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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70화 (27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70화

270화

1449년 8월 중순 모일.

북직례. 토목보.

"아군 기병들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소?"

"예. 성국공, 공손후, 영순백 모두 소식이 끊긴 것을 보아 아무래도 전멸한 것 같습니다."

이부좌시랑 조내의 대답에 황제 주기진이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유능한 장수들과 기병 5만을 잃고도 결국 놈들의 추격을 피하지 못하다니……."

명나라 군대가 선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 그다음 날부터 오이라트 군대의 맹추격이 이어졌다. 적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명나라 기병들이 추격을 막아 내려 용감히 나섰지만 단 한 사람도 살아돌아오지 못했고,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은 오이라트 군대에 거의 따라잡히게 된 명나라 군대는 거용관을 코앞에 두고 이곳 토목보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 폐하를 호위하며 거용관까지 달릴 수 있을 만큼의 기병은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우물을 파는 것은 어찌 되었소?"

"두 길 깊이로 세 곳을 팠지만, 물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산 밑인 데다가 가까이에 하천까지 흐르는데도 수맥이 흐르지 않는다니. 그러면 여기 주둔하던 병사들은 대체 물을 어떻게 구했다는 것이오?"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아서 빗물을 받아두고 아껴서 쓰면 충분했고, 정 부족하면 하천에 가서 떠왔다 합니다."

그 말에 주기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토목보에는 빗물로 감당될 리가 없을 만큼의 병력이 머무르고 있는 데다가 하늘에는 비가 올 기미도 없었고, 포위되어 있으니 하천에 가서 물을 떠 올 수도 없었다.

"날아온다!"

순간 밖에서 들린 외침에 천막 안의 모든 이가 긴장했다. 이어서 폭음이 연달아 나고, 병사들이 소리치며 분주히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또 놈들의 진천뢰인가. 갈수록 많이 날아오는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된 것이오?"

"놈들이 갈수록 투석기를 많이 설치하고 있습니다. 화포는 무거운 구리 덩어리인지라 말에 싣고 다니기가 힘들지만, 투석기는 분해해서 싣고 온 다음 조립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긴, 집도 분해해서 싣고 다니다가 조립하는 놈들이니, 투석기는 어려울 것도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우리는 화포가 있으니 그걸 쏘고, 거리가 멀어서 안 닿는다면 우리도 투석기를 만들어서 쏘시오. 놈들 투석기가 여기까지 날아오면 우리 투석기도 거기까지 날아갈 것 아니오."

조내는 옆에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왕진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화약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로 훈련을 잘 시키지 않아 병사들이 화약을 잘 다루지 못합니다. 사실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투석기를 만들어서 쏘려고 해보았는데, 발사하기도 전에 화약이 터져서 준비하던 병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뒤로는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에 짜증이 난다는 듯 바닥을 발로 쿵 구른 주기진은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로 입을 다물었다. 천막 밖에서 병사들의 외침만 들려오기를 잠시, 이윽고 주기진이 결심한 표정으로 눈을 뜨고 말했다.

"놈들이 내가 친정한다는 말은 들었을지 몰라도 확신은 없을 것이오. 그러니 서신을 보내 내가 있음을 알리고, 우리를 무사히 거용관 너머로 보내 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자고 하겠소. 마침 옥새 가운데 천자신보를 가져왔으니 그것을 찍으면 저들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폐하, 이대로만 가더라도 자신들이 이길 것인데 놈들이 그런 협상에 나서겠습니까? 오히려 폐하가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면 절대로 보내 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황한 조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주기진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소. 하지만 놈들이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로잡으려 할 것이니 더는 진천뢰를 던지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협상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한동안은 전투가 멈추겠지. 그 틈을 노려 탈출하자는 것이오."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시도한다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소. 하지만 시도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말라죽을 뿐이지 않소."

비장한 주기진의 표정을 본 조내는 왕진을 한 번 노려보더니 각오를 다지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 * *

며칠 뒤.

토목보 남쪽.

시도는 실패했다.

"빨리 포위를 뚫어라! 이미 토목보로는 돌아갈 수 없다!"

"전방에 적 중기병대 출현!"

"빌어먹을!"

옥새가 찍힌 서신을 받은 오이라트 군대는 주기진의 예상대로 진천뢰 발사를 멈추었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의 감시하에 인근 하천에서 물을 떠 갈 수 있게도 해 주었다.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명나라 군대는 빈틈을 보아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것이 기회가 아니라 함정임을 알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사방에서 오이라트 기병들이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이 흩어지지 못하게 해라! 뭉쳐서 움직여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이미 걷잡을 수 없습니다! 밀집대형을 이룬 병사들조차 적들이 빈 진천뢰만 던져도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달아날 정도입니다!"

"진천뢰는 비어 있을 수도 있지만 중기병에 밟히면 무조건 죽는다고 해!"

곳곳에서 들리는 처절한 외침에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던 주기진은 호위장군 번충이 급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되어 가고 있소?"

"적 중기병들이 아군 진형을 무너뜨렸습니다. 무기와 갑옷을 버리면 죽이지 않겠다고 외쳐대는 탓에 대열은 계속 붕괴 중입니다."

번충은 짧게 말했지만 주기진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무장을 벗어던지고 달아나는 병사들과 그것을 제지하려는 무관들, 그리고 비무장한 상태로 흐트러지기까지 한 대열로 밀고 들어와 칼과 철퇴를 휘둘러 대는 중기병들의 모습을 떠올린 주기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찌, 어찌해야 하오?"

