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8화
268화
1449년 7월 중순 모일.
경사. 궁성 사례감.
"정말 큰일이야.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사례감 태감 왕진이 초조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자, 마주 앉아 있던 환관 윤봉이 한심하게 여기는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태감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너무 급하게, 그것도 너무 과도하게 조절하면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왕진이 오이라트를 견제하도록 해달라는 조선 조정의 은밀한 요청을 받은 윤봉은 바로 행동에 옮겼다. 금나라를 견제할 목적이라는 말은 당연히 제외하고 오이라트 세력이 걱정된다는 이유만 적어 보냈음에도 윤봉이 서두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윤봉이 보기에도 왕진이 오이라트를 다루는 방식에 위험한 요소가 너무나도 많아보였는데, 조선에서까지 같은 걱정을 할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는 망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상황이 급했지 않은가."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듯 변명하는 왕진의 말에, 윤봉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온갖 다채로운 조선말 욕설을 꾹 참고 말했다.
"단번에 천 명 분량의 하사품을 제외하고, 말값을 오분의 일로 깎아 버려야 할 정도로 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인원을 천 명 정도 부풀렸던 것도 사실이고, 말값도 원래 이게 정상적인 가격이지 않은가."
"그걸 알면서도 놈들에게 값을 후하게 쳐줘서 얌전하게 만들어 왔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 번에 줄여 버린다면 당연히 반발하지요. 이익이 줄어서만이 아닙니다. 유목민들에게 목숨만큼 중요한 것이 위신인데, 이렇게 위신에 흠이 가는 일을 당하고서 반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값을 다시 조금 올려 주면 괜찮겠나?"
윤봉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그 말에 화조차 나지 않아 평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상황에서 말입니까?"
왕진이 시선을 피하자 윤봉이 한숨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에센이 지금 몽골 최고의 권력자이기는 하나, 황금씨족이 아닌 오이라트 출신인 탓에 달단(북원)에 속하는 무리들은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명나라와 교역해서 얻어내는 이익과 위신으로 그들을 잠잠하게 만들고 있었겠지요."
왕진은 윤봉의 지적이 듣기 싫은 듯 팔짱을 꼈지만, 윤봉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달단만이 아닙니다. 초원과 사막의 온갖 족속들이 명나라와 교역하는 이익을 탐내 에센에게 접근했고, 에센은 그들을 교역에 끼워 주고 북방의 권력자로서 큰 위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교역의 이익이 갑자기 박해졌으니, 위신과 권력을 동시에 잃게 생긴 에센과 이익이 줄어든 여러 족속들이 전부 강하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병력이 많았던 것이군. 그러니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인가……."
산이나 강을 방어선으로 쓰기 어려운 지역에만 지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판축성이라 여러 곳이 무너져 있다고는 해도 장성은 장성이었다. 약탈을 위한 일부 병력이 아닌 대규모 기병으로 돌파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었고, 경사(북경) 서북쪽에서 명나라와 몽골의 국경을 이루는 구간의 경우 돌파 외에는 서쪽으로 우회해 황하를 넘거나 동쪽으로 우회해 삼림지대를 통과하는 것만이 답이었다.
문제는 이번 공격의 주력인 오이라트는 그 이름부터가 숲의 사람(오이 아라드)인 삼림 민족이라는 것이었다.
"예. 장성을 동쪽으로 넘어서 선화를 함락시키고 기세를 몰아 대동까지 점령했지요. 장성은 뚫렸고, 양화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방어하던 대동총독을 포함한 네 장수까지 모두 전사했으니, 이제 장성 남쪽에서 경사를 막아주는 것이라고는 태항산맥만이 남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값을 다시 올려주고 화친하면 에센은 위신이 하늘을 찌를 테니 만족하겠지만, 이번에는 조정 신료들을 적으로 돌리시게 되겠지요."
