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4화
264화
"그게 무슨……."
양녕은 대답 대신 군교 하나가 건네준 나무막대를 들고서, 자신과 기아마카가 마주 앉은 사이의 흙바닥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있는 쿠이섬 남부요."
양녕이 대강 그려 나가는 지도를 본 기아마카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자가 지금 대충 그리는 쿠이섬 남부의 모습이 우리가 지금까지 파악한 것과 거의 똑같다. 지금까지 이 일대에서 조선인을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게 바다 건너에 있는 일본 본토의 일부지."
양녕이 마저 그린 지도를 본 기아마카가 긴장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바다 건너는 그렇게 생겼군. 북쪽에 아주 큰 만이 있으니 항구로 쓰기 좋아 보이오."
"그렇소. 그뿐만 아니라 서쪽 해안에는 토사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도 항구로 좋소. 일본인들이 쿠이들과 교역하는 거점으로 쓰던 곳이기도 하지."
"토사……. 혹시 호수가 있는 곳이오?"
갑작스러운 기아마카의 질문에 양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맞소. 강 하구가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그 호수는 바다와 좁은 물길로 이어져 있어서 항구로 쓰기 좋은 지형이지. 어떻게 알았소?"
"쿠이말처럼 들려서 추측해 본 것이오. 쿠이말로 토는 호수, 삼은 근처라는 뜻이오. 토삼이라고 하면 호숫가라는 뜻이지. 쿠이들이 말하기를 자기네 조상들은 바다 건너 남쪽 땅에도 살았지만 일본인들에게 밀려나 전부 쿠이섬으로 쫓겨왔다고 했는데, 그게 허풍이 아니라 사실이었나보군."
실제로도 바다 건너 일부만이 아니라 일본 동북지역 전체가 일본인들이 토착민을 밀어내며 확장한 영토였고, 정이대장군 역시 동쪽 오랑캐를 정복하는 일을 맡았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무츠와 데와 두 지역이 남북으로 길고 넓은 모양인 것 역시 북쪽으로 올라가며 점점 영토로 편입한 결과고, 원래 역사에서도 21세기까지 수많은 아이누어 지명이 남아 있었을 정도였지. 하지만 그걸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금나라에서 쿠이들의 옛 땅을 찾아준다는 명분으로 남쪽으로 더 밀고 내려오는 걸 막으려면 오히려 숨겨야 할 정도지.'
양녕은 싱긋 웃더니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렸다.
"재밌는 얘기로군. 그럼 다시 본론으로 가서, 동쪽 해안에도 비슷한 지형이 있소. 동서로 이 두 곳을 차지하고 항구로 삼으면 쿠이섬과 해운으로 긴밀하게 이어질 것이고, 좋은 거점이 될 것이오."
양녕이 지도 위에 표시한 두 지점을 보던 기아마카가 물었다.
"그 말인즉슨, 우리가 그 두 항구까지는 진출해도 된다는 것이오?"
"그렇소. 물론 항구만 얻어서는 제대로 방어할 수가 없을 것이니, 거기서 어느 정도 남쪽으로는 더 가도 좋소. 대신 내륙에는 위에 큰 호수가 있는 산이 있는데, 그 호수 남쪽으로는 진출하지 마시오. 그 남쪽으로 진출한다면 조선의 이익을 탐내는 것으로 간주하고 조선 조정이 나설 것이오."
양녕이 지도에 작게 호수를 그리며 경고하자 기아마카가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이오. 방어하기 좋게 이렇게 땅까지 더 주었는데 욕심을 더 부린다면 하늘이 노하겠지. 그 호수 남쪽으로는 진출하지 않을 것이고, 잘 방어해서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각종 전술이나 기술이 넘어가지 않게 하겠소. 그나저나 그대가 말한 산 위의 호수는 이름이 어떻게 되오? 이름을 알아야 비슷한 지형과 헷갈리지 않고 딱 거기까지만 진출할 것 아니오."
"일본인들은 토와다라고 부르오."
