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7화
267화
1449년 2월 초순 모일.
미야코. 무로마치 어소.
"적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 일부만 나를 따라 들어가고 나머지는 여기서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라!"
"예, 주군!"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린 야마나 모치토요는 조심스럽게 무로마치 어소로 들어갔다. 마당 곳곳까지 샅샅이 수색하며 어소 중앙까지 간 모치토요는 반대편 문으로 들어온 호소카와 타카모토와 마주쳤다.
"우리가 온 쪽에는 아무것도 없었소. 거긴 어땠소?"
모치토요의 질문에 타카모토가 대답했다.
"저희가 온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로마치 어소가 습격당한 것과 거의 같은 시각에, 무로마치 어소에서 불과 2리 남짓한 거리 안에 있던 야마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의 저택에도 각각 습격자들이 들이닥쳤다.
습격을 무사히 막아 내기는 했지만 무로마치 어소에는 더 많은 습격자들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된 모치토요는 급히 병력을 이끌고 무로마치 어소로 향했고, 도중에 타카모토를 만나 합류해서 왔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로마치 어소의 중앙에 있는, 아직 들어가보지 않은 건물을 슬쩍 본 모치토요가 말을 흐렸다. 쇼군인 타카모치가 침전으로 쓰는 그 건물은 사방의 장지문에 난도질이 되어있고 군데군데 들창이 떨어져있는 흉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아무 불빛도 없는 그 안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을 살펴보겠다. 횃불을 가까이 해다오."
횃불을 든 부하들에게 지시한 모치토요가 마루에 올라서자 타카모토도 따라서 올라왔다. 두 사람이 누더기가 된 장지문을 한 짝씩 잡고 양쪽으로 밀어 열자 안에서 피 냄새가 훅 끼쳐왔다.
침전 내부에는 시체들이 즐비했고, 던져지거나 다다미 바닥에 꽂혀 있는 수십 자루의 계림도가 횃불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판에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피투성이의 타카모치가 있었다.
"쿠, 쿠보."
습격자들이 타카모치를 시해하는 데 성공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탈출에 성공한 것이라 생각한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미동도 없는 쇼군에게 가까이 간 모치토요가 입을 열려고 한 그 순간, 뒤에서 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쿠보! 쿠보!"
놀란 두 사람이 뒤돌아보자, 창백한 표정의 아카마츠 노리시게가 단숨에 마루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쓰러진 타카모치 바로 옆으로 달려와 털썩 앉은 노리시게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아직 다 이루지 못하신 것이 많은데 쿠보께서 이렇게……."
"안 죽었으니 진정하게."
그 짧은 말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 타카모치는, 멍한 표정이 된 세 사람을 보더니 이어 말했다.
"몇 군데 베인 걸 빼면 다친 곳도 없어. 이 피는 다 저놈들 걸 뒤집어쓴 걸세. 지금은 한바탕 칼부림하고 났더니 기운이 빠져서 드러누워 있는 거고."
"쿠보께서 무예가 뛰어나신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많은 놈들을 혼자 다 해치우신 겁니까?"
노리시게 옆에 앉은 모치토요의 질문에 타카모치가 대답했다.
"그래. 바닥에 계림도를 전부 꽂아놓고 싸우다가 날이 무뎌질 때마다 버리고 새로 뽑아가며 싸웠네. 혹시라도 놈들이 바닥의 다다미를 들어 던진 다음 한번에 공격해 들어오면 위험했겠지만, 다행히 그 생각은 못한 것 같더군. 그나저나 이미 늦은 일이지만 몇 놈은 목숨을 붙여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야 누가 보낸 건지 알아낼 것 아닌가."
"그거라면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저택에도 습격한 놈들이 있어서 막아내고 여기로 온 것인데, 그 과정에서 붙잡힌 놈 하나가 실토하더군요."
타카모토의 말을 들은 타카모치가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앉으며 물었다.
"다행이군. 그래서 누구라고 하던가? 이번에도 남조 놈들인가? 아니면 이세나 아츠타의 신관 놈들인가?"
"……태정대신 이치죠 카네요시라고 합니다."
그 말에 타카모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1449년 2월 중순 모일.
미야코. 다이리 세이료덴(편전 겸 침전).
미카도 사다츠네는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태정대신 이치죠 카네사다가 자신을 알현하고 간 뒤로 며칠이 지났다. 마침내 이틀 전 밤에 다이리 바깥이 소란스러워졌을 때는 거사에 성공한 것이라 여기고 기뻐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고서도 카네사다가 찾아오기는커녕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불안 가득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오늘도 카네사다가 오기만을 아침부터 기다리던 사다츠네의 귀에, 장지문 앞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바로 들어오시오."
발소리가 멈추기도 전에 미리 말하고 환한 표정으로 기다리던 사나츠네는, 카네사다가 아니라 타카모치가 들어오자 그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앞에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한 타카모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죽었을 거라 생각한 타카모치를 앞에 두고 잔뜩 긴장한 사다츠네가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어…… 딱히 그런 것은 아니오. 그래, 무슨 일이오?"
"과거제 도입에 관해서 아뢰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 그거로군. 나도 경의 뜻에는 공감하오. 하지만 경도 알고 있겠지만 공가에서 다들 과거제를 반대하고 있소. 특히나 태정대신과 우대신마저 반대를 하고 있으니, 좌대신인 경의 말만 듣고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 대신도 같이 왔습니다."
타카모치가 그 말을 마치자 장지문이 열리고 무사 둘이 들어오더니, 타카모치의 좌우에 오동나무 상자 하나씩을 놓고는 다시 나갔다.
"같이 왔다더니 웬 상자만…… 히이익!"
