께 주셨다고 하나, 그것은 할 수 있는 것이지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지금은 보통 급박한 상황이 아닙니다. 명나라의 황제가 요동성에 왔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기 전에 빨리 조정에 알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양녕이 살짝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그랬다가는 어떤 형태로라도 기록이 남고, 그러면 맨 마지막 수를 쓸 수가 없어지오."
"어떤 수를……. 아, 그렇군요."
양녕이 말한 맨 마지막 수가, 요동성에 찾아온 사내들의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죽여서 모든 것을 묻어 버리는 것임을 이해한 이징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그다음에 해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양녕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 *
잠시 후.
두 환관을 물려놓고 주기진 혼자서 기다리던 방에 들어간 양녕은 절을 한 번 하더니 일어나서 말했다.
"양녕공 이제라 합니다."
양녕의 소개에 주기진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공이었구려. 비록 처음 만나는 것이긴 하나, 내 윤 태감에게 공에 대해서 많이 들었소. 조금 전의 장군이 어딘가를 오가며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아무래도 윗사람이 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그게 공인 줄은 몰랐소이다."
"확인을 다 마친 다음에 오느라 뵙는 것이 늦었습니다."
"괜찮소. 누군지 확인도 안 되었는데 귀한 신분의 사람이 바로 만날 수는 없지. 오히려 이렇게 불쑥 찾아와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도 믿어주어서 고맙소. 그런 것보다도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어서 앉으시오."
"예, 폐하."
예상외로 신분이나 격식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 모습에 흥미를 느끼며 양녕이 의자에 앉자 주기진이 입을 열었다.
"공도 알겠지만 지금 명나라의 상황이 매우 급박하오. 내가 오이라트 놈들에게 잡힌 뒤로 경사까지 함락되었고, 황실과 조정은 남경으로 옮겨가 버렸소. 이대로는 명나라의 사직이 백척간두요. 그래서 말인데 조선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겠소?"
'남경으로 천도한 명나라 황실과 조정이 주기진을 태상황제로 올리고 그 아우를 황제로 즉위시켰다는 것과, 남쪽에서 올라오던 명나라 군대가 참패했다는 것. 둘 다 주기진에게 큰 압박이 되는 사실이니 강제로 양위를 받으려는 에센이 들려줬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 얘기는 빼놓고 하는군.'
그 사실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양녕이었지만 모르는 척 주기진에게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여진족의 소란을 진압할 때 조선의 강한 기병과 화포가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소. 어려운 부탁인 줄은 알지만, 그 강한 군사를 동원해서 오이라트 놈들을 중원에서 몰아내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소?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남쪽의 명나라 군대도 호응할 것이고, 백성들도 들고일어날 것이니 조선 혼자서만 싸워서 몰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오."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해 주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돌아온 양녕의 대답에 주기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무엇이오?"
"아마도 지금 처음 들으시겠지만, 두 달 전에 조선국의 주상께서 천명을 받으셨음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국명도 이제 조선이 아니라 대한이 되었습니다. 저도 양녕대군이 아니라 양녕공이 되었지요. 조금 전에 제가 소개할 때 별 반응이 없으셨던 걸 보면 저를 만난 것에 매우 놀라서 그 부분을 놓치셨던 모양입니다. 아,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대한이 명나라의 천명을 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한의 주상께서는 그저 삼한의 천명을 받은 삼한의 천자일 뿐이시니까요."
갑작스러운 얘기에 당황했던 주기진은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각 나라에는 저마다의 천하가 있고, 그 천명을 받은 천자가 있다……. 야르하치가 금나라를 세우며 했고, 에센도 내게 했던 그 얘기로군."
"이미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태연한 양녕의 대답에 주기진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조선이 천자국임을 승인해 달라는 것이오?"
"하하하! 승인이라니요. 천명을 받은 천자의 즉위가 다른 누군가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입니까? 그저 명나라의 황제로서 그 사실을 받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말하는 양녕의 말에 조금 표정이 흐려진 주기진이었지만 일단은 끝까지 듣기로 했다.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하길 바라는 것이오?"
"폐하께서 가져오신 옥새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천자신보요."