대강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는 말로 뭉개고 넘어가려던 왕진은 윤봉이 굳이 하나하나 짚어서 말하자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놈들 말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기병으로 숲을 통과할 거라는 생각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도 예상을 못 했으니 뚫린 것 아닌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닐세. 지금 상황을 타개할 좋은 방법이 없겠는가?"
책임 회피에 이어서 자기가 저지른 일의 해결책을 남에게서 찾는 왕진의 태도가 짜증이 나긴 했지만, 왕진이 몰락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기에 윤봉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비록 놈들이 숲을 통과해 장성을 무력화하기는 했으나, 태항산맥은 험준한 데다가 중요한 길목마다 요새가 있으니 쉽게 넘지 못합니다. 거기 의지해 방어하면서 경사와 그 주변의 정예병력들을 모으고, 군재가 뛰어난 이에게 지휘권을 주어 거용관 너머로 보내면 능히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얘기는 조정 신료들도 하고 있네. 게다가 그렇게 하면 내가 만든 문제를 남이 해결……."
윤봉의 눈빛에 경멸이 섞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투덜거리던 왕진은 잠시 말을 흐리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하하하! 고맙네, 자네가 아주 좋은 방법을 알려 주었어! 하하하!"
* * *
1449년 7월 하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오이라트를 치러 황제가 친정이라니, 왕진은 견제가 무슨 말인지 모르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면 윤봉이 우리 뜻을 정반대로 이해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올해 별다른 일이 없으면 사직하기로 했던 영의정 황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하자, 예조판서 김종서가 심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칙서에 딸려서 윤봉이 몰래 보낸 서신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칙서에는 숨긴 내용이 있었지요. 갑자기 말값을 오분의 일로 내린 탓에 분노한 오이라트의 에센에게 선부와 대동이 낙성되었고, 궁지에 몰린 왕진이 황제에게 친정을 부추긴 모양입니다."
"다른 자가 오이라트 토벌의 공을 세우면 이번 일의 책임은 온전히 자기가 지게 되니, 직접 토벌해서 공으로 과를 덮겠다는 것인가. 군사들이 자기 말을 잘 따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친정을 택한 것이겠고……."
황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든 구각장을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영락제 시절에도 친정이 성공하고 나서야 조선에 알렸는데, 이번에는 친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칙서를 보낸 것을 보면 무언가 조선에 요구하는 것이 있겠지?"
"맞습니다. 몽골과 마주한 요동 북방에 군사들을 배치해 그 위엄을 보이고, 동쪽으로 여진족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하며, 패퇴하는 오이라트가 조선을 침탈하지 못하게 방비하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결국 요동에 군사를 배치해서 오이라트 병력을 일부라도 붙잡아두고 금나라를 견제하라는 것이 본론인가. 요동에서 대기하다가 오이라트를 측면이나 후방에서 치라는 내용이 아니라는 게 좀 의외로군."
황희의 그 말에 이도가 대신 대답했다.
"명나라가 조선에 요동을 준 것부터가 몽골과 금나라를 견제하라는 의도였으니 그 의도에 맞는 지시를 내린 것이긴 하오. 게다가 회경군이 금나라를 상대하는 것을 보며 조선의 군사력이 강하다는 것도 알았으니, 조선의 군대가 요하를 건널 빌미를 주는 것도 원하지 않겠지."
"그런 것이라면 나중에라도 원군을 요청할 리는 없으니 다행입니다. 그저 친정에서 승리했다는 칙서가 날아오면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조공을 보낼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겠군요."
"그렇소. 하지만 하필 다른 일이 겹친 탓에 일이 좀 복잡해져서 말이오."
며칠만에 등청해서 그간의 상황을 잘 모르는 황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뭐가 있습니까?"
"북조의 정이대장군이 왜황에게 양위 받았소."
"벌써 말입니까?"
"그렇소. 나라 이름도 일본에서 대화(大和)로 바꾸었소."
"이렇게 급하게 하면 혼란이 크지 않겠습니까?"
황희의 질문에 마주 앉아있던 양녕이 대답했다.