"그것도 쿠이말이로군. 토 와타라. 호수 바위. 산 위에 있는 호수에 어울리는 이름이오. 알겠소. 우리는 거기까지만 갖겠소."
"좋소. 비록 문서로 남길 수는 없는 내용이지만 잘 지켜 주시오."
기아마카에게 말한 양녕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남의 땅을 동의도 없이 제삼자와 지도에 선을 그어 가며 마음대로 나누어 가지고 거래하는 기분이란 게 생각보다 재밌군. 저자가 내 의도에 그대로 걸려준, 성공한 거래라서 더욱 재밌고 말이야.'
쿠이섬은 금나라가 이미 확보한 상태라 그 소유를 인정해 준 것이 맞았다. 하지만 바다 건너의 일본 본토 일부까지 진출해도 좋다고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금나라가 가진 각종 전술과 기술이 일본인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잘 지킬 수 있도록 땅을 더 주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배려가 아니라 함정에 가깝다. 쿠이섬만 해도 금나라에서 먼데 거기서 바다를 또 건너서 보급로를 유지해야 한다면 더 많은 유지비가 든다. 그리고 지금은 큰 세력 없이 호족들만이 있으니 각개격파하며 진출하기도 좋고 방어하기도 어렵지 않겠지만, 장차 관동 세력이 남조 조정을 중심으로 뭉치고 나면 분명히 금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들겠지.'
처음에는 개발에, 이후에는 방어에 많은 자원과 노력이 들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땅을 주고, 금나라가 거기에 계속 힘을 쏟게 해서 조선을 위협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양녕의 진짜 목적이었다.
"참, 하나 물어볼 게 있소."
문득 떠올랐다는 듯 던진 기아마카의 질문에 양녕이 여상스레 대답했다.
"무엇이오?"
"장차 우리가 일본인들과 교역을 좀 할까 하는데, 그건 괜찮겠소?"
"쿠이섬 남부는 물론이고 본토 일부까지도 점령하려는 것 아니었소? 아무리 일본인들이라도 자기 땅을 빼앗으려는 이들하고 전쟁과 교역을 동시에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천년만년 전쟁만 할 것은 아니지 않소. 남쪽으로 그대와 약조한 곳까지 진출하고 나면 공격을 멈추고 요새를 지을 뿐만 아니라 교역도 해야 확실하게 방어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가 뭘 팔고 사는지에 따라서 조선에도 영향이 갈 수 있지 않소."
은근슬쩍 일본과 교역을 하려 드는 의도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예 교역이 없으면 쿠이섬에서 나는 각종 물자를 노리고 공격하려 들 수 있겠지만, 전쟁을 하는 것이 교역을 하는 것보다 손해가 되는 적당한 선을 유지하며 교역을 한다면 그런 일은 줄어들지. 조선이 한때 여진족을 그런 식으로 통제했고 말이야.'
"일리가 있는 말이군. 그럼 우선 일본인들에게 팔 만한 물건은 무엇무엇이 있소?"
"지금까지는 일본인들은 쿠이들에게서 주로 매 깃털이나 모피를 사 갔다는 것 같소. 그런데 매 깃털이야 애초에 우리와 조선이 교역하던 물건이 아니니 큰 상관 없겠지만, 모피는 다르지 않소."
양녕은 기아마카의 말을 듣고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조선이 여진족들에게서 사 오던 대표 품목은 말, 해동청, 모피였지. 하지만 요즘에 말은 각지의 목장에 좋은 혈통을 추가하기 위해 아주 가끔 준마를 사오는 정도로만 교역하고 있다. 해동청은 거솔도의 넓은 서식지를 확보했고 포획에 능한 여진족들도 많이 귀화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는 수량도 줄어든 탓에 굳이 사올 필요가 없어져서 교역이 끊겼지. 하지만 모피는 달라.'