"다른 나라에 보내는 서신에 찍는 옥새로군요. 마침 잘 되었습니다. 장성 이남의 천하인 중원을 다스리는 명나라의 황제로서, 산해관 동쪽 천하인 삼한을 다스리는 대한의 황제에게 군사력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쓰고, 거기에 천자신보를 찍어 주십시오. 아마 대등한 군주에게는 처음 써 보시는 것이라 헷갈리실 테니, 내용은 제가 불러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역시 그 발상 자체가 익숙하지 않으시군요. 저마다의 천명을 받은 황제들이니 당연히 대등한 관계이고, 그러면 대등한 대상에게 보내는 양식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제가 폐하께 존칭을 써서 헷갈리셨습니까? 저는 그저 한 나라의 신하로서 타국의 군주께 존칭을 쓰는 것일 뿐이지, 제후국의 황자로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각 나라마다의 천하와 그 천명을 받은 천자라는 개념을 이해한 주기진이 탄식하듯 말했다.
"과연 그런 뜻인가. 명나라의 황제로서 대한의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저마다의 천하를 다스리는 대등한 천자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동시에 각 천하가 서로 독립되어있음도 받아들이는 셈이 되겠지. 또 조금 전에 산해관 동쪽의 천하라 한 것은 산해관 바깥에서 요하 서쪽까지의 땅도 대한의 영토로 넘겨달라는 뜻일 것이고 말이오."
"정확합니다."
"하지만 명나라가 중원의 천명을 주장하는 데에 조선이라는 번국의 존재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오. 조선이 이전부터도 천자국의 제도를 여럿 쓰던 것을 묵인해 주던 것도 그것 때문이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안남국처럼 안에서는 황제를 칭하되 밖으로 명나라를 대할 때는 번국을 자처하겠다는 것이라면 몰라도, 아예 공식적으로 천자로 인정해달라는 제안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소."
"폐하."
양녕은 입은 온화하게 미소 짓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차가운 표정으로, 주기진을 정면으로 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제안이 아닙니다."
위압감과 긴장감에 주기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보며 양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경사에서도, 남경에서도 다들 폐하의 소재를 알고 싶어 하고 또 모셔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요. 그 사실을 통촉하셔야 합니다."
주기진은 양녕의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대한이 주기진과 천자신보를 에센에 넘긴다면 이번에야말로 강압적으로 양위를 받아 낼 수 있다. 만약 명나라 조정에 넘긴다면 에센이 양위 받았다는 게 거짓임을 밝혀내 그 명분을 꺾고, 에센이 주기진의 칙명을 이용해 황하 이북의 군대를 통제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어디에 넘겨지건 주기진의 처우가 좋을 리가 없으니, 그렇게 되기 싫으면 얌전히 대한의 말을 들으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공이 말한 대로 서신을 쓰면 내가 안전하게 경사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오?"
"제 말씀을 이해하신 모양이군요. 맞습니다. 서신을 쓰신다면 그 효과를 보기 위해서 대한은 반드시 폐하를 복위시켜드려야 합니다. 천자가 천자에게 도와달라고 보낸 서신을 받아 놓고도 무시하거나 심지어 배신하기라도 한다면, 천자로서 받은 내용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니 천자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는 트집이 잡힐 테니까요."
양녕의 말을 듣고 한참 고민하던 주기진이 말했다.
"더 요구하는 조건은 없소?"
"예. 천자와 천자로서 도움을 청하고 또 들어주어서 서로 인정했음을 천하에 보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데, 거기에 다른 조건을 더 집어넣으면 그건 인정이 아니라 거래가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아, 대신 하나 해 주셔야 하는 건 있습니다. 이건 폐하를 위해서라도 하셔야 합니다."
"무엇이오?"
"폐하의 정체를 숨기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경사를 탈환하러 가신다는 게 새어 나간다면 오이라트는 물론이고 명나라에서도 폐하를 노릴지 모릅니다."
순간 주기진의 얼굴에 두려움이 스쳤다.
"그래서는 안 되지. 어떻게 숨기면 좋겠소?"
"갑자기 찾아온 이가 높은 사람을 직접 만나자고 하는 것을 여러 병사가 보았으니 아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밀명을 가져온 측근이라고 한다면 높은 사람을 직접 만난 것도, 다른 이들을 피하는 것도, 경사로 향하는 군대에 따라가는 것도 당연해 보일 것입니다."
"알겠소. 지금부터 경사를 탈환할 때까지 나는 황제의 측근인 백 아무개로 행세하겠소. 지필연묵을 가져오시오. 서신을 써 주겠소."
약간의 체념과 각오가 담긴 주기진의 그 말에, 양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백공. 그럼 서신이 다 작성되는 대로 한성부에 군사를 요청하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