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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5화 (27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5화

275화

사다츠네는 분노에 차 외쳤다.

"그럴싸한 주장일 뿐이지 확실한 근거도 없는 소리다! 그런 걸 누가 믿겠느냐!"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도 없기는 매한가지 아니냐? 주장할 만한 그럴싸한 근거만 있으면 충분해. 그래, 오행에 따르면 금생수라고 하니 너희 김씨에 이어서 미나모토[源]가 일어섰다는 것도 그럴싸하지 않느냐?"

"그럴싸한 근거만 있는 주장을 누가 믿느냐?"

"근거가 있어서 믿을 주장이 아니라 필요가 있어서 믿을 주장이다. 내 편도, 내 적들도 말이지."

"무슨 말이지?"

타카모치가 씨익 웃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미나모토가 아무리 신의 혈통으로 여겨지는 미카도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라고 해도 그 취급은 인간이다. 미카도의 자리가 신의 옥좌라면 인간인 내가 앉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 하지만 미카도의 자리가 알고 보니 인간의 옥좌였다면 괜찮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이 주장이 맞다 할 것이고, 내 자리를 노리는 자들은 나를 끌어내린 다음 옥좌를 너희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기가 앉기 위해서 이 주장이 맞다 할 것이다. 놈들도 결국 인간일 테니까 말이야."

"끌어내려지지 않을 자신이 있나 보군."

"당연하지. 물론 너희가 신에서 인간이 되면 거기서 갈라져 나온 우리의 위신도 다소 떨어지겠지만, 잃는 위신보다 얻는 권력이 더 클 것이라는 계산도 끝마쳤다. 대한 조정에서도 미카도의 혈통은 김씨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정해 주기로 했고 말이야."

"하! 일본이 가야의 방계가 세운 나라라면 가야를 이은 조선에 일본 땅을 노릴 명분이 생기는데, 그런 주장을 알아서 해주니 당연히 냉큼 인정해주겠지. 그 계산은 못 했느냐?"

"내가 너처럼 멍청한 줄 아느냐? 이미 거래를 끝냈다."

거래라는 말에 표정이 흔들린 사다츠네를 향해 타카모치가 말을 이었다.

"가야와 같은 혈통이 세운 나라라고 하지만 방계이지 직계가 아니며, 갈라진 지 오래되었고 그 백성들도 스스로 삼한에 속한다는 생각이 없으니 대한에는 대화국에 대한 어떤 명분도 없다는 인정을 받았다. 대신 우리는 큐슈가 확실히 조선의 땅임을 인정해 주었지. 물론 이런 걸 대놓고 남길 수는 없으니, 거래는 비밀리에 했고, 인정했다는 내용도 오가는 문서 내용 속에 교묘하게 숨겨서 했지만 말이야."

"빼앗긴 땅을 찾아와도 모자랄 판에 조선에 팔아넘겼단 말이냐!"

"하하하! 말하면서도 이상한 걸 못 느꼈느냐? 빼앗겨서 이미 저쪽에 넘어간 걸 무슨 수로 파느냐? 어차피 찾아올 가망도 없던 걸 인정해 주고 실리를 챙긴 것이지. 그리고 애초에 대한에 큐슈를 빼앗긴 건 너의 나라였던 일본인데, 그걸 내 나라인 대화국이 왜 찾아와야 하느냐? 혹시 미카도가 아니라 쇼군의 잘못으로 빼앗긴 것이라고 대꾸할 거라면 하지 마라. 군주가 신하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땅도 잃었다는 건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니니까."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던 사다츠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실리를 얻었는지나 들어보자. 일본의 백성들에게 이득이 된다면 못 받아들일 것도 없으니."

"종묘와 사직의 건축과 제사, 관복의 제도 같은 것들을 받아왔고, 궁궐의 구조와 배치도 알아 왔다. 미야코의 첫 다이리가 오래전 불타버린 뒤 임시로 옮겼던 동쪽의 이궁에 그대로 정착한 게 지금의 다이리지 않느냐. 이궁이었던 탓에 너무 좁아서 제대로 위엄이 서지 않는데, 그렇다고 옛 다이리를 다시 짓고 거기로 가자니 너무 크고 사치스러운 궁궐이라 백성들만 힘들게 할 뿐이다."