"의외로 혼란은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오. 아시카가라는 것은 정이대장군 가문의 씨이고, 성은 원(源), 즉 미나모토인데 이 미나모토의 혈통은 사실 그 뿌리가 왜황에 있소. 남량이 멸망하고 경왕의 아들인 독발파강이 탁발씨의 북위에 가 의탁했을 때, 태무제가 독발씨와 탁발씨는 그 근원이 같다며 근원 원을 성으로 내려준 고사에서 따서, 왜황의 자손으로 왕통에서 벗어나 백성이 되는 자에게는 미나모토의 성을 내려주는 것이 일본의 관례요."
"넓게 보면 왜황의 방계에 속하니, 양위를 받아도 문제없다고 볼 수 있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대화라는 것도 일본어로는 야마토라고 읽는데, 이것은 일본의 미칭이오. 결국 나라 이름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셈이지."
"그래도 반발하는 이들은…… 이미 없거나, 곧 없어지겠습니다."
그 말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었다.
"맞소. 그리고 즉위를 기념해서 바로 과거를 열어서, 문관 귀족들이 몰살당하며 생긴 관직의 빈자리를 채운 모양이오."
"형식상으로만 과거고, 실제로는 양위에 미온적이거나 반대하던 이들에게도 한 자리씩 주어서 조용하게 만들려는 것이겠군요. 그런데 혼란 없이 양위를 받았으면 조선 입장에서는 드디어 북조를 통제하기 쉬워진 것이니 좋은 일 아닙니까. 일이 복잡해졌다고 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국서를 보내왔소."
잠시 멍하니 있던 황희가 입을 열었다.
"일본, 그러니까 대화국도 천자국을 자처할 텐데 다른 나라에 조공을 바치다니요?"
"국서에서 자신을 왕이라고 하고 나를 황제라고 하더이다. 조선에서 건너간 각종 유학 서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조선의 방식도 배운 것이겠지."
"양위 받은 옥좌를 공고히 하려면 명분과 재력이 두루 필요하니, 조선에 조공을 바쳐 둘을 동시에 얻으려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조공을 엄청나게 바쳐올 것이니, 그보다 더 많은 회사품을 내려주려면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소. 하필 심요도에 병력을 배치해야 하는 지금 상황에 이렇게 조공을 바치겠다고 나와서 배로 부담이 되오. 그래서 이리 영상까지 불러 회의를 소집한 것이었소."
황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조공을 받아 주십시오. 설령 나중에 대화가 천자국을 자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를 대어 거부하게 될지라도, 지금의 조공은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 말에 호조판서 정분이 물었다.
"부담되는 지금의 조공을 거부하고 이후의 조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란 말입니까? 저들이 옥좌를 공고히 하는 것을 도와주려면 조공이 아니라 교역량을 늘려주는 방법도 있고, 정 힘든 것 같다면 선물의 형식으로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보내주어도 됩니다."
"조공이 어찌 교역이나 선물과 같겠는가. 태수와 호족들이 사사로이 방물을 바친 적은 있어도, 일본의 군주가 삼한의 군주에게 공식적으로 조공을 바친 일은 일찍이 없었네. 그런데 지금 새 나라를 세우자마자 스스로 낮추고 조선을 높이며 조공을 바치려고 하는 걸세. 이것을 받아 주어야 두고두고 조선이 대화국을 다루는 데에 이로움이 있을 걸세."
"회사품을 주는 데에 부담이 되긴 하지만, 명분과 외교에서 얻어낼 이익은 그보다 훨씬 크니 이익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네. 대신 조공품과 회사품의 품목을 잘 조절해서 부담을 줄여야겠지."
황희의 의견에 이도가 흡족한 듯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영상께 묻기를 잘한 것 같소. 그리하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한가지 여쭙고자 하는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저들이 유학의 예법을 익히고 왕으로서 황제께 조공을 바치러 온다면, 조선도 천자국의 예법을 정확히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이도의 흡족한 미소가 더욱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