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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1화 (27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1화

271화

1449년 8월 중순 모일.

상경부. 금나라 궁궐.

"정말로 에센이 그 많은 명나라 군대를 모조리 몰살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황제까지 사로잡았단 말입니까?"

"그렇소. 이대로 장성을 뚫고 경사까지 함락시키려는 것 같소."

본심을 숨기고 에센을 비롯한 오이라트 세력들과 가깝게 지내던 북원 부족들이 몰래 보내준 급보에, 야르하치는 급하게 도르호치를 불러 지금 상황을 의논하고 있었다.

"큰일입니다. 정예병력을 모두 잃었고 황제가 잡혀 있기까지 하니, 명나라는 오이라트 군대를 제대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저들이 투석기로 던지는 진천뢰의 위력이 상당해서, 이번 전투에서 명나라 요새들을 함락시키는 데에 큰 활약을 했다고 하오."

"저들에게는 폭발 화살이나 가벼운 화포가 없지만 이미 회전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명나라 군대를 몰살했으니 앞으로는 큰 필요가 없고, 이제 장성과 경사를 상대로 공성전을 하는 것만 남은 셈인데, 그리 투석기와 진천뢰가 강력하다면 정말로 장성은 물론이고 경사까지 함락시켜버리는 것 아닙니까?"

"내 생각도 그렇소. 어쩌면 명나라 군대가 가지고 있던 화포와 화약을 얻어 더욱 강력해져서, 회전에서 이겼던 것처럼 공성전도 쉽게 끝낼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게 말하는 야르하치의 표정이 매우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까지 맺힌 것을 본 도르호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경사는 물론이고 장성도 넘기 전이니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에센이 경사를 점령하고 중원을 정복한다 한들 놈은 황금씨족이 아니라 오이라트 출신 타이시에 불과하니 칸으로 즉위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허수아비 칸을 세워두고 실권자 노릇을 하는 게 고작일 것인데, 거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이리 초조해하는 것은 다른 소식도 같이 들어왔기 때문이오."

"어떤 소식입니까?"

"에센이 명나라 황제가 가지고 있던 옥새를 빼앗았다고 하오. 그거야 뭐 이상할 것 없지만, 그 과정에서 경사 함락 이후에 뭔가 더 꿍꿍이가 있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하오. 아무래도 가깝게 지내는 북원 부족들에게도 숨긴, 에센과 그 측근들만이 계획하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오."

"그 계획이 무엇인지 짐작되는 모양이군요. 그러니 이리도 불안해하시는 것 아닙니까."

야르하치가 작게 끄덕이고 말했다.

"그렇소. 그대 말처럼 에센은 황금씨족이 아닌 탓에 몽골의 칸으로 즉위할 수 없소. 그랬다가는 수많은 몽골 부족이 반발하고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니 말이오. 마찬가지로 에센이 아무리 중원을 정복하더라도 황금씨족의 것인 대원황제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겠지."

"예. 만둘이 처음 한을 뵈러 왔을 때도 그런 말을 했지요. 칸의 자리와 대원황제의 자리 둘 다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니, 아예 하나라도 없는 편이 낫다는 생각으로 국명에서 대원에 해당하는 부분을 빼버렸을 정도라고 말입니다."

"그렇소. 그 정도로 칸의 자리와 대원황제의 자리는 황금씨족이 아니라면 절대로 넘볼 수 없는 것이오. 그런데 버일러, 나는 여진의 한이자 대금황제인데, 몽골인들이 지금까지 내 혈통을 문제 삼은 적이 있었소?"

뜬금없는 야르하치의 말에 도르호치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칸과 한이 그 뿌리가 같은 말이라 하지만 몽골과 여진은 종족이 다르고, 같은 황제라고 하지만 대원과 대금은 나라가 다른데, 한께서 황금씨족이 아니라고 해서…… 설마!"

도르호치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야르하치가 쓴 웃음을 지었다.

"이해한 것 같군. 그렇소. 오이라트는 비록 크게 보면 몽골에 속하지만 동부의 몽골인들과는 그 근원이 다르고, 대원의 황제로 즉위하려면 황금씨족이어야 하지만 중국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소."

"에센의 꿍꿍이라는 게 경사를 점령한 다음 사로잡은 명나라 황제를 겁박해서 양위를 받아내는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오. 보르지긴의 테무진이 스스로 위업을 세우고 황금씨족이라는 권위를 만들어 낸 것처럼, 초로스의 에센도 중원 정벌의 위업을 세우고 황금씨족의 혈통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권위를 만들어내려는 것이겠지."

드디어 야르하치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도르호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오이라트는 화약을 만들지 못하고 쓸 줄만 알며 그마저도 기술이 부족하지만, 중원을 일부라도 얻는다면 거기 있던 화약 기술자들을 통해 제조에서 사용에 이르는 각종 화약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요. 옛 금나라가 그랬고, 몽골인들이 그랬고, 한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화약만 문제가 아니오. 중원을 얻으면 면포도, 철도, 소금도 걱정할 것이 없소. 이제 황금씨족의 권위를 빌릴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자신의 권위에 위험이 되니 북원 세력도 억누르려 들겠지."

"교역으로나 정세로나 북원 세력과 긴밀한 우리 금나라에는 최악의 상황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야르하치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만으로는 방법이 없소. 어서 조선에 알려야 하오."

