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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2화 (27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2화

272화

1449년 9월 초순 모일.

경사 외성 서직문 밖.

에센이 명나라 군대를 모조리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사로잡았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초원 전체로 퍼져나갔고, 초원의 수많은 부족이 에센의 아래로 모여들었다.

초원에서는 힘과 명예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둘 다 증명해 낸 에센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힘이나 명예보다도 돈이 중요한 수많은 상인도 에센을 돕겠다고 나섰다.

'확실히 상인들이 머리 굴리는 게 빨라. 하긴, 아무리 하사품과 말값이 갑자기 깎여 적잖은 손해를 본 직후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에게 투자하지 않는다면 여태까지 상인으로 살아남지를 못했겠지.'

빨리 이전처럼 교역이 이루어지게 해 손해를 벌충하려는 것만이 목적이건, 더 크게 내다보고 장차의 교역에서 한몫을 잡고자 에센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이건 간에 상인들에게는 에센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렇게 늘어난 병력과 보급 덕분에 오이라트 군대는 어렵지 않게 장성을 넘어 경사까지 진격해 올 수 있었다.

"아버지, 발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센은 장남 호르후다순의 보고에 현실로 돌아왔다.

"오, 벌써 끝냈구나. 수고 많았다. 바로 준비하거라"

"예, 아버지."

호르후다순에게 지시를 내린 에센은 말을 몰아 대열 앞쪽으로 간 다음, 준비를 마친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발사하라!"

장성 일대의 요새에서 노획해온 수많은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굉음과 함께 날아간 포탄들은 옹성 위의 문루를 뚫고 들어가며 사방으로 벽돌 조각을 날렸다.

이어서 투석기들이 발사한 진천뢰들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옹성 안으로 떨어졌다. 곧 옹성 안 곳곳에서 폭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말 장관이군요, 아버지. 승상 바얀도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호르후다순의 말에 에센이 껄껄 웃었다. 바얀은 쿠빌라이 칸의 명으로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시킨 원나라의 승상이었다. 그런데 호르후다순이 스스로 바얀에 비유했으니, 호르후다순에게 지시를 내린 에센은 은근슬쩍 누구에 비유한 것인지 바로 알아차려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바얀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자, 발사가 다 끝났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예, 아버지."

에센과 호르후다순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몰아 서직문 옹성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크게 소리치면 성벽 위까지 들릴 정도 거리까지 간 에센은 말을 멈추었다. 성벽 위에서 포탄은 물론이고 화살도 충분히 날아올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였지만 에센은 걱정하는 기색이라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첫째는 에센의 바로 옆에 강제로 말에 태워서 데려온 황제 주기진이 있어서 명나라 군대가 쉽게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이곳의 위치 때문이었다.

"마침 해가 적당히 기울었군. 아주 좋아."

경사 외성에는 성문이 아홉 곳이나 있고 모든 성문에 오이라트 병력이 배치되어 포위하고 있었지만, 에센이 서직문을 고른 것은 서직문이 경사 외성 서쪽 성벽에 난 문이기 때문이었다. 정오를 지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 서에서 동으로 내리쬐는 태양 빛은 동쪽을 보는 오이라트 군대에는 좋은 조명이 되지만, 서쪽을 보는 성벽 위의 명나라 군대는 눈이 부셔 제대로 앞을 보기조차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한 에센은 씨익 웃더니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는 외쳤다.

"나는 예케 몽골 울루스(대몽골국)의 타이시, 초로스 가문 사람, 마하무드의 아들인 토곤의 아들인 에센이다! 여기 내 옆에 있는 것이 너희의 황제이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잘 들어라! 조금 전의 포격은 너희가 괜한 마음을 먹지 말라고 우리의 힘을 잠깐 보여 준 것일 뿐이고,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몽골의 옛 법도에 따라서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기회를 주겠다! 너희가 항복하고 성문을 연다면 너희 모두 무사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항복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에센은 병사 하나가 굴려서 가져온 수레바퀴 하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 성벽 안에서 이 수레바퀴보다 큰 인간은 모조리 죽일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이고, 시한은 이 수레바퀴의 그림자가 수레바퀴보다 길어질 때까지다. 만약 시한을 넘기고 첫 포성이 울리면, 그 뒤로는 너희가 무슨 제안을 하더라도 살육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수레바퀴를 기준 삼아 최후통첩을 하고 기분이 좋아진 에센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고삐를 당겨 본진으로 돌아가려고 한 그때, 호르후다순이 무언가 발견하고 말했다.

"아버지, 저기를 보십시오. 성문이 열립니다."

그 말에 에센이 서직문을 보자 정말로 옹성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이윽고 옹성에서 나온 일군의 명나라 병사들이 에센 쪽으로 다가오더니, 제일 선두에 있던 병사가 손에 들린 잘린 머리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수레바퀴 그림자가 길어지기를 기다릴 것 없소. 지금 바로 항복하겠소. 이건 성안에서 가장 높은 장수의 머리요."

잘린 머리를 보고 얼굴이 창백해진 주기진을 슬쩍 본 에센이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정말로 높은 장수의 머리가 맞는 모양이군. 그런데 항복 권고를 하자마자 머리통을 들고나오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선두에 있던 병사가 손에 묻은 피를 갑옷에 대충 문질러 닦더니, 좌절과 증오, 분노가 섞인 탁한 눈빛으로 잘린 머리를 보며 말했다.

"황태후가 황제의 동생을 새 황제로 즉위시키고, 잡혀간 황제는 이제 태상황제라고 선포했소. 그러더니 자신들은 남경으로 가야 하니 우리는 남아서 경사를 지키며 시간을 끌라더군. 특히 이놈은 자기 가족은 진작에 피신시킨 주제에 우리더러는 목숨을 걸고 마지막까지 싸워서 황은에 보답해야 한다느니 하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했소."

