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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3화 (27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3화

273화

1450년 1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강남에서 소집된 명나라 군대가 황하를 넘었지만, 오이라트 군대의 공격을 받아 위휘 일대에서 몰살되었다고 합니다."

"위휘면 황하 바로 북쪽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한 것이겠소."

심각한 표정을 한 이도의 말에, 예조판서 김종서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명나라 군대가 황하 너머로 척후를 먼저 확인할 것을 예상하고 황하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한참을 살펴도 오이라트 군대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으니 척후는 돌아가서 적들이 황하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전했을 것이고, 안심한 명나라 군대가 황하를 건너자 그 기동성을 살려 단숨에 접근했겠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데다가 이미 황하를 건너버려 뒤가 막혀있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고."

작게 한숨을 쉰 이도가 이어서 말했다.

"남경에서 온 서신에 곧 소집한 병사들을 이끌고 경사를 되찾으러 간다는 내용이 자신만만하게 쓰여 있어서 명나라가 무난하게 이기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다니. 이럴 거면 우리에게 원군이라도 요청했어야 하는 것 아니오?"

"오이라트 군대는 기병이 강한데 강남의 병사들은 보병이 대다수니, 예로부터 강하기로 정평이 난 삼한의 기병을 원군으로 부르려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당장 금나라와 싸울 때에도 회경군이 큰 활약을 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조선을 원군으로 쓰려면 조선이 요하를 넘는 것은 물론이고 산해관까지 통과하게 해 주어야 하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던 것 아닐까 합니다."

"답답하기는……. 그래도 요청을 받으면 원군을 안 보낼 수가 없는데, 또 명나라 군대의 졸전을 보면 괜히 원군으로 가 봤자 이기지도 못하고 우리 병사들만 상했을 것이 분명하니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군. 그건 그렇다 치고, 위휘 말고 다른 곳은 어떻다 하오?"

"연주 일대에서도 전투가 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번 내용 자체가 거리가 먼 위휘 쪽에서 들어온 것이고, 이 내용을 가지고 출발하던 시점에서는 아직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탓에 정확한 위치나 승패는 불확실합니다."

그 말에 이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위치나 승패까지 갈 것도 없소. 연주면 산동 남부고 북직례와 면한 곳이니, 거기서 전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오이라트 군대가 이미 산동 일대까지 진출했다는 말이지 않소. 대체 어떻게?"

"아무래도 황제를 사로잡은 것이 큰듯합니다. 황제는 에센에게 사로잡혀있을 뿐만 아니라, 모후가 아우를 황제로 즉위시키고 자신을 태상황제로 올리더니, 조정 전체가 자신을 두고 남경으로 옮겨간 상황입니다. 이대로는 설령 오이라트가 장성 이북으로 쫓겨나고 에센에게서 풀려나더라도 조정에 자기편이 하나도 없어 위험할 수 있지요. 그러니 백성들만이라도 자기편으로 만들려면 끊임없이 황제로서의 권한을 행사해 자신이 진정한 명나라의 황제라는 것을 계속 보여야 하고, 결국 에센의 뜻대로 칙명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에센의 뜻대로 내리는 것이 뻔하다고 해도 칙명은 칙명이고, 자신들을 버려두고 남경으로 달아난 조정에 대한 반감도 있고, 오이라트 군대가 두렵기도 하니, 칙명을 따라 오이라트 군대에 협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산동 일대를 확보하면서도 전력을 온존한 것은 물론 보급까지 충분할 것이니, 연주 쪽 전투에서도 오이라트 군대가 이길 공산이 크겠군."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하나는 에센을 도와서 칙명을 내리고, 하나는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우리가 되놈을 통해서 소식을 듣게 만드니, 명나라에 황제가 둘이라지만 둘을 합쳐도 황제 구실은 반도 못 하는 구먼."