조선이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한 모피의 수요는 대폭 늘어났고, 조선인 사냥꾼들이 공급하는 양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아 오히려 금나라 건국 전보다도 많은 양을 사들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도 모피를 팔게 된다면 모피 가격이 올라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기에 긴장하고 있던 기아마카에게, 양녕은 대답을 주었다.
"두 품목 다 일본인들에게 팔아도 괜찮소."
"모피도 교역해도 괜찮다는 것이오?"
"그렇소. 여기는 금나라 본토에서 먼 곳이니, 일본인들에게 파는 모피는 대부분 쿠이섬에서 쿠이들에게 사냥하게 시켜서 얻을 것 아니오. 조선이 사들이는 모피는 육지에서 나는 것이니 크게 겹치지 않을 것이오. 애초에 금나라에서 일본인들에게 모피를 많이 팔지도 않을 것이고."
"맞소. 모피는 겨울을 나는 중요한 물자인데, 그런 걸 일본인들에게 많이 판다면 든든하게 차려입고 우리가 점령한 땅을 위협해 달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지."
"잘 알고 있군. 그럼 파는 것은 그 둘로 하고, 일본인들에게서는 무엇을 살 것이오? 쿠이들은 주로 철기를 사들였던 것 같은데, 금나라에서는 일본보다 더 좋은 철기를 생산하니 굳이 철기를 사지는 않을 것 아니오."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소."
"뭐, 아직은 일본인들이 무엇을 팔려고 할지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럼 무엇을 사는지는 그대들에게 맡기겠소. 큰 문제만 생기지 않게 잘 해주시오. 그럼 난 이만 가보겠소."
그렇게 말하고 양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아마카가 물었다.
"벌써 가시오?"
"일본인들 모르게 온 것인데 오래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일이 커지오. 볼일 다 봤으면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지."
"알겠소. 살펴 가시오."
이윽고 양녕과 조선 병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배를 타고 다시 떠났다. 배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기아마카에게 후어시가 말했다.
"저도 저 왕자가 이끄는 조선군에게 잡혀서 노비가 되긴 했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만나 보니 정말 비범한 사람이로군요."
"그러게 말이야.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이곳의 지리까지 잘 알 줄은 예상도 못 했네. 참, 말이 나온 김에 땅에 그려진 저 지도를 종이에 옮겨두라 하게. 아마도 정확한 지도일 테니, 두고두고 유용하게 쓰일 것이야."
"예, 타이지. 종이를 가져와 지도를 옮겨 그려라!"
후어시의 지시를 받은 여진족 병사들이 지도를 옮겨 그리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기아마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로 일본인들에게서 무엇을 살지가 문제로군."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적당히 사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매 깃털이나 모피나 많이 팔 예정이 아니니, 사들이는 물건도 그리 많지 않을 것 아닙니까."
후어시의 말에 기아마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애초에 우리더러 알아서 하라고 한 이유가 있네. 조선은 우리에게 철과 소금을 팔아왔는데, 조선보다 기술이 부족한 일본에서 조선보다 싸고 많게 우리에게 팔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한들 자신들의 교역에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냥 알아서 하라 한 걸세."
"그런 거였군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기아마카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더니 말했다.
"일본인들은 섬에서 오래 살아서 배 타는 데에 익숙하지?"
"그렇지요."
"그리고 일본 본토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지?"
"예."
"일본 땅에서는 구리가 많이 난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들은 왜 물으십니까?"
후어시의 질문에 기아마카가 개운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저들에게 많은 것을 사는 것이 교역의 기본이지. 일본인들에게서 무엇을 사면 좋을지가 떠올랐네."
"구리가 많이 나는지 물어보셨으니 구리를 사려는 건 알겠습니다. 화포를 만들려면 구리가 많이 필요하니, 금나라에 필요하고 일본에 많은 것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앞의 두 질문은 어떤 뜻으로 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배를 잘 타니, 구리를 많이 캐서 배로 싣고 와서 팔게 하시려는 겁니까?"
기아마카는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남쪽 바다를 보며 말했다.
"금나라에는 사람이 필요하고 일본에는 사람이 많으니, 사람을 사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