"옛터를 그대로 쓰되 규모만 줄여서 지으면 되지. 그냥 네가 세운 나라가 일본이 이어진 것처럼 보이기 싫은 것이라고 솔직히 말해라."

사다츠네의 말을 무시하고 타카모치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서쪽에는 격식을 차려 지은 통치용 궁궐, 동쪽에는 지내기 좋게 지은 거주용 궁궐을 두는 대한의 방식을 참고하기로 했다. 통치용 궁궐은 지금의 다이리를 쓰면 될 것이니, 동쪽에 새로 거주용 궁궐만 지으면 되겠지. 그 터에 이미 살던 이들에게는 옛 다이리 터를 내어줄 것이다. 그래, 이왕 종묘와 사직을 대한의 방식으로 짓는 김에 거주용 궁궐도 대한의 방식으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타카모치의 말이 끝나자 사다츠네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이 나라의 정신마저 무너뜨리고 있구나. 이대로라면 그나마 황통이 이어지고 있는 남조 놈들이 차라리 더 정통성과 명분이 있겠어."

"별걱정을 다 하는군. 듣자 하니 놈들은 제대로 된 땅도 얻지 못해 갈대밭을 개간해 도읍을 정했고, 북쪽으로는 에미시들에게 땅을 빼앗겼다고 한다. 그런 놈들이 조선의 도움까지 받는 우리를 어떻게 위협하느냐? 그 잘난 정통성하고 명분이나 끌어안고 살라지. 아, 오히려 위협해 주면 더 좋겠군. 외부의 위협이 있으면 내부를 결속하고 권력을 확고히하기 좋은 법이니 말이야."

"언젠가 너에게 신벌이 내릴 것이다."

"그 신벌이라는 건 왜 바로바로 안 내리고 꼭 그 언젠가가 되어야 내린다는 것이냐? 아, 혹시 조만간 신기를 상자에서 꺼내어 실물을 확인해 볼 것인데 그때 내리려고 아껴두는지도 모르겠구나."

조롱하듯 던진 그 말에 사다츠네가 기겁하며 말했다.

"신기를 상자에서 꺼내다니, 해마다 지내는 제사는 물론이고 즉위식이나 다이죠카이 때에도 감히 하지 않는 짓이다. 만일 그런 짓을 한다면 신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역시 가둬놨더니 바깥일을 잘 모르는군. 신관들도 모두 동의한 일이다. 오히려 찬성하고 나선 이들도 많아."

"그게 무슨……."

"내게 저항하는 사당들은 물론이고, 나의 즉위나 대화국의 존재에 방해가 되는 사당들도 많은데 그것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않느냐? 그렇다고 전부 헐어 버릴 수도 없어서, 우선 각 사당의 신관 가문 안에서 권력을 잡지 못한 이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괴력난신이라는 이유로 기존의 제사를 폐지하고 거기 반발하는 신관들을 투옥한 다음, 그 빈자리에 내 편으로 끌어들인 이들을 새롭게 앉혔지. 지금은 사당마다 괴력난신의 흔적을 지우고 예법에 맞는 제사를 예법에 맞는 대상에게 지내려고 연구 중일 정도인데, 나에게 찬성하지 않는 신관이 어디 있겠느냐?"

"너에게 저항하고 네놈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사당이라면 황조의 여러 신들을 모신 사당인 것 아니냐. 네놈이 감히 황조를 괴력난신이라 하느냐!"

타카모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대로 된 나라도 없던 시절에 돌의 힘으로 애가 나오지 않게 하고 바다를 건너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떠받드는 것이 괴력난신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 권력을 떠나서 이게 옳은 일이다. 신기를 꺼내 보는 것도 마찬가지야. 그런 일을 하더라도 신벌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서 괴력난신의 싹을 모조리 뽑을 것이다. 물론 그 신기들이 정확히 어디서 왔는지 확실히 알아내서 너희가 신의 혈통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목적도 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내 생각으로는 옛 삼한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정확하게는 가야에서 말이야."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들이다. 대체 나에게 찾아와서 굳이 이런 것들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에게 권력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너에게 미카도의 자리도 넘겨주었고, 나에게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대체 왜?"

"나는 나에게 칼을 겨눈 놈들은 모조리 죽여 왔다."

