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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4화 (27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4화

274화

1450년 2월 하순 모일.

한성부. 기로소.

"축하하오, 영상. 드디어 사직을 윤허 받으셨구려."

양녕의 말에 황희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두 달 남았습니다. 제 다음 영의정으로는 지금의 좌상이 임명될 것이니, 그 두 달 동안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자리에서 내려와야지요. 그리고 저야말로 축하드립니다, 저하."

"고맙소. 영상에게 그리 불리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구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래 살다 보니 다시 저하라고 부르는 때가 오는군요."

이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기존의 많은 제도도 천자국에 맞게 바뀌었다. 우선 대군, 부원군, 군 등의 군호가 다시 공, 후, 백으로 환원되었고, 그에 따라 양녕대군이라는 군호도 양녕공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정에서 하도 많은 논의가 오간 탓에, 자칫하면 다르게 불릴 뻔하기도 했지만 말이오."

삼한의 국가 가운데 공식적으로 황제국을 선포한 것은 대한이 처음인 탓에, 종친의 제도를 두고도 온갖 의견이 많았다.

그중 무엇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른 것이 왕작의 시행 여부였다.

중국에서 천자의 칭호가 황제가 된 이래로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태자를 제외한 황자들은 왕으로 봉해지는 것이 관례였으니, 대한 역시 황자를 왕으로 봉해야 위엄이 설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던 것이다.

반면 반대하는 측에서는 천자국이었던 고려는 왕자들을 가리켜 여러 왕이라 할지언정 왕작 자체는 쓰지 않았으니 그것을 계승한 조선에서도 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결국 중국의 전례보다는 삼한의 전례가 우선이라는 이유로 반대 측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그러게 말입니다. 물론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라지만, 저하께 전하라고 불렀다면 기분이 묘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봉작된 이들의 경칭은 중국은 물론이고 고려의 전례와도 달랐다. 고려의 전례를 따른다면 태자와 왕자들 모두 전하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신하로서 봉작된 이들 가운데 공작과 후작은 저하, 백작은 각하로 불려야 했다.

하지만 역시 기나긴 논의 끝에 대한에서는 태자만이 전하라는 경칭으로 불릴 수 있고, 황자들은 저하, 봉작된 신하는 전부 각하라는 경칭을 쓰게 되었다.

조금 전 황희로부터 양녕이 저하로 불리게 된 것이 그 때문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중국이나 고려와는 다른 조선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 삼한에서 왕을 군주의 칭호로 쓴 지 2천 년이 넘었으니,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조선으로서는 왕을 작위로 내려준다는 것이 꼭 나라가 갈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어 꺼릴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나라는 태자와 그 형제들을 같은 서열로 생각해 경칭도 같았지만, 조선에서는 아무리 형제들이라도 장차 왕이 될 세자와 격이 같을 수 없다 하여 세자만이 저하라는 경칭으로 불릴 수 있었다. 조선이 대한이 되었다고 이런 인식이 달라질 리가 없으니 당연한 귀결인 셈이지.'

"뭐, 전례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니, 참고로 하되 더 좋게 바꾸어 적용하고 그것이 또 새로운 전례가 되고 하는 법 아니겠소. 육조와 판서가 육부와 상서로 되돌아왔지만, 의정부는 상서성이 아니라 의정성이 된 것처럼 말이오. 음?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먼저 일어나봐야겠소."

기로소 담장 너머로 시계각을 본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희가 물었다.

"저하께서는 여전히 바쁘신가 봅니다."

"그렇소. 아무래도 심요도 일대의 정세가 걱정되어서, 주상께 말씀드려서 내가 직접 가 있기로 했소."

"또 멀리 가시는군요. 무사히 잘 다녀오십시오."

"고맙소. 그럼 이만."

바쁜 걸음으로 기로소를 나가는, 폐세자되던 당시의 황희 자신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버린 양녕의 뒷모습을 보는 황희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1450년 3월 초순 모일.

미야코. 무로마치 어소.

타카모치의 압박에 못이겨 결국 미카도의 자리를 선양한 이후로 사다츠네는 이곳 무로마치 어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아무리 선양하고 다이리를 떠났다지만 미카도였던 자가 여염에서 지내게 할 수 없다며 타카모치가 자신의 저택을 준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이리에서 길 하나만을 두고 떨어진 곳에 유폐해 두고 감시하려는 목적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오?"

다다미 위에 앉은 채 올려다보며 묻는 사다츠네의 말에 타카모치는 선 채로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도 알려 줄까 하고 왔소."

"무엇이오?"

"조선이 마침내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세우고, 국명도 대한으로 바꾸었소."

"그게 우리와 관계가 있소?"

"있고말고. 원래는 작년에 조공을 바치고 2년 뒤에 또 바치기로 했소. 너무 자주 찾아가면 우리가 천자국을 칭한다는 걸 들춰 내서 조공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니 말이오. 하지만 마침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 축하한다는 의미로 또 조공을 보낼 것이오. 물론 작년에 조공을 바치면서 나를 왕으로 칭하고 조선의 군주를 황제라 칭했으니, 지금 와서 황제 즉위를 축하한다고 할 수는 없소. 대신 국명을 새롭게 하고 연호를 반포한 것을 축하한다고 해야겠지."

"어찌 천자인 미카도가 다른 나라의 황제에게 머리를 숙이고 조공을 바친단 말이오! 그러려고 내 자리를 가져간 것이오?"