이도가 분노와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내뱉은 독설처럼 지금의 정세는 명나라가 아니라 금나라를 통해서, 그것도 거의 석 달 만에 조선에 전달된 것이었다. 그나마도 금나라 역시 북원 세력을 통해서 알아낸 것인지라 한참 전의 소식인 데다가 내용도 많이 부족했다.

"그래도 미리 국경의 수비를 강화해두어서 지금 다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으니 실로 네 혜안이 밝은 덕분이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 보느냐?"

이도의 질문을 받은 이향은 사정전 중앙에 펼쳐놓은 명나라 지도를 잠시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위휘에서 황하를 남쪽으로 건너면 바로 개봉입니다. 사방이 평야이고 북으로는 황하가 흐르는 요해처이니, 오이라트는 빼앗으려고 하고 명나라는 지키려고 하면서 위휘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겠지요. 그 전투에서 오이라트가 이겼으니 이미 황하를 건너 개봉을 함락시켰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황하 이남의 수많은 고을은 물론이고 남경까지도 위험해진 것 아니냐?"

"예. 하지만 에센은 남경을 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에센이 중원의 황제 자리를 노리면서 남경을 노리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의아해하는 이도는 물론이고 양녕과 중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이향이 설명을 시작했다.

"금나라에 소식을 전해줄 북원 세력이라면 본심을 숨기고 에센과 친하게 지내는 이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위휘에서 소식을 보냈다는 것은 에센이 위휘에서 군대를 이끌었다는 것이겠지요. 오히려 남경에 더 가까운 연주 일대가 우선순위에서 밀린 셈입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네가 말한 것처럼 개봉은 그 중요성이 남다르니 직접 갔을 수도 있지 않느냐? 원나라도 개봉을 거점 삼아 남송을 공격하지 않았느냐."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센이 그렇게 몽골의 옛 사례를 참고할 줄 안다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도 알 것입니다. 강남은 그 인구와 물산의 풍족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산지가 많아 방어에 유리합니다. 그렇기에 그 옛날 금나라는 화북을 손에 넣었음에도 오히려 화남으로 밀려난 남송에 의지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으며, 원나라조차 온 세상을 손에 넣었음에도 남송을 멸망시키는 데에 4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센은 온 세상은 고사하고 화북조차 황제의 권위에 의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설명을 듣던 양녕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동궁께서는 에센이 남경을 비롯한 강남 전체를 얻을 생각이 없다고 보시는 게로군요."

"그렇습니다. 원나라는 그 긴 전쟁 끝에 남송을 멸망시켰지만 강남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강남인들의 손에 초원으로 밀려났습니다. 에센으로선 버거울 뿐만 아니라 이미 한 번 실패한 적 있는 일을 시도할 이유가 없지요."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계륵과도 같은 화남을 포기하고, 대신 화북을 확실히 얻으려는 것이겠군요. 화북과 화남을 가르는 경계인 회하야말로 검증된 국경이니 말입니다."

"예. 회하는 남쪽으로는 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너른 평야가 있으며, 물살이 빠른 것은 물론이고 하류에 이르러서는 황하와 합류해 바다로 나갑니다. 기병이 주력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해자와도 같지요."

"회하가 목표라면 모든 것이 설명됩니다. 하류에서는 황하와 회하가 합류하는 곳이 산동의 바로 남쪽일 뿐만 아니라, 두 큰 강이 가까이 흐르다 합류하기까지 해서 얻는 것과 지키는 것 둘 다 크게 어렵지 않으니 거기로는 다른 이를 보내도 됩니다. 하지만 상류에서는 황하와 회하 사이에 넓은 평야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하는 황하만큼 넘기 어려운 강이 아닌 탓에 얻고 지키는 것 둘 다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에센이 직접 간 것이겠지요."

양녕과 이향의 대화가 끝나고 중국이 화북과 화남으로 양분되는 일이 현실적으로 다가오자, 사정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와중에도 이상하리만치 평정을 유지한 얼굴로 영의정 황희가 말했다.

