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5화
265화
1449년 1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쿠이섬에서 시작된 일련의 변화는 일 년이 지나 마침내 조선에서도 체감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상한 낌새를 가장 먼저 느끼고 여러 방면으로 알아본 양녕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고, 이도에게 요청해 긴급하게 중신들을 소집했다.
"눈치챈 계기는 척동상단에서 들어온, 금나라에서 모피값을 올려달라고 한다는 보고였소. 그런데 우리가 모피 대금으로 치르는 것이 소금과 철이니, 반대로 말하자면 소금과 철값을 내려달라는 것이지 않소. 물론 그것만 두고 보면 소금과 철이 많이 필요하니 값을 좀 깎아 달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일 수도 있었소.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호조에 분석을 요청했지."
양녕의 말을 호조판서 정분이 받아서 이었다.
"자료를 쭉 보았더니, 금나라에서 사가는 소금과 철의 양이 매번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많이 필요하니 값을 깎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깎아 주지 않으면 안 사겠다는 태도였던 것이지요. 설마 지금까지 사서 비축한 것이 많아서 이렇게 나오나도 생각해 보았는데, 문형(정인지)의 도움을 받아 상평시에서 분석해보니 지금까지 교역한 것을 아무리 아껴 쌓아 두었더라도 이렇게 여유롭게 나올 정도로 비축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어서 양녕이 말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서 척동상단을 시켜 조사하다가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소. 금나라에서 벌써 바다 건너 일본 본토 일부. 그러니까 나하고 협상했던 남쪽 한계선까지 이미 점령을 마쳤다는 것이오."
양녕의 말에 이조판서 최만리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벌써 말입니까?"
"그렇소. 남쪽 한계선에 도달한 다음, 이 이상으로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 교역소를 열었다 하오. 그렇게 해서 남쪽으로 국경을 맞대게 된 호족들의 묵인을 받았다는군."
"원래는 자신들 북쪽에 있는 호족들이 쿠이들과의 교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쿠이들이 밀고 내려와 북쪽의 호족들을 모두 꺾어 버리고 교역소를 자신들 가까이 열어 주었으니, 국경을 맞대게 된 호족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겠지요."
"물론 꺾인 호족들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았을 것이오. 일본인들을 통해 들은 내용에서 추측한 거라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저항한 호족들은 그대로 몰살당하고 여인과 아이들은 금나라로 끌려간 것 같소. 남은 이들 역시 점령한 땅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기술이나 지리 지식을 가진 이들만 제외하면 전부 끌고가고, 그 빈 땅에는 쿠이들을 이주시켜 정착하게 한 모양이오. 조상들의 땅을 되찾고 일본인들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쿠이들의 열의가 제법인 것 같소."
"그러고 보니 일본 동북쪽 땅이 원래는 쿠이들이 살던 곳이라 하셨었지요. 그런데 교역소를 열었다면, 역시 일본인들에게 매 깃털과 모피를 파는 것입니까?"
"그 둘에 더해서 철도 팔고 있었소."
그 말에 최만리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료로 쓰기 위해 조선에서 사가는 철의 수량은 줄었는데, 몽골 말고 일본에도 철을 팔기 시작했다니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아무래도 놈들이 석탄 사용법을 익힌 것 같소. 그리고 그걸 제철에 쓰는 법도 익혀서 철 생산량이 크게 늘어난 것이겠지."
양녕의 그 말 한마디에 사정전 전체가 심각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공조판서 장영실이 경악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물었다.
"설마 조선의 기술이 넘어간 겁니까?"
"그건 아닌 것 같소. 일본인들이 쿠이들에게서 샀다는 철을 몇 덩어리 입수해서 분석해 보았는데, 그중에서 제일 좋은 것조차 일본이니까 이런 것도 좋다고 사가겠구나 싶은 정도의 품질이었소. 그것보다 조금 품질이 나으면 일본에 팔지 않고 금나라 내부에서 쓰는 것일 텐데, 내수용으로 그런 품질의 철까지 써야 할 정도라면 금나라의 기술로 생산하는 철은 질과 양 모두 조선의 철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될 것이오. 아마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 낸 기술을 쓰는 것 같소."