* * *

1449년 8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금나라에서 온 이 급보의 내용이 심요도 관찰사가 올린 장계의 내용과 맞아떨어집니다. 아무래도 야르하치의 추측대로 에센이 중원의 황제 자리를 노리는 것이 사실인듯합니다."

예조판서 김종서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이도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대체 어떻게 황제가 환관의 부추김에 친정에 나섰다가 오랑캐들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생길 수가 있으며, 아무리 소식을 못 들었다고는 하나 조선은 물론이고 여진족들도 짐작하는 일을 명나라 조정은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오."

양녕 역시 심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직접 당했던 중국인들은 거의 다 세상을 뜨고 없겠지만, 몽골인들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가축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던 기억은 세대를 넘어 전해져왔겠지요. 그리고 이번 일로 그 공포가 되살아났으니, 두려움에 빠져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금나라에서 급보가 오기 며칠 전 명나라에서 온 국서의 내용은, 원래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던 양녕마저도 심란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다.

'옥좌가 비었는데 태자는 나이가 어려 당장의 급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없으니, 황태후가 나서서 정통제를 태상황제로 올리고 그 아우인 성왕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하며 연호를 경태로 바꾼 것은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으니 나에게는 사실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내가 놀랐던 것은 국서에 적힌 병부상서의 이름이 우겸이 아니라 광야였던 것과…….'

"아무리 그래도 남경으로 가다니요. 국서에는 남경도 경사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의 도읍이니 조정을 잠시 옮기는 것일 뿐이고 천도는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이건 누가 봐도 겁에 질려서 달아나는 것 아닙니까."

집에서 쉬다가 불려 나온 영의정 황희도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정통 연간인지 정강 연간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입니다. 중국인들에게는 여진과 몽골을 차례로 흥성하게 해주고 황하 남쪽으로 달아나는 취미라도 있나 싶을 지경입니다."

"그래도 명나라와 금나라 양쪽에서 소식을 들은 덕분에 우리 조선은 당사자인 오이라트 다음으로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늦기 전에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놈들이 노리는 것은 황제의 몸값이 아니라 황위 그 자체라는 것을 알리고, 천도를 멈추고 오이라트와 맞서 싸우게 해야 합니다. 만약 이대로 오이라트가 비어 버린 북경을 점령하고 황위를 손에 넣는다면 정말로 걷잡을 수 없어집니다."

김종서의 말에 양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그리 쉽지가 않을 것이오. 명나라에서 오이라트 상황을 조선이 어떻게 알았냐고 나오면 어찌할 것이오? 조선은 지금까지 금나라와 긴장 상태인 것처럼 명나라의 눈을 속여가며 요동을 가지고 있었소. 그런데 금나라가 이런 중요한 소식을 조선에 급히 알려주었다고 하면 명나라가 무슨 반응을 보이겠소?"

"조선을 의심하겠지요. 하지만 옛 금나라를 무너뜨렸던 것도 몽골이었으니, 여진족들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잠시 은원을 접어 두고 조선에 알려 주었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러면 이번에는 금나라가 어떻게 에센의 동향을 알았는지를 의심할 것 아니오. 그렇다고 금나라와 북원 세력의 관계까지 말한다면, 명나라는 모르는 곳에서 조선, 여진, 몽골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명나라의 의심은 더 걷잡을 수 없어지오."

"이런……. 하긴, 그런 모든 문제를 접어 두고 명나라에 알린다고 하더라도, 그로인해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을 저희가 다 뒤집어쓸 수도 있습니다."

김종서는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식으로 대강 흘려 말했지만, 사정전에 있는 모두가 그 속뜻을 알 수 있었다.

'설령 명나라가 오이라트를 막아 내고 황제를 무사히 구출해 내는, 일견 최선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황제가 둘이 되는 문제가 생긴다. 둘 중 하나에 실패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이, 명나라 조정이 한 목소리로 조선에 책임을 떠넘기겠지. 내부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는 데다가, 조선이 금나라나 북원 세력과 내통한 것 같다는 명분도 충분하니 말이야. 결국 결사항전을 종용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명나라가 오이라트에 참패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처지가 되지 않는 경우 정도인데, 누구도 그걸 말로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들 고민에 잠겨 한참을 침묵하고 있는데, 문득 이도가 세자 이향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

질문을 받은 이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대종백의 말처럼 지금 조선은 오이라트 다음으로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이라트는 조선이 자신들의 상황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알 것이라는 사실은 모를 것이니, 결국 조선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셈이지요."

"맞는 말이다. 손자도 병법에서 이르기를 남을 이기고 공을 세우는 것은 앞서서 아는 것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비록 바로 대처할 수는 없을지라도 상대의 수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예.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데에 조선이 가장 유리하다는 이점을 살려야지요. 어차피 명나라에는 금나라에서 들은 것을 알려줄 수 없고, 명나라의 상황을 금나라에 알려준들 그들이 뭔가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며 정세가 흘러가는 것을 주시하는 것이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일 것입니다."

"네 말대로구나. 그럼 어떤 대비를 하면 좋겠느냐?"

이향은 수려한 외모기에 오히려 어울리는, 냉정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국경의 수비를 강화하십시오. 설령 중국과 몽골, 여진의 천하와 천명이 모조리 뒤흔들린다 하더라도 삼한의 천하와 천명만은 무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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