사다츠네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지만 타카모치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웃기는군. 천자는 무슨. 종묘와 사직의 제도는 물론이고, 연호를 바꾸고 적용하는 예법조차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 일본이오. 황제를 칭하며 자식들에게 왕작을 내리면 다 천자국인 줄 아시오? 자신을 높일 줄만 아는 게 아니라,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다른 군주에게 몸을 낮출 줄도 알아야 천자인 것이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고유한 제도와 예법인 것이오. 그런데 어찌 오래 이어온 것들을 쉽게 없애고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갈아치운단 말이오!"

그 말에 타카모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밖에서 들어온 것으로 갈아치운다고 하였소? 황제의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내리는 것을 일본이 만들고 한나라가 배워간 것이오? 2관 8성의 관청을 두는 것을 당나라가 일본에서 배워가서 3성과 6부를 둔 것이오? 주나라가 다이죠카이를 보고 상제를 지내기 시작했단 말이오? 아, 혹시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아서 먹던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오?"

사다츠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타카모치가 즐거운 듯 말을 이었다.

"일본의 수많은 제도는 중국과 삼한에서 건너온 것이오. 애초에 밖에서 들어온 것들인데 시간이 지나 낡아 버렸으니, 새롭고 좋은 것을 다시 들여오려는 것뿐이지. 이번만 해도 작년에 조선에서 들여온 책들이 아주 유익했소."

"책들이라니?"

"조공을 바치러 간 사절들이 사서를 요청하자 대한의 황제가 기꺼이 여러 부를 내어주었소. 그것들을 가져와 일본의 사서와 비교해 보았는데, 일본서기는 사서라고 부르기 창피할 정도로 내용이 엉망이더군. 특히 역사가 오래된 것처럼 보이려고 연대를 끌어올린 게 너무나도 티가 나서, 보고를 받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소. 애초에 일본서기를 편찬한 시점은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한 지 오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니, 그 앞의 역사까지 묶어 일본서기라고 한 것도 우스운 일이지. 물론 왕통은 그 전부터 이어왔다지만, 제대로 믿을 만한 부분만 추려내면 일본의 역사라고 부를 것은 역시 일부에 불과하오."

타카모치의 어조에서 무언가 느낀 사다츠네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추려내다니. 대체 뭘 하려는 것이오?"

"옛 나라가 무저지고 새 나라가 섰으니, 당연히 무너진 나라의 사서를 편찬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대한의 제도를 본떠서 사서를 편찬할 임시 관청도 세웠소. 거기서 자료를 모으고, 틀리거나 고의로 왜곡한 것을 추려내고, 수많은 것들을 검증해서 밝혀내고, 그것들을 토대로 사실만이 명확하게 드러난 사서를 남길 것이오. 신이 물방울로 땅을 만들고, 옥을 씹어 다른 신들을 만들고, 자기 자식을 내려보내면서 저 땅 전부가 영원히 너와 후손의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는 모조리 치워 버리고 말이외다."

"네 이놈!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고 하는 소리냐! 그따위 짓을 했다가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통성이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란 말이다!"

사다츠네의 분노와 공포가 섞인 외침에 타카모치는 낄낄 웃더니 말했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고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말한 바로 그 결과를 불러오려고 하는 일이다. 일본에서 천명이 바뀌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기존 천명을 뿌리부터 뽑아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일본이 신들이 지키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세운 나라이고, 세상의 수많은 나라가 그러하듯 무너져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설령 일본서기의 앞부분이 부정되더라도 일본은 800년 가까이 이어온 나라다! 그 긴 역사가 쉽게 무너질 것 같으냐!"

"오래 이어왔다고 안 무너진다면, 천년 가까이 이어온 신라는 왜 무너진 뒤로 다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느냐?"

말문이 막힌 사다츠네를 보며 타카모치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뽑아낼 천명의 뿌리는 사서에만 있는 게 아니야. 너희도 포함이다. 일본이 사람이 세운 나라라면 그 후손인 너희도 당연히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당연히 성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신들은 성씨를 쓰지 않기에, 그 혈통을 이은 미카도와 그 자손들은 성씨를 쓰지 않는다! 오로지 미카도의 다스림을 받는 이들이 성씨를 하사받아 쓸 뿐이야!"

"내가 말한 걸 듣긴 한 거냐? 너희가 신의 혈통이 아니고 일본은 신이 만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일이니까 당연하지. 애초에 그런 이상한 법도는 일본에만 있을뿐더러, 설령 그 법도를 따르더라도 이제 내가 미카도고 너희가 신하니 내가 성씨를 내려주는 게 맞지 않겠느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만든 게 아니라 찾은 성씨이고, 그 유서도 깊으니까 나름의 권위는 있을 것이야."

"우리의 성씨를 찾았다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조선에서 받아온 서적 가운데 삼국유사라는 책이 있었다. 일본으로 치면 고사기에 해당하는 책인데 거기에 재밌는 내용이 있더군. 구지봉이라는 봉우리에 황금알의 모습으로 내려온 천인이 가락국, 그러니까 가야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고사기에 이르기를 니니기는 아마테라스의 손자라 했으니 태양, 곧 황금알이라 할 수 있고, 내려온 산의 이름은 쿠지후루니 구지와 그 음이 통하지. 그리고 니니기는 자신이 내려온 곳을 둘러보더니 이 땅은 가락국을 향한 매우 좋은 땅이라고 했다고 한다. 마치 고향이 보여서 좋다는 것처럼 말이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짐작한 사다츠네가 덜덜 떨며 말했다.

"너, 너 설마……."

"벌써 알았나? 그래. 너희는 김씨가 될 것이다. 아니, 김씨라는 것이 밝혀지게 될 거라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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