"하긴 석탄을 숯처럼 구워서 쓰는 것만으로도 제철에 충분히 유용한데, 그 발상이나 기술이 어려운 것은 아니지요. 그럼 금나라에서 사가는 철과 소금의 양이 줄어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겠습니다."
"그렇소. 석탄으로 철을 제련할 정도이니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건 당연히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둘 다 자급자족이 가능해져서 굳이 조선에서 사 갈 필요가 없으니 점점 사가는 양을 줄이는 것이고, 그마저도 값을 깎으려 하는 것일 테고 말이오."
"염전 없이 바로 바닷물을 끓이는데도 소금을 조선에서 사 갈 필요가 없을 정도의 효율이 나온다는 것은, 바다 가까운 곳에서 석탄이 난다는 뜻이겠지요. 이거 아무래도 쿠이섬에서 유황만이 아니라 석탄도 나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양녕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쿠이섬만이 아니라 길러미섬에서도 석탄이 난다. 거기에 쿠이섬에는 철광도 풍부하다. 그 유황과 석탄, 철광이 바로 원래 역사에서 일본이 산업화를 이뤄 낼 수 있던 원동력이기도 했지. 설마 금나라가 석탄을 이용한 제철 기술을 직접 만들어 냈을 줄은 예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때 우의정 황보인이 물었다.
"그러면 금나라는 일본에서 무엇을 사 가는 것입니까? 매 깃털하고 모피는 원래도 팔던 것이라 인접한 호족들을 달래는 목적으로 파는 것이라 쳐도, 철은 원래는 파는 게 아니라 사들이던 품목이지 않습니까."
"또 비록 품질이 낮은 철이라고 하지만 무기와 갑옷을 만들 수 있으니, 모피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에게 많이 팔면 역으로 자신들이 점령한 땅을 위협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철까지 팔아서 살 만한 게 일본에 있는 것입니까? 칠기 같은 사치품을 사려는 것은 아닐 것이고, 유황은 쿠이섬에서도 많이 나지 않습니까."
황보인에 이은 장영실의 질문에 양녕이 짧게 대답했다.
"구리를 사 간다고 하오."
"화포를 만들려는 것이겠군요."
"그런 듯하오. 화약 생산이 늘었으니 당연히 화포도 더 만들고자 하는 것이겠지. 그저 금나라 군대의 주력은 기병이라 큰 화포를 쓰기가 어렵고, 철로 화포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작은 화포라도 전부 비싼 구리를 써야 해서 효율이 떨어지니, 구리를 사 가는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오."
양녕의 말투에서 무언가를 느낀 영의정 황희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구리 말고 다른 것도 사 가는 모양이군요."
"그렇소. 일본인을 사 간다 하오."
"일본인을 사 간다니, 일꾼으로 고용이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요. 일본인이 일본인을 금나라에 팔고 금나라는 철로 값을 치르는 것이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쿠이들이 조상의 원수인 일본인들을 잡아가서 잡아먹거나 제물로 바친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 소문을 굳게 믿고 자신들을 습격해서 잡아가는 대신 이 사람들을 사 가라며 판다는 모양이오."
그 말에 황희가 경악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오랑캐들이라고 하지만 동족을 다른 나라에, 그것도 잡아먹히거나 제물로 바쳐질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팔아넘긴단 말입니까?"
"사람의 마음을 버린다면 호족들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오. 어차피 일본의 백성들이 으레 그렇듯 자신에게 속해있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성을 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이들인데, 그런 소유물 한둘을 팔고 철을 많이 얻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다 여기겠지. 그리고 철제 도구가 늘어나면 간접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으니, 같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내심 반기는 모양이오. 제비를 뽑아서 누가 팔려갈지를 결정하는 마을도 있다는 소문이 있었소."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동족을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라, 쿠이들에게 마을 사람 모두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몇 사람을 뽑아서 보내는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포장할 수 있으니 명분도 서고 마음의 짐도 덜하겠군요. 아마 실제로는 잡아먹히거나 제물로 바쳐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들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금나라에서도 이런 걸 노리고 소문을 퍼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입니다."
