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3화
263화
1447년 7월 중순 모일.
쿠이섬 서남부 해안 모처. 일본인 정착지.
전날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마을은 단 하루 만에 살풍경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피와 화약 냄새, 고함과 비명이 가득한 가운데 건물들만이 멀쩡히 남아있을 뿐이었다.
"우리 피해는 없는가?"
"쿠이들이 몇 다치긴 했지만, 여진족 병사들은 전원 무사합니다."
물어보는 사내와 대답하는 사내 모두 쿠이식 옷 위에 약간 변형된 쿠이식 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에 찬 것은 여진식 활과 화살통이었고, 입에서 나오는 말 역시 여진말이었다.
"다행이군. 다친 쿠이들을 잘 보살펴 주고, 붙잡은 놈들을 포함한 전리품은 최대한 빨리 암바 다룬(길러미섬 남부 항구)으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진족 병사들은 물론이고, 여진말을 할 줄 아는 쿠이들에게도 다시 말해 두게. 일본인들을 습격할 때는 여진말은 금지일세."
"예, 타이지. 그럼 바로 가서 시작하겠습니다."
타이지라고 불린 사내의 이름은 기아마카. 훌룬부의 타이지(계승자), 즉 도르호치의 아들이었다. 길러미섬과 쿠이섬에서 금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은 중요했지만 언제까지고 도르호치가 도성을 떠나있을 수는 없어서, 대신 아들인 기아마카를 보냈던 것이다.
"타이지,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조금 전의 병사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기아마카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본 기아마카는 반갑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덕분에 무사하네. 후어시, 자네도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가?"
기아마카가 후어시라고 부른 것은 도르호치가 데리고 다니던, 왜구 가문 출신으로 노비가 되었다가 금나라로 도망쳐온 일본인 사내였다.
지금까지는 무예를 살려서 호위를 해왔을 뿐이지만, 쿠이섬 남부에 일본인들이 정착한 것을 알아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된 이후로 일본인 출신이라 일본어와 일본의 풍습에 두루 익숙하다는 점이 재평가되었다.
그리하여 정식으로 훌룬부의 벼슬을 받고 이번 쿠이섬 장악에 기아마카의 호위 겸 보좌로 따라오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이전에 비해 이름을 불릴 일은 많아졌는데 여진족들이 자기의 일본식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하자 자진해서 후어시(칼)이라고 불러달라 한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타이지께서 걱정해b 주신 덕분에 멀쩡합니다. 쿠이들이 생각보다 잘 싸워준 것도 있지요."
"농사도 곧잘 배워서 따라하더니 싸움도 잘한단 말인가? 하긴, 쿠이들이 키는 작지만 몸은 다부지니. 정말 좋은 소식이야. 앞으로도 그들이 일본인들과 더 많이 싸우도록 하게나."
금나라에서 쿠이들을 훈련시켜 일본인들과 싸우는 데에 투입한 것은 단순히 쿠이섬 남부까지 보낼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입니다. 쿠이들과 일본인이 서로 싸우며 사이가 험악해지고, 기반이 부족한 쿠이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금나라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또한 이번 일의 중요한 목적이니까요."
후어시가 작은 목소리로 말한 그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려면 이번 일을 금나라가 획책했다는 것이 일본에 알려져서는 안 되었기에, 전원이 쿠이식 옷과 갑옷을 차려입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여진말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만전을 기했다.
하지만 후어시만은 예외였는데, 쿠이들 편으로 넘어간 일본인 무사의 존재를 고의로 알려지게 해서 쿠이들이 어째서 갑자기 강해졌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배반자의 정체를 두고 일본인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잘 알고 있군. 그런데 그 칼은 뭔가?"
기아마카의 질문에 후어시가 손에 든 계림도를 들어 보였다.
"조금 전 전투에서 한 놈 해치우고 얻은 겁니다. 갑옷은 제 몸에 안 맞아서 바로 암바 다룬으로 보냈지만, 이 칼은 만약을 대비해서 지금 칼이랑 같이 차고 다닐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로군."
"참, 다른 마을의 위치나 방어 상태를 알아내려고 포로들을 문초하다가 재밌는 걸 들었습니다."