말하던 도중에 상황을 이해한 사다츠네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창백하게 질렸지만, 타카모치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그제 밤에 무장한 괴한들이 저와 삼직칠두의 저택을 습격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각 저택의 식솔들 가운데에 다친 사람이 좀 있을 뿐, 저와 삼직칠두 모두 무사했지요. 그런데 사로잡은 놈들을 문초해 보니 배후에 과거제를 반대하던 공가 귀족들이 있지 뭡니까?"
"그,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사다츠네의 떨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듯 타카모치의 말이 이어졌다.
"공가에는 수많은 가문이 있으나 그 대다수는 후지와라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이들입니다. 특히나 다섯 섭관가 전부와 일곱 청화가 가운데 여섯, 세 대신가 가운데 둘이 후지와라 가문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니, 후지와라 가문은 700년이 넘도록 이 나라의 고관대작을 독점해 온 셈입니다. 그 탐욕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인재를 등용해 나라를 위해 쓰고자 하는 일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미카도의 신하인 저희까지 모살하고자 하니 이 어찌 사악한 간신모리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마땅한 죄를 물었습니다."
말을 마친 타카모치의 등 뒤에서 장지문이 활짝 열리고, 어느새 무사들이 가져다 쌓아놓은 수십 개의 오동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미카도의 재가를 얻은 일이라는 소리를 했지만 어찌 폐하께서 그런 일을 재가하셨겠습니까. 비록 아직 간신모리배들이 많이 남아있으나,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고자 참람된 말을 한 죄까지 물어 저희가 남김없이 처벌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나, 나를 폐위할 거, 것이오?"
사다츠네가 사시나무 떨 듯 떨며 물었지만, 타카모치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폐하께서 농을 하실 때도 다 있군요. 저도 우위문독(야마나 모치토요)에게 배운 것이지만, 본디 폐위란 군왕의 자격을 잃은 걸주 같은 이들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요순과도 같은 분이신데, 누가 감히 하늘이 두려운 것을 모르고 요순을 폐하려 들겠습니까."
타카모치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런 멍청한 수는 두지 않습니다."
* * *
1449년 3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간신들을 몰아낸 공로로 태정대신이 되었다. 문무 모두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무후가 소열제를 보필하듯 국사를 돌보고자 한다. 이를 인방에 알리고 통교하고자 조선국의 영의정께 보낸다."
타카모치가 보낸 국서를 요약해서 말하던 이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소열제를 보필하는 무후라니. 헌제를 핍박하는 조조겠지. 하지만 이것만 본다면 정말로 그럴싸하게 잘 썼소. 우리도 자세히 몰랐다면 정말로 이 내용을 믿었을지도 모르지."
국서가 도착하기 전에 조선 조정은 이미 척동상단과 무라카미 해적들을 통해 타카모치의 행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문신들의 난을 진압한 공이 있다며 자신과 수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했을 뿐만 아니라, 몰수한 귀족들의 영지와 재산을 공신들에게 내리는 상이라는 명목으로 수하들과 나누어 가졌습니다. 거기다 자신과 심복들에게 작위도 하나씩 주었는데, 심복들 것은 공작이고 본인 것은 왕이지 않습니까. 그런 크고 중요한 것을 다 빼고 이리 충신인 것처럼만 보내다니 실로 영악한 자입니다."
예조판서 김종서에 이어 영의정 황희가 말했다.
"반대로 그런 중요한 것들이 조선에 알려지게끔 한 것도 이자의 뜻일 수 있습니다. 국서를 주상전하가 아니라 영의정인 저를 대상으로 보내고 자신의 작위가 왕이라는 것은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양국의 같은 서열의 신하 간에 주고받아 격이 맞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자칫 주상전하와 자신이 왕으로서 동렬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를 피할 수 있지요. 그리고 내용도 좋은 것만 써서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답신하기 좋게 하면서, 알리고 싶은 중요한 내용들은 다른 수단으로 보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럼 영상께서는 정이대장군이 통교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 국서를 보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오?"
"예. 마침 조금 전에 전하께서 이자를 가리켜 헌제를 핍박하는 조조라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자의 목적은 정이대장군 겸 태정대신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조씨가 헌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압적으로 양위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정말로 종묘가 바뀐다면 일본이 생긴 이래로 가장 큰 일이 아닐 수 없겠군. 그렇다면 이 국서는 자신이 성공했을 때 조선이 인정해 줄 수 있냐는 것을 묻고자 보낸 것이겠소."
"맞습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한참 생각하던 이도는 이번에는 양녕에게 물었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영상과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양위 받은 이후의 명분상의 인정만이 아니라 실리적인 이익도 조선에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리적인 이익이라 하시면?"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하다시피 한 잇시키 가문은 정이대장군의 심복입니다. 조선이 교역품의 종류나 수량, 가격에서 잇시키 가문에게 유리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곧 정이대장군 세력의 이익이 되니, 양위 받기 전만이 아니라 양위 받은 이후로도 그렇게 해주어서 자신이 반대파를 모두 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겠냐는 요청인 것이지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그럼 그리해 주는 게 좋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첫째로 북조가 하나로 뭉쳐야 남조와의 균형이 유지되게 통제하기가 수월해집니다. 둘째로 선양이 이루어지면 남조보다 정통성에서 밀리게 되니, 북조는 조선에 명분과 국력을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알아서 조선의 손바닥에 들어와 주는 셈이지요. 셋째로 남북조의 국성이 달라지게 되니 일본이 합쳐질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양녕의 말에 이도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바로 답신을 보내야겠군요. 제가 아무래도 일본을 엄청 좋아하나 봅니다. 일본이 두 개가 된다고 생각하니 벌써 즐겁군요.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