비웃음을 거두고 싸늘한 표정이 된 타카모치가 허리춤에 찬 계림도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사다츠네가 바짝 얼어붙었다. 차마 시선을 돌리지도 못하고 굳어 버린 사다츠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타카모치가 말을 이었다.

"너 역시 나를 죽이려 했으니 베어 죽여 마땅하지만 그랬다가는 내 명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날붙이 대신 알기 싫은 사실로, 너의 육신 대신 정신을 난도질하러 온 것이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오늘 말해 준 사실들이 제법 예리했던 모양이군.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전해주러 오마. 잘 지내고 있어아. 내 허락 없이 멋대로 죽을 생각은 포기하고."

할 말만 마치고 발길을 돌려 떠나가는 타카모치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사다츠네는 다다미 위에 쓰러지듯 엎드려 오열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내세라는 것이 있다면 내 다시는 미카도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 * *

1450년 3월 하순 모일.

경사 동북쪽 모처.

장성에 인접한 작은 마을의 어느 허름한 집에는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불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던 사내는 문득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문으로 다가가 작게 물었다.

"누구요?"

"장비현 무비촌 사는 백공을 모시고 온 사람이오."

그 대답에 망설임 없이 문을 연 사내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청년과 그 좌우에 선 수염 없는 노인에게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이윽고 세 남자가 집으로 들어오고, 청년이 의자에 앉자 사내는 큰 절을 올리며 말했다.

"무사히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폐하. 추격은 없었습니까?"

사내에게 폐하라 불린 청년의 정체는 바로 명나라의 황제 주기진이었고 좌우의 노인은 환관이었다.

조금 전 누구냐는 질문에 환관이 대답했던 것은 접선을 위한 암호였는데, 우주의 중심이자 황제를 상징하는 별자리인 자미원의 자미 두 글자를 각각 반절로 표기한 장비와 무비를 고을 이름으로 삼고, 황제[皇]가 군왕[王]임을 숨겼다 하여 백(白)씨라 하였으니, 곧 궁성에서 황제를 모시고 왔다는 뜻이었다.

"그렇네. 애초에 내가 내 집 구조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위기의 상황에 탈출하려고 만든 통로가 있을 거라는 당연한 생각을 못 했는지는 몰라도 나를 궁성에 그냥 가둬 두고 가끔만 확인하러 오던 놈들이야. 추격은 고사하고 내가 탈출한 것도 모르고 있을 걸세. 그리고 혹시 몰라서 나와 체구가 비슷한 환관 하나가 나처럼 꾸미고 자는 척을 하고 있기로 했네."

"다행입니다. 날이 밝기 전까지는 괜찮겠군요."

사내의 말에 주기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기는. 내가 탈출했다는 게 발각되고 나면 그 환관은 특히나 고초를 겪지 않겠는가."

"그 아이가 자원한 일입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폐하."

옆에 서 있던 환관의 말에 작게 끄덕인 주기진이 다시 사내에게 물었다.

"이제 여기서 어디로 갈 것인가?"

"이대로 동북쪽으로 더 가서 장성을 넘을 것입니다. 에센의 권력이 더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부족들이 거기서 몰래 기다리고 있다가 도와주기로 했으니, 거기서부터는 일사천리일 것입니다."

"내 살다 달단의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건 잘 숨겨야겠어."

품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주기진에게 사내가 물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옥새, 정확하게는 천자신보라네."

"옥새는 놈들에게 빼앗기신 것 아니었습니까?"

"병부좌시랑(우겸) 덕분일세. 지난 친정 때 천자신보와 황제신보를 둘 다 가지고 갔었는데, 토목보에서 붙잡혔을 때 좌시랑이 기지를 발휘해서 당시 내가 지니고 있던 황제신보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옥새인 것처럼 소란을 피웠네. 덕분에 놈들에게는 황제신보 하나만 빼앗겼지. 정말로 다행이야. 아무리 용포를 챙겨왔다지만, 옥새가 없다면 내가 황제라는 것을 증명하기 힘들 것 아닌가. 아, 내 곁에 이리도 충신이 많았는데 나는……."

주기진이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흐리자 사내가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말했다.

"폐하. 지나간 일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옵고, 지금은 그저 날이 밝기 전에 장성을 넘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조선에 도착해서 동방의 충신인 조선 국왕에게 도움을 청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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