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9화
269화
"하기야 저들이 유학을 배웠다지만 남을 쉬이 업신여기는 오랑캐의 성정이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이 천자국의 예법으로 대화국의 조공을 받아 준 완벽한 사례를 남겨두어야 영상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고두고 그들을 다루는 데에 유리할 것입니다."
"예. 비록 예법은 엉망이었지만 오랫동안 천자국을 자처해온 일본이니,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기를 죽여놓지 않으면 언제 기고만장해할지 모릅니다. 대화국에서 조공이 왔을 때 맞이하는 동안만이라도 제대로 천자국의 예법을 갖추어야겠지요."
이조판서 최만리와 예조판서 김종서의 말에 황희가 대답했다.
"둘 다 약간 반대로 이해한 것 같군. 오래 변방을 어지럽히던 오랑캐가 몸을 낮추어 조공을 바치려 하니, 마땅히 조선의 제도를 돌아보고 옳게 정비하려는 것이 본 목적이야. 물론 저들의 기를 죽이고 조공을 바친 사례를 남겨두기 위한 것도 맞으나, 그것은 결과에 해당하는 것이네. 어찌 섬 오랑캐에 맞춰서 예법을 조변석개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영상께서는 천자국의 예법을 새로이 도입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새로이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갖추어진 것을 마땅히 시행하는 걸세."
김종서의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한 황희는 이도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비록 몸은 노쇠해 의자에 앉아 지팡이까지 짚어 의지하고 있지만, 눈만은 그 날카로움을 조금도 잃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신 영의정 황희 아뢰옵니다. 본디 태조대왕께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여시고 제정하신 예법들은 지극히 당연히도 천자국의 것이었습니다. 비록 태종대왕께서 명나라가 시비를 거는 것을 피하고자 잘 드러나지 않는 것과 절대로 낮출 수 없는 것만을 남기고 여러 격식을 낮추셨으나, 그 기반은 온전히 남겨두셨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다음 황희의 말이 이어졌다.
"이곳 경복궁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경복궁보다 나중에 지어진 명나라의 황성은 억지로 문을 더 지어가며 정전 앞으로 다섯 문이 있게 했으니, 이는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예법을 저버린 사례입니다. 하지만 경복궁은 궁 안에 다섯 문을 두어 세 공간으로 나누었으니 지극히 옳게 된 천자국의 예법이지요. 종묘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지어질 때 천자국의 예법대로 일곱 방을 만들어 두었지만, 그간 상황이 따르지 않아 다섯 방에만 석실을 갖추고 위패를 봉안했을 뿐입니다."
고려 때 관직을 시작해 조선의 두 선대왕을 모셨고, 경복궁이 지어지는 것까지 두 눈으로 본 황희의 말이기에 좌중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도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영상께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비록 이미 영녕전으로 옮긴 목조대왕의 위패는 되돌릴 수 없지만, 정전의 남은 두 방에도 석실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중용에 이르기를 교사의 예와 체상의 의를 분명히 한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미 교, 사, 상은 지내고 있으니, 체를 마저 지내어 그 온전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교는 교외에서 지내는 제사, 즉 환구단에서 지내는 천제인 교제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사는 사직대례를 가리킨다. 각각 별도의 제단을 세우고 천지를 대상으로 지내는 제례기에 예에 속하는 제사였다.
"사공공(이한)께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로군."
또 종묘에서 선조를 대상으로 지내는, 마땅한 일이라 하여 의에 속하는 제사가 체와 상이었다. 상제는 가을 수확물을 바치는 제사의 이름이지만 각 계절의 수확물을 바치는 사약상증의 네 제사 가운데 가장 풍족한 계절인 가을의 제사를 들어 네 제사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고, 황희가 건의한 체제는 왕실의 시조에게 지내는 제사였다.
그리고 사직대례나 상제와 달리, 교제와 체제는 오로지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또 교체의 예를 행하려면 예복도 격식에 맞아야 하니, 전례를 따라 12류 면류관과 12문 장복을 갖추시옵소서. 마침 조선이 계승하고 국조의 사당을 세워 모신 삼한의 천명이 열둘이니, 실로 이때를 위한 표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례라……. 좋소, 그대로 진행하시오. 그리고 문형, 고려사의 편찬은 어찌 되어가고 있소?"