"재밌는 거라니, 무엇인가?"
"에미시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이유는 일본인들을 끌고 가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뭐 그런 소문이 도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기아마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맞는 게 하나도 없군. 우리 정체가 여진족이란 걸 모르는 건 그렇다 치고, 우리가 왜 일본인들을 잡아먹겠는가? 길러미섬에서 유용하게 부려먹을 소중한 인력인데! 하하하!"
원래 계획했던 흑룡강 하구의 누르간성이 아니라 길러미섬의 어투토로에서 소금을 생산하게 되고 쿠이섬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금나라가 길러미를 다루는 방법도 바뀌었다. 소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 소금으로 교역하는 대신, 내륙에서 새로 발견된 석탄 광맥을 개발하는 데에 참여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누르간성 부족을 중심으로 길러미들을 모아 누르간부를 신설한 다음 부족장의 아들인 무르키에게 버일러의 자리를 주었다.
이는 금나라의 벼슬을 받고 금나라 내륙의 일을 하게 만들어 그들을 자연스럽게 길러미섬 남부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길러미섬 전부를 길러미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어물쩍 묻어 버리려는 목적이었다.
대신 원래는 길러미들을 쓰려던 소금 생산과 길러미섬 남부 개발 인력은 쿠이섬에서 끌고간 일본인들을 쓸 계획이었다.
"맞습니다. 길러미섬만이 아니라 금나라 전체에 인력이 부족하니, 잡아먹기는커녕 죽인 일본인들도 살려서 끌고 가고 싶을 지경인데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게 기아마카와 후어시가 껄껄 웃는데, 병사 하나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와 말했다.
"타이지, 긴히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무언가?"
"여기 해안으로 배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는 많지 않지만, 배 하나하나의 크기가 엄청나게 큽니다. 금나라에서 제일 큰 배보다도 몇 곱절은 되어 보입니다."
"설마 일본인들이 작정하고 병력을 모아 보낸 걸까요?"
후어시의 말에 기아마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큰일인데. 혹시 뭐 특이한 점은 없었나?"
"배 위에 특이한 깃발을 달고 있었습니다. 가운데에는 빨강과 파랑이 섞인 동그라미가 있고, 그 주변에 검은 선들이 있는 깃발입니다."
그 대답에 기아마카는 굳은 얼굴로 후어시와 마주 보더니, 복면에 털을 달아 만든 가짜 수염을 입가에 차면서 말했다.
"그건 분명 조선의 깃발이다. 대체 조선이 갑자기 여기에는 왜 온 거지? 내가 직접 가 보겠다. 다들 쿠이로 변장해 두라고 해라."
* * *
한참 뒤.
해안가.
여차할 때 빠르게 달아나기 위해서 쿠이들은 전부 마을에서 대기하게 하고, 기아마카를 포함한 여진족들만 말을 한 필씩 데리고 해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해안에 배가 하나둘 정박하더니 무장한 조선 병사들이 먼저 내리고,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린 양녕이 기아마카를 보고 여진말로 외쳤다.
"나는 대조선국 주상전하의 형제인 양녕대군이오! 얘기를 하러 왔는데, 그대가 대장이오?"
배를 타고 온 조선인의 정체가 누구고 무슨 말을 하건간에 일본어 아니면 쿠이말로 대답하며 정체를 숨기려던 기아마카였지만, 배에서 내린 사람이 하필 금나라를 요동에서 몰아낸 양녕대군인 데다가 대뜸 여진말로 외친 탓에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양녕이 이어서 외쳤다.
"다 알고 왔으니 숨기려고 애쓸 거 없소! 일본인들 모르게 온 것이고, 공격하러 온 것도 아니고, 정말로 얘기를 하러 온 것이니 걱정 마시오!"
이윽고 호위를 받으며 가까이 온 양녕은 병사들이 내려놓은 의자에 앉더니, 마주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으시오."
기아마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의자에 앉아 복면을 벗으며 말했다.
"우리가 여진족인 건 어떻게 알았소?"
"애초에 그대들이 여진족인 것을 알아서 여기 멀리까지 온 것이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고 기아마카가 묻기도 전에 양녕이 이어서 말했다.
