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6화
266화
"환관 윤봉을 이용하시려는 것이겠군요."
이향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윤봉을 통해서 왕진더러 오이라트를 견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요. 이미 몇 년 전 왕진이 실권을 잡은 직후에 윤봉을 이용해서 면포와 해동청 조공을 조선에 유리하게 바꾸었던 적도 있으니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이라트에 화살촉을 팔면서 명나라 조정 신료들의 불만이 커진 것도 있고, 왕진도 오이라트가 너무 강해지면 자기 권력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요. 충분히 오이라트를 견제하게 만들 수 있을 듯합니다."
이향의 말이 끝나자 황보인이 입을 열었다.
"명나라가 오이라트를 잘 견제해 그 기세가 약해진다면 금나라도 거기 맞춰서 북원 세력에게 가는 지원을 줄이겠지요. 오이라트가 몽골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문제지만 칭기즈 칸의 후예인 북원 세력이 몽골을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건 더 큰 위험이니, 양쪽을 비등하게 만들어 분쟁이 지속되게 하는 게 최선이니 말입니다."
"그렇소. 만일 그렇게 된다면 금나라의 국력은 북원 세력을 적당히 지원해 줄 수 있고, 명나라 눈에는 요동을 위협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정도로만 남아 있으면 조선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소. 그 정도 국력으로 약해질 때까지는 압박해도 괜찮아진다는 것이지."
"괜찮은 방법입니다. 그럼 명나라 쪽으로는 오이라트를 압박하게 유도한다고 하고, 일본의 상황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남북조 조정 모두가 조선의 물자를 받아 쓰는 처지라 조선에서 양쪽의 세력 균형을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조 쪽으로 금나라의 물자가 넘어가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그것까지 반영해야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양녕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오. 자칫하다가는 조선과 금나라 양쪽과 모두 교역한 남조가 세를 크게 키울 수도 있소. 그리되면 북조가 밀리는 것도 문제지만, 조선이 금나라의 국력을 약하게 만든 틈을 타 남조가 쿠이섬 쪽으로 진출하고 그 과정에서 금나라의 각종 기술을 손에 넣기라도 한다면 정말 걷잡을 수 없어지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금나라의 국력을 약하게 만들 것을 감안해서 남조가 적당한 수준까지만 세를 키우게끔 교역을 조절하고, 또 그 남조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지금부터 미리 북조의 세력도 견제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그게 좀 쉽지 않을 것 같소. 며칠 전 들어온 소식인데, 북조 내부가 다시 소란스러워진 것 같소. 비록 편을 갈라 내전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란이 어떻게 수습되는지에 따라 북조가 강해질 수도 있고 약해질 수도 있소."
"그러면 바로 견제하는 대신 상황을 지켜보아야겠군요. 그런데 또 무슨 일이기에 북조 내부가 소란스러워진 겁니까?"
"북조의 정이대장군이 과거제를 도입하려고 하고 있소."
* * *
1449년 2월 초순 모일.
미야코. 무로마치 어소.
북조 조정에는 전전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정한, 아시카가 쇼군 가문을 보좌하는 열 가문이 있었다. 쇼군을 보좌하는 관직인 관령에 오를 수 있는 서열 높은 세 가문을 묶어 삼직이라 불렀고, 치안과 행정을 맡은 각종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일곱 가문을 묶어 칠두라 불렀다. 비록 칠두의 하나로서 관동관령을 독점하던 우에스기 가문이 남조에 충성을 맹세하며 칠두에서 제명되고 이마가와 가문이 대신 들어오는 변화는 있었지만, 삼직칠두 자체는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공가 귀족 놈들! 제 놈들 입맛에 맞는 명나라와 조선의 제도는 용케도 알아내서 시행하자고 떠들어 대던 건 어디로 가고, 이번에는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도니 뭐니 운운하면서 반대하고 나서다니, 그놈들에게 체면이란 게 있단 말인가?"