그 말에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여진족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인구를 다 합쳐도 조선의 1/10 정도에 불과했던 여진족은 3군과 7진이 개척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 마을을 습격해서 사람을 잡아가곤 했고, 그렇게 잡아간 조선인들에게 농사를 시키곤 했으니 금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사들이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렇게 금나라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곧 국력의 강화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죽은 이들이 많은데 농사와 사냥, 목축에 더해서 제철에 제염까지 해야 하니 일손은 턱없이 부족할 것이고, 그러니 점령지에서 끌고 가는 것은 물론이고, 철을 팔고 사람을 사기까지 하는 것일 게요. 그리고 기술자가 아닌 평범한 백성이라고 해서 농사짓는 법만 아는 것은 아니오. 각종 농기구를 만들고 고치거나, 자기 집을 짓고 유지하고 하는 기술도 갖고 있기 마련이지. 일손이나 인구만이 아니라, 그런 기술을 흡수하려는 것도 목적이지 않을까 하오. 금나라가 힘을 빼기는커녕 힘을 더 키우게 생겼으니, 빨리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오."
저마다 생각에 잠긴 탓에 찾아온 짧은 고요를 깬 것은 황보인이었다.
"비록 힘을 키우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일본인을 사와야 할 정도로 인구가 부족하니 본격적으로 금나라가 강해지려면 좀 더 걸릴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일본인을 사오건 유황을 캐서 화약을 만들건 쿠이섬에 집중해야 하니 힘을 그쪽으로 쏟을 것이고, 본토는 상대적으로 힘이 빠져 있겠지요. 그 틈을 타서 금나라와의 국경을 북쪽으로 밀어올리면 어떻겠습니까? 비록 명나라가 반발할 것이 분명하니 심요도 쪽으로는 힘들겠지만, 명나라의 눈이 닿지 않는 거솔도 쪽 국경을 밀고 올라가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예조판서 김종서가 동의하듯 말했다.
"예. 거솔도 서북쪽은 산지가 많으니 일단 진출하고 나면 방어하기 쉽고, 거솔도 동북쪽은 미타호 북쪽으로 산이 절묘하게 막아 역시 방어하기 쉬우면서도 평지가 송화강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국경을 미타호에서 거기까지 밀어 올리고 기병을 배치한다면, 상경부에서 쿠이섬까지 송화강과 흑룡강을 통해 이어진 금나라의 수운 자체를 압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어렵소. 괜히 국경을 밀어 올렸다가는 그 땅을 유지하느라 오히려 조선의 힘이 빠질 수 있을뿐더러, 애초에 압박하는 것 자체가 문제요. 금나라는 몽골의 북원 세력과, 북원 세력은 오이라트와, 오이라트는 다시 명나라와 교역이나 협력으로 이어져 있소. 또 금나라는 교역으로 일본과도 이어져 있는데, 명나라와 일본 모두 조선과도 이어져 있지. 이렇게 나라와 세력이 사슬처럼 서로 이어져 있는데, 섣불리 금나라를 압박했다가는 연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오."
세자 이향도 의견을 냈다.
"압박을 받은 금나라가 쿠이섬과 그 이남의 땅을 유지하기 힘들어지면 일본에 기술이 넘어갈 수 있소. 아니면 북원 세력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서 오이라트가 더 득세할 수도 있고 말이오."
애초에 조선이 금나라와 교역을 다시 시작했던 것부터가 명나라가 오이라트를 너무 강하게 만들어 버려서 간접적으로 견제하려던 것이었으니 지극히 가능성 크고 현실적인 일이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중신들의 표정이 다들 어두워져 있는데, 문득 양녕이 떠오른 것을 말했다.
"금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서 금나라를 직접 압박하기 어렵다면, 역으로 사슬 반대편의 명나라를 통해서 금나라를 통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