"이 섬과 이 북쪽의 섬을 모두 장악한 것, 여기서 화약 만들 유황을 채굴하는 것, 이 섬에 원래 살던 이들로 위장해서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것, 신무기인 폭발하는 화살을 쓰는 것도 알고 있소. 중요한 얘기를 하러 멀리 온 것이라 시간이 얼마 없으니, 괜히 시간 써 가며 숨기려고 하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군."
실제로는 양녕이 추측한 내용 가운데서도 척동상단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만을 말한 것이었지만, 시작부터 여진말로 물어보며 기세를 잡은 양녕이 연달아서 맞는 내용을 늘어놓자 기아마카는 물론이고 다른 여진족들도 양녕이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온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알겠소. 우선 통성명을 마쳐야겠지. 나는 훌룬부의 버일러인 도르호치의 아들, 타이지인 기아마카라 하오."
'작전이 먹혔군. 이제 잘만 유도해내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겠어.'
양녕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룬부의 버일러와는 만난 적이 있지만, 타이지와 만나는 것은 처음이로군. 좋소. 우선 용어를 통일해야겠지. 각 섬과 거기 원래 사는 이들을 무어라 부르시오?"
"원래 사는 이들은 쿠이라고 부르고 섬은 거기서 따서 쿠이섬이라 하오. 북쪽 섬도 마찬가지로 길러미섬이라고 부르지."
"그렇군. 여기서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니, 쿠이섬의 다른 곳은 거의 장악이 끝난 모양이구려."
"그렇소.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러 온 것이오? 무언가 더 알아내려고 온 것은 아닐 거고……."
"걱정할 것 없소. 쿠이섬은 이미 금나라의 땅이 되었는데, 내가 무슨 권한으로 남의 땅에 간섭한단 말이오?"
조선이 금나라의 유황 채굴을 견제하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긴장한 표정으로 있던 기아마카는 양녕의 대답을 듣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유황을 캐 화약을 만든다는 것도 알고 온 거 아니오? 정말로 괜찮소?"
사실 괜찮지 않지만 양녕도 어쩔 수 없었다.
'잠재적 적국인 금나라의 화약 생산이 늘어서 조선에 이로울 것은 없지. 하지만 애초에 조선에서 이렇게나 먼 곳에서 유황을 캐는 것을 무슨 수로 견제할 것이며, 견제할 수 있더라도 괜히 유황 확보를 막았다가 금나라와 조선 사이가 악화되면 그것도 복잡해진다. 지금은 조선, 명나라, 몽골, 여진, 일본 모두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세인데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연쇄적으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차라리 조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게 낫다.'
"정말로 괜찮소. 대신 한 가지 요구만 들어 주시오."
"무엇이오?"
"그대들이 쓰는 전술이나 말 품종, 제조법을 비롯한 화약 기술이 일본에 절대로 넘어가지 않게 하시오. 만일 그렇게 되면 조선이 크게 곤란해지게 되오."
갑자기 조선과 외교적인 얘기를 하게 되어 긴장하던 기아마카가 안심한 듯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일이 생기면 금나라도 쿠이섬을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오."
"좋소. 하지만 쿠이섬에서 일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더라도, 쿠이섬만 가지고는 방어가 조금 까다롭지 않겠소?"
"무슨 얘기요?"
"아무리 여진족들이 흑룡강을 끼고 살았고 지금은 이렇게 먼 섬까지 뻗어 나왔다지만, 아예 섬에서 오래 살아온 일본인들보다는 배 타는 데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쿠이섬만 가지고 있으면 일본인들이 공격해올 때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싸우거나,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싸워야 하는데 둘 다 그대들에게 크게 달가운 상황은 아니지 않소."
"뭐, 그렇지. 우리가 해전에는 익숙하지 않고, 일본인들이 배를 잘 타니 어디에 상륙할지 예측하기 어려우니 말이오."
"그렇소. 그러니 그대들이 일본인보다 유리한 기병 전력을 살려 방어할 수 있도록……."
궁금한 표정으로 듣던 기아마카는 이어진 양녕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여기서 바다 건너 남쪽에 있는 일본 본토 일부를 금나라에 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