삼직칠두의 가독들을 모아놓고 말하는 쇼군 타카모치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보던 아카마츠 가문 가독, 아카마츠 노리시게가 말했다.
"뭐, 그놈들이 과거제를 반대하고 나설 거라는 건 쿠보께서도 예상하셨던 것 아닙니까."
타카모치와 그 부하들이 거병한 계기부터가 막내라는 이유로 발휘하지 못했던 자기 능력만큼의 몫을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에 그치지 않고, 막내라도 능력만 있다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제의 시행은 단순한 정책을 넘어서, 타카모치의 숙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과거제가 시행되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세습하며 독점했던, 지금까지 한 번도 뒤집혀 본 적 없는 그들만의 세상이 무너지게 되니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나서는 것이지요."
호소카와 가문의 젊은 가독, 호소카와 타카모토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가문이 독점한다는 점은 다르지만 무사들의 무가는 조선의 무반에 대응되고, 귀족들의 공가는 조선의 문반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조정이라고 지칭하면 무가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무가가 실권을 가지고 있지만, 무가의 각종 관직조차 실제로는 법으로 규정된 것이 아닌 탓에 무가의 큰 권력자인 관령조차 공가의 낮은 자리라도 얻고자 할 정도였고, 삼직칠두도 공가의 다섯 섭관가와 일곱 청화가를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정도로, 몇백 년간 중요 관직을 독점해 온 공가 귀족들의 명분과 권세는 절대로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가라는 놈들이 어째서 이렇게 당장의 권력에 눈이 멀어 앞을 내다보지 못한단 말인가. 이대로 난세가 이어지면 무사들이 더 권력을 잡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가는 정말로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말 것이야."
탄식하듯 한숨을 쉰 타카모치가 말을 이었다.
"그걸 막으려면 과거제를 시행해야 해. 무능한 이가 장자라는 이유로 상속을 독점하는 일도, 유능한 이가 차자라는 이유로 출가당하는 일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거기에 불만을 품고 가문이 서로 나뉘어 같은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피를 서로 뒤집어쓰며 싸울 필요도 없어. 그저 가문의 재산으로 다 같이 학문과 무예를 갈고닦고, 과거를 통해 그 능력을 증명하고 그만큼의 자리를 가져가면 되는 것 아닌가."
야마나 모치토요도 끄덕이며 말했다.
"정작 공가 귀족들도 가문에 따라 출세가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섭관가에 속하는 가문 출신은 섭정과 관백까지 오를 수 있지만, 우림가에 속하는 가문 출신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대납언이 한계입니다. 삼한에서는 진작 사라졌다고 하는 이런 악풍이 일본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니. 정말로 한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미 무사들은 거의 다 과거제에 찬성하고 있습니다. 세습 자격이 있던 여러 가문의 종가와 장자들마저도 찬성하고 나섰지요. 그게 저희 삼직칠두가 솔선해서 무가 고위 관직 독점을 포기하겠다 한 탓에 눈치가 보여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과거제가 오히려 종가와 장자에게 유리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지요."
"그렇지. 만약 장자는 과거에 붙어 관직에 올랐지만 차자는 떨어졌다면 그것은 정말로 실력에서 패배한 것이니, 장자라는 이유로 세습했을 때와 달리 차자가 불만을 내비칠 수 없으니까. 물이 넘칠 것 같을 때 물꼬를 트듯이, 세습 자격을 내려놓는 대신 더 큰 안정을 얻으려는 현명한 판단이야."
이번에는 호소카와 타카모토가 말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어리석게 반대하는 것은 공가 귀족들뿐이지요. 아마 무사들과 달리 골육상쟁의 참상을 직접 본 적이 없고, 그저 음습한 암투로만 자리를 빼앗다 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놈들이 장악한 관직과 영지가 한둘이 아니라 섣불리 압박하기도 어렵지요."