왕진이 덜덜 떨며 질문했지만, 번충은 대답 대신 가까이 가더니 한 손으로 왕진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말 안장에서 들어 올려져 컥컥대는 왕진을 바닥에 내던진 번충은 분노와 증오, 경멸이 뒤섞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천하를 망친 도적놈이 감히 살기를 원하느냐?"

왕진이 채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번충은 고삐를 움직여 자신이 탄 군마로 왕진을 밟으며 지나갔다. 갈비뼈가 부러져 내장에 박혔는지 고통에 꿈틀거리는 왕진에게 침을 뱉은 번충은 왕진이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잡고 이끌어 주기진에게 데려왔다.

"제가 어떻게든 뚫어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따라오시다가 퇴로가 뚫리면 거기로 탈출하십시오. 이 말도 같이 데리고 가다가, 타고 있으시던 말이 지치면 버리고 갈아타십시오."

바닥을 뒹구는 왕진을 흘끗 본 주기진이 말없이 끄덕이자, 번충은 철퇴를 뽑아 들고는 동쪽으로 말을 달렸다.

번충은 용맹한 기세로 철퇴를 휘둘러 적 중기병을 몇이나 말에서 떨어뜨렸지만 죽인 적보다도 많은 숫자의 화살이 날아와 갑옷을 뚫고 박혔고, 결국 번충이 철퇴를 손에 꼭 잡은 채로 안장 위에서 절명했다.

그것을 본 주기진은 절망감에 눈을 돌렸다.

* * *

한참 뒤.

오이라트 지휘부 천막 앞.

포로로 잡혀 와 포박당해 꿇어앉은 채 멍하니 바닥만을 보던 주기진의 귀에, 진어 억양이 강하게 섞인 중국어가 들렸다.

"정말로 중국 황제를 사로잡다니,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든 주기진은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보고 물었다.

"그대가 에센인가?"

"그래. 내가 바로 초로스 가문 사람, 마하무드의 아들인 토곤의 아들인 에센이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끌고 나왔다기에 얼마나 강할까 걱정도 좀 했는데,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다. 설마 우리가 협상하자는 네놈들 말을 곧이 믿을 줄 알았느냐?"

에센이 비웃으며 주기진의 머리를 툭툭 치는데, 별안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이놈! 감히 황제께 그게 무슨 무례냐!"

소리친 사내를 본 에센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으하하하! 나를 웃겨서 죽이는 게 오늘 너희의 진짜 전술이냐? 포박당해서 나란히 꿇어앉은 상태로 호통을 치면 그게 정말로 무서울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무섭게 호통을 치고 싶으면 이겼어야지! 으하하하!"

그 말에 사내가 파르르 떨자 에센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희 황제라고 해봤자 한족 노예의 후손이 아니냐? 몽골의 타이시가 머리 좀 때릴 수도 있지. 아, 아니면 탁발승의 후손이니 승려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냐? 그건 삭발하고 오면 해 주마."

"네, 네 이놈!"

에센이 명나라 태조 주원장을 대놓고 조롱하자 사내는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주기진은 오히려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분노해봤자 조롱만 당하고 이 자를 즐겁게만 해줄 뿐이네. 그만 하게."

주기진은 이어서 에센에게 말했다.

"황제인 나를 붙잡았으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명나라 조정에서 몸값을 받아낼 생각인가?"

"몸값? 샤타르(장기)에서도 왕을 잡으면 이기고 끝인데, 하물며 진짜 전쟁에서 황제를 잡은 상황에서 고작 몸값을 노리냐 묻다니. 패전한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느냐, 아니면 원래 그리 멍청한 것이냐? 설마 협상하자고 하던 것도 진심이었던 건 아니지?"

비웃으며 말한 에센은 오이라트 병사들이 전리품을 분주히 가져와 쌓아놓는 모습을 보더니 이어 말했다.

"너희가 끌고 온 그 많던 병사들이 전부 들판에 버려져 늑대 밥이 되었다. 병력 숫자나 무장 상태, 포로들에게서 알아낸 것을 종합해 보면 너희 수도 일대의 정예병력은 물론이고 긁어모은 오합지졸들까지 모조리 죽은 셈이지."

"설마 장성을 넘을 생각인가?"

"당연하지. 적진이 텅 비어 있는데 여기서 말을 돌리겠느냐? 이대로장성을 넘어 칸발리크(북경)를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는 감히 노예의 후손이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센이 씨익 웃는데, 조금 전의 사내가 다시 외쳤다.

"이 더러운 오이라트놈! 어디 네 마음대로 될 줄 아느냐! 경사에는 아직도 문무백관과 많은 병력이 남아있다! 그들이 네놈을 막아내고 폐하를 구출해 낼 것이다!"

에센은 사내의 앞으로 가더니 이기죽거리며 말했다.

"목청 한번 엄청 좋군. 아까 싸울 때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그랬느냐. 우리 병사 한 명 정도는 깜짝 놀랐을 텐데."

"마음대로 떠들어라. 네놈은 결코 장성을 넘을 수 없다. 설령 장성은 어떻게 넘더라도 경사의 성벽만은 절대로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거 목청만이 아니라 자신감도 상당하구먼. 정예병력은 몰살당하고 황제는 잡혔는데, 남은 놈들이 무슨 수로 칸발리크를 지킨단 말이냐?"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조정의 충신들이 결사 항전할 것인데, 무슨 수로 경사를 함락시킨단 말이냐?"

"허허허. 목청에 자신감에 신뢰까지, 싸우는 거하고 황제를 탈출시키는 거 빼고는 다 빼어나군. 그래, 네놈 이름이라도 알아두자. 이름이 무엇이냐?"

어이없음과 조롱이 섞인 에센의 질문이었지만, 사내는 조금도 기죽지 않은 눈빛으로 에센을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대명의 병부좌시랑, 우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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