갑작스러운 호명에 대제학 정인지가 대답했다.
"미흡한 부분을 검토하라 하셔서 다시 처음부터 살피는 중입니다."
"이번 검토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빠지거나 틀린 것이 없나 만전을 기하시오. 또한 편찬이 완료되는 대로 전례로 삼을 것이니, 본기에서 열전에 이르기까지 깎거나 고치는 것 없이 모두 원래 제도와 호칭을 그대로 쓰시오. 특히 신우와 신창 부자는 태사공이 항우와 여태후를 기록할 때 한 것처럼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기록하여 그 참람함과 고려의 기울어짐이 오히려 드러나게 해야 할 것이오."
"예, 전하."
침착하게 오가는 이도와 정인지의 대화였지만 듣는 중신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신우와 신창을 왕으로서 기록하라는 것이나, 은연중에 고려 국왕들을 제후의 기록인 세가가 아니라 천자의 기록인 본기로 표기하라는 뜻을 내보인 것보다도, 이도가 지금까지 고려사의 편찬을 계속 끌어온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된 탓이었다.
'실상이 어떻건 간에, 조선은 태조대왕께서 고려의 왕업을 이어받으신 다음 국명을 고치신 나라다. 조선이 제후국이고자 한다면 고려가 천자국을 자처한 것을 잘못으로 지적하고 깎아서 천명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이 천자국이고자 하고 그 천명에 이미 흔들림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를 이은 조선이 천자국을 자처할 수 있는 훌륭한 전례이자 명분이 된다. 본기와 세가는 비록 짧은 두 글자지만, 어떤 것을 고려사에 올리느냐에 따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만근의 무게추와 같아. 그렇기에 이토록 기다리셨겠지.'
"혹시 다른 의견이 있소?"
이도의 질문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양녕이 말했다.
"주상께서 수십 년을 인내하며 기다리신 일입니다. 저희가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그리 꺼리실 것 없습니다. 임금이 오래 준비했다고 해도 고칠 점이 있다면 마땅히 말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그것을 꺼려서 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상께서 수십 년을 준비하신 끝에 두신 수라면, 저희의 식견과 재주로 어떻게 하려는 것 자체가 패착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 때문이지요. 그저 하나 말씀드릴 것이라면 비록 조선 내에서는 천자국의 예법을 갖추더라도 명나라를 대할 때는 기존처럼 제후국의 예법을 지켜야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허허 웃더니 말했다.
"그래서 이견이 없는 것이라면 다행이군요. 형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원래도 그리 할 생각이었으니 걱정마십시오.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이 얼마인데 그것을 못 참겠습니까?"
* * *
1449년 8월 초순 모일.
산서성. 대동진.
명나라 군대 진영의 중앙, 황제가 머무르는 천막 앞에서는 여러 문무 대신들이 바닥에 엎드려 간곡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폐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폐하께서는 부디 경사로 환궁하십시오!"
"폐하, 이곳 대동은 이미 적들이 휩쓸고 갔던 곳입니다. 비어있어서 지금 진을 설치한 것이지만, 이것이 적들이 목초가 부족해 금방 떠난 것인지 일부러 비워두고 유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천문 또한 온갖 불길한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속히 피하셔야 합니다!"
다음 순간 천막 입구 걷히는 소리가 나자 모든 신하가 일제히 고개를 들었지만,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황제가 아니라 언짢은 표정의 환관 왕진이었다.
"왜들 이리 시끄럽게 구시오? 폐하께서 오수에 못 들고 계시지 않소!"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한 신하가 외쳤다.
"폐하! 이 위급한 상황에 어찌 오수를 청하십니까! 속히 환궁하셔야 합니다!"
"어허! 주무시려 한다는 말을 듣고도 목소리를 높이다니!"