"그런데 아무리 공가 귀족 놈들이 위세를 부리려고 한들 미카도의 신하 아닙니까. 그리고 미카도는 쿠보께 꼼짝을 못하니, 미카도의 위엄을 빌어 강제로 추진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노리시게의 말에 타카모치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미카도를 압박해 조칙으로 이세와 아츠타의 신궁에 모셔져 있던 두 진품 신기를 미야코로 옮겨오게 한 일과, 남조 놈들의 습격으로 중단되었던 다이죠카이를 그 이듬해 다시 거행한 일을 두고 아직까지도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네. 그런데 과거제까지 강제로 추진해 버리면 불만이 더 커져 버리게 돼."
"하지만 결국 진품 신기 셋을 모두 갖추고 다이죠카이를 연 덕에 미카도의 권위가 매우 높아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불만을 품는단 말입니까?"
"내가 미카도를 압박했다거나, 오래 이어온 전통을 깼다거나 하는 이유는 핑계에 불과해. 실제로는 내가 신기를 옮겨오고 다이죠카이를 다시 연 탓에 권력이나 재산에서 손해를 보게 된 이들이 적당한 이유로 끌어다 쓸 뿐이지. 아마 과거제를 강행하면 그 불만 세력들에 공가가 합세하고 적당한 명분도 하나 더 생길 걸세."
"그러면 안 되겠군요. 이거 참. 무력을 쓸 수도 없으니……."
노리시게의 그 말에 타카모치는 자신의 등 뒤에 쭉 세워놓은, 지금까지 이긴 적들에게서 얻은 수십 자루의 계림도를 슬쩍 돌아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력으로 당해 본 적이 없으니 기고만장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다행히 무사들은 거의 다 찬성한다고 하니 그들의 지지를 더 모아 보고, 공가 귀족들을 만나 협상도 해 보아야지. 그래도 자네들 덕분에 조금 답이 보인 것 같으니,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해산하세. 다음에 다시 부를 때까지 몸조심들 하게나."
* * *
며칠 뒤.
미야코. 무로마치 어소.
깊은 잠에 빠져있던 타카모치는 문득 눈을 떴다. 어째서 잠이 깼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감을 믿고 가만히 일어나 앉아있던 타카모치의 귀에 아주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열 놈, 아니 스무 놈은 넘는 것 같군.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고, 중무장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야.'
발소리의 숫자와 방향, 갑옷 소리로 순식간에 판단을 마친 타카모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잔뜩 세워 둔 계림도 가운데서 하나를 뽑아 칼집은 옆에 던지고 계림도는 다다미 바닥에 칼끝을 박아 세웠다. 타카모치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다음 계림도를 뽑아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넓은 침실 바닥은 순식간에 계림도로 가득 찼다.
"서둘러!"
침실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짧은 외침이 들리더니 발소리가 빨라졌다. 하지만 타카모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박혀 있던 계림도를 뽑아 들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경무장한 무사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죽……."
무사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기도 전에 타카모치의 계림도가 허공을 갈랐다. 무사의 머리는 잘려 나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고, 넘어지려는 몸통은 타카모치가 걷어차 장지문 밖으로 쓰러뜨렸다. 뒤이어 달려든 다음 무사는 매섭게 칼을 휘두르기는 했으나 다음 순간 칼을 든 손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뼈까지 잘라서 그런지 벌써 무뎌졌군."
이가 나간 계림도를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한 타카모치는 그대로 계림도를 힘껏 던졌다. 그 칼끝이 정확히 얼굴에 박힌 무사가 뒤로 넘어지는 동안, 타카모치는 다다미에 박혀있던 다른 새 계림도 하나를 뽑아 들었다. 아직도 사방에 박혀 있는 수십 자루의 계림도가 반사하는 서늘한 달빛을 받으며, 타카모치가 짧게 말했다.
"자신 있는 놈은 들어와라. 이 타카모치가 상대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