"신 영의정 황희 아뢰옵니다. 비록 에센이 회하까지 이르러 화북을 모두 얻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경사 일대의 넓은 땅을 손에 넣고 황제를 칭하리라는 것은 명확해졌습니다. 명나라의 천명이 기울어진 것입니다."

"그리 보아야 할 것이오."

그 어조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로 좌중을 집중시키며 황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전 주나라가 기울자 연나라의 역왕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그러자 그때의 조선후도 왕을 칭하였습니다. 그런데 실로 세상의 일이란 돌고 도는 것인지, 주나라처럼 화덕으로 세워진 명나라가 기울자 연나라의 땅이었던 경사를 차지한 에센이 황제를 칭하려 합니다. 이런 때를 맞이한 삼한의 나라 이름이 또다시 조선인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짧은 침묵을 두고 황희가 말을 이었다.

"동쪽의 오랑캐가 삼한을 섬기어 조공을 바치고자 하며, 교사체상이 모두 갖추어졌고 의복도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구헌과 팔일의 예를 행하시고, 연호를 세우고 황제로 즉위하시어 하늘의 남은 뜻을 따르시옵소서."

그 발언이 불러온 전율과 충격 속에서 중신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신 좌의정 하연 아뢰옵니다. 이미 전조 고려에서 연호를 세우고 구헌과 팔일의 예를 행한 바 있습니다. 우리 조선은 태조대왕께서 고려의 왕위를 받으시며 열린 나라이니, 이는 없던 것을 행하는 게 아니라 멈추었던 것을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 이조판서 최만리 아뢰옵니다. 조선후가 왕을 칭한 것은 위만의 찬탈이 있기 전으로 기자의 혈통과 그 교화한 풍토가 이어져 오던 때이니, 이는 동방의 성인께서도 하늘의 뜻을 따르신 것입니다. 지금 조선에도 여러 성인이 나셔서 만년을 이어질 교화의 풍토를 만드셨으니, 이 또한 옛일과 발자취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황제로 즉위하시옵소서."

이어지는 중신들의 말을 들으며 양녕은 눈을 빛냈다.

'내가 기자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열두 사당에도 그대로 둔 것은, 애초에 부정하기 쉽지 않기도 하지만 바로 이걸 위해서였다. 기자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조선이 많은 것을 얻어낼 명분이 될 수 있어. 먼 훗날 고고학이 발전하고 나면 알아서 기자조선의 존재는 부정될 것이지만, 그때는 이미 기자의 명분으로 얻어낸 것들은 확고한 조선의 일부가 되어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이윽고 중신들의 말이 모두 끝나자, 이도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말했다.

"하늘의 뜻이 그러하고 경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는 것이 옳겠지. 알겠소. 그러나 지금 당장 하기에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계절 또한 겨울이니, 대종백께서는 다음 달 춘분 이후의 길일을 잡아 즉위식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대신 연호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미리 정해 둘 수 있을 것이오. 조선이 처음으로 쓸 아주 중요한 연호이니……. 형님, 어떤 것이 좋겠습니까?"

춘분 이후의 길일에 즉위식을 올리겠다는 말을 곱씹던 양녕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것을 무언가에 이끌리듯 말했다.

"광무와 경덕 둘 가운데에 고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둘 다 마음에 드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이도가 이내 입을 열었다.

"경덕으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청 드리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삼한은 그 연원이 오래되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마땅히 나라의 이름도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것도 생각하신 게 있으십니까?"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양녕이 말했다.

"예. 옛 조선의 천명이 다하고 셋으로 나뉘어 삼한이 일어섰으나, 지금까지 신라의 왕업만이 이어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상의 치세에 이르러 남으로 옛 백제의 백성들이 돌아오고 북으로 옛 고구려의 땅이 돌아왔으니, 드디어 삼한의 세 천명이 한데 모여 큰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삼한을 아우른 큰 한, 대한이라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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