"그래서 죽인 것이냐?"

"그렇소. 죽으라고 버려졌는데 황은이고 나발이고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소? 첫 포성이 들리고 놈이 정신없어할 때를 노려 공격해, 포격이 다 끝났을 즈음에는 이미 잘라서 가지고 나오고 있었소."

"잘 생각했다. 좋아, 항복은 받아주마. 안심해라."

병사들 얼굴에 안도감이 퍼지는 것을 본 에센은 주기진을 돌아보았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이고 절망감까지 가득한 그 표정을 본 에센이 웃으며 말했다.

"들었느냐? 네 동생이 새 황제가 되었고 넌 헌 황제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다들 널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간 데다가, 네가 죽건 말건 결사 항전하라고까지 한 모양이야.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난 아직도 명나라의 유일한 황제로 너만을 인정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으하하하!"

* * *

며칠 뒤.

경사. 황성.

오이라트 군대가 경사에 무혈입성하고 며칠이 지났다. 경사 전체를 장악한 에센은 황성을 점령해 거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존의 전각을 쓰지 않고 황성 서쪽의 원림인 서원에 게르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살펴보고 왔습니다."

궁성에 가둬둔 주기진을 살펴보고 온 차남 으시테무르가 게르에 들어오며 말하자 에센이 물었다.

"수고했다. 이리 와서 앉거라. 그래, 황제의 상태는 어떻느냐?"

"여전히 침전에서 한 발짝도 나오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째 똑같구나. 버려졌다는 게 어지간히 큰 충격이었나보군."

에센이 느긋하게 말하자 으시테무르는 약간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며칠째 똑같으면 빨리 놈을 어떻게든 해서 황위를 내놓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버지나 형이나 너무 느긋하신 것 같습니다."

"황제가 식음을 전폐한 것도 아니고, 밥도 잘 먹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다 하니 너무 서두를 것 없다. 병력도 거의 다 데려온 상태고 칸까지 모셔왔으니, 초원에서 무슨 일이 생길 걱정도 없지 않느냐."

얼핏 칸의 안전을 위해서 한 일처럼 들리지만, 에센이 병력은 물론이고 칸인 톡토아부하까지 경사로 데려온 진짜 이유는 자신이 승승장구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북원 세력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 놈들이 남쪽으로 달아났으니, 군대를 다시 모으는 대로 여기를 탈환하러 올 것입니다. 황제는 버렸어도 땅까지 버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두를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서둘러서는 안 돼. 놈들이 달아나면서 황성 안에 있는 온갖 중요한 것들은 다 가지고 갔고 당연히 옥새도 전부 챙겨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황제가 가지고 있떤 옥새 하나를 얻지 않았느냐."

"그냥 옥새도 절대로 내어줄 수 없는데 황제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옥새이니 더더욱 내어줄 수 없다며 그 우겸이라는 놈이 소리를 질러대던 그 도장 말입니까?"

"그래. 워낙 글씨가 이상하게 생긴 탓에 내용은 고사하고 읽을 수조차 없어서 투항한 환관에게 물어보았더니, 황제신보라고 해서 군사를 동원할 때 쓰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그렇다고 그 옥새가 있다고 명나라 병사들이 내 말을 들을 리가 없겠지. 결국 내 뜻대로 황명을 내리게 할 황제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에센의 의도를 이해한 듯 으시테무르가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손에 넣은 지역의 명나라 병사들을 이용해서 남쪽에서 올라올 명나라 군대를 막는 데 써야 하니, 그때까지는 저놈이 황제여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그렇게 다 막아내고 놈이 쓸모를 다한 다음이라야 황위를 가져와도 문제가 없어. 게다가 저 궁성 주변에는 통자하라고 하는 해자가 두르고 있잖느냐. 원래는 황제의 안전을 위해서 판 것이겠지만, 지금은 황제가 쉽게 달아나지 못하게 가두어두는 역할을 하고 있지. 그러니 지금 서두를 이유가 없는 것이야."

"그런 이유라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명나라 병사들까지 이용한다고 하지만 과연 남쪽에서 올라오는 놈들을 무사히 막아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됩니다."

으시테무르의 말에 에센이 싱긋 웃었다.

"너는 나나 네 형과 달리 중국에 대해서 잘 모르니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비록 중국 남부는 날씨가 따뜻하고 농사가 잘되어 인구가 많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산도 많다고 하고, 무엇보다 우리 몽골이나 여진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니 기병이 주력일 수는 없겠지."

"경사 일대에 있던 기병들은 남쪽으로 도망가기는커녕 우리 오이라트의 손에 모두 시체가 되었으니, 남쪽에서 새로 올라오는 군대는 거의 다 보병이겠군요."

"그래. 하지만 우리는 다 기병이고, 전장이 될 황하 이북은 기병이 활약하기 좋은 평지가 많다. 게다가 명나라 병사들을 보병으로 써먹을 수도 있고, 경사에 있던 화약과 화포를 손에 넣은 것은 물론이고 추가로 화약을 만들게 시키기까지 했으니 우리가 전체적으로 유리해."

에센은 야심과 자신감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며 이어 말했다.

"그런데 정예는 이미 다 죽고 급하게 모은 오합지졸인 데다가, 기병은 구경도 못 해본 놈들이다. 게다가 살던 곳을 떠나 여기까지 걸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황하까지 건너야 하니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물론 방심해서야 안 되겠지만, 그런 놈들을 상대하는 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오십만이건 백만이건 모아오게 두어라. 전부 말발굽으로 밟아 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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