왕진이 상전이라도 된 것처럼 호통을 치자, 이부좌시랑 겸 한림원 학사 조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잔뜩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신하들이 죽는 것은 아까울 것 없으나 주상께는 천하의 안위가 달려있다.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법인데, 어찌 경솔히 폐하를 이런 위험한 곳까지 모셨느냐!"
"아직 선발대가 막 출정한 참인데 왜 불길한 소리부터 하시오! 그리고 학사라는 분이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도 모르시오? 하는 데까지 해보고, 그러다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조내는 그 무책임한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뭐라 쏘아붙이려 했으나, 웃는 소리와 함께 천막 입구가 다시 걷히자 황급히 바닥에 도로 엎드렸다.
"하하하! 선생께서는 역시 언변이 대단하시오! 맞소, 황제인 내가 대군을 이끌고 이렇게 왔는데 조금이라도 패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받아들여야지. 하하하!"
명나라 황제 주기진의 태평한 소리에 조내가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폐하, 어찌 신하인 저희의 말보다 환관인 저자의 말을 따르시는 것입니까.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비록 환관이지만 나의 스승이오. 필부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 황제인데, 어찌 스승의 말을 무시하겠소? 그리고 왕 선생 말처럼 아직 선발대가 막 출정했을 뿐이지 않소. 그 결과를 확인하고 환궁을 논해도 늦지 않소."
"하오나 폐하……."
"폐하! 폐하!"
조내가 다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호위장군 번충이 천막으로 달려오며 외치는 통에 끊겨버렸다.
"왜 그러시오, 장군.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선발대 소식입니다."
"오, 마침 잘 되었군. 그래, 어찌 되었다 하오?"
"영국공과 태령후, 평향백이 전사하고 병력은 전멸했습니다. 기병 딱 하나만이 겨우 돌아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던 주기진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선발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많은 병력이 간 것은 장군께서도 아시지 않소. 그 기병을 불러오시오. 내가 직접 들어야 믿겠소."
"이미 죽었습니다. 온몸에 화살이 꽂힌 채로 말을 달려와 겨우 소식만을 전하고 바로 절명했습니다."
드디어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주기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자 조내가 말했다.
"폐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놈들이 비록 전부 기병이지만 선발대와 싸운 직후에 또 추격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니, 이 틈에 서둘러 환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할 것 같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주기진의 질문에 번충이 대답했다.
"우선 적들이 북쪽에 있으니 바로 남쪽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남쪽으로 응주까지 간 다음 동쪽으로 가면 남북으로 산이 막고 있으니, 그때부터는 후방만 잘 방어하면 큰 위험 없이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태항산으로 들어가서 자형관을 통과하면 거기부터는 중원이니 안전합니다."
"안 됩니다. 차라리 왔던 길을 되짚어서 선부를 지나 거용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왕진의 다급한 그 말에 조내가 참다못해 화를 냈다.
"응주를 지나 자형관으로 가려면 반드시 네놈의 고향인 울주를 지나게 되니, 이 많은 병력이 통과하느라 고향에 피해가 갈까 두려운 게로구나! 그런 하잖은 이유로 옥체를 위험에 빠뜨리려 하다니!"
"멋대로 생각하지 마시오! 고향이라 그 주변을 잘 알아서 하는 말이오! 조금 전에 적들이 이곳 대동을 일부러 비워 두고 유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었소?"
"맞소."
"울주와 그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고, 우리 군대가 통과한 적이 없는 곳이오. 우리가 그쪽으로 퇴각하게끔 유도하고 놈들이 매복을 심어두지 않았을 거라 장담할 수 있소?"
"그건……."
"그리고 태항산으로 들어간다고 바로 자형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참을 가야 하오. 그런데 우리는 병력이 많으니 산을 지나기가 어렵고 저들은 장성을 동쪽으로 우회할 정도로 숲에 익숙한데, 산속에서 따라잡히거나 기습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소?"
고향에 피해가 갈까 두려운 왕진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댄 그럴싸한 이유에 신하들이 조용해지자, 주기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 선생 말이 맞소. 차라리 왔던 길로 다시 가는 게 안전할 것이오. 선부 쪽에는 여차하면 피신할 요새도 많지 않소. 심정보도 있고, 보안진도 있고, 토목보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