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62화 (262/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2화

262화

1447년 6월 하순 모일.

대분부. 동부 모처(현 세키자키).

임시로 지어진 건물 앞에서 홍윤성과 마주 보고 선 양녕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무라카미 해적의 두령인 이누가미요? 드디어 만났군."

상투가 아닌, 일본식으로 뒤로 한데 모아 묶은 머리를 한 홍윤성은 임시 건물을 슬쩍 보더니 양녕을 보고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조선의 왕자가 서신을 보내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하기에 내 이렇게 오긴 했지만 아직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오. 그대가 사실은 조선의 관리이고, 나를 유인해서 해치우고 미야코로 가는 교역로를 확보하려는 것을 수도 있다는 의심은 아직도 하고 있소. 그런데 순순히 이 건물 안에 들어가 그대의 얘기를 듣기는 좀 꺼려지는군."

"이해하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무기를 찬 상태로 내 부하들 몇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겠소. 그대도 호위 몇 사람만 데리고 들어오고, 나머지는 밖에서 기다리게 하시오."

"좋소."

시원하게 대답한 양녕이 반당 몇 사람만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홍윤성도 부하 몇 사람만을 데리고 따라서 들어갔다.

준비되어 있던 의자에 홍윤성과 마주보고 앉은 양녕은, 건물 안에 있는 홍윤성의 부하와 자신의 반당들 모두 진실을 아는 이들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 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론이고 얼굴도 모르는 척하려니 어렵군."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만나 두어야 다음부터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그럼 자네는 나에게 포섭된 것이고, 앞으로 밀무역을 통해서 조선의 물자를 관동의 남조 세력에게 공급해 주기로 한 걸세."

"알겠습니다, 대군."

"좋아, 그럼 앞으로는 관동의 정세를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숨길 필요 없이 자네를 통해 알았다고 밝혀도 되는군. 어디,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남조 왜황이 보륭(寶隆)이라는 새 연호를 반포했습니다. 즉위식과 연호 반포까지 했으니, 이제 올가을에 다이죠카이만 거행하면 명실상부한 왜황이 되는 셈이지요."

"권위는 착실하게 확보하고 있군. 그나저나 연호를 제법 재밌게 지었어."

남조의 새 연호를 들은 양녕이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자 홍윤성이 물었다.

"보륭이라는 연호에 무언가 있습니까?"

"일본은 고전, 특히 주로 사서의 문장에서 글자를 취해 연호를 정하는 풍습이 있네. 최근 북조 왜황이 전례를 깨고 논어집주에서 연호를 따오기는 했을지언정, 기본적으로 중국의 문헌에서 따온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지."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보륭이라는 연호는 일본의 문헌에서 나온 것이겠군요."

빠르게 눈치챈 홍윤성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녕이 말했다.

"맞아. 일본서기라는 책일세. 온갖 허황된 소리를 그대로 실어놓은 데다가 연도까지 대놓고 조작되어 있어서 사료로서는 삼국유사만도 못하지. 하지만 어찌 되었건 일본에서는 자신들의 고대를 적은 사서로 여겨지는 책이야. 거기서 태양의 여신이 자기 손자, 그러니까 훗날 왜황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 이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며 축복해 주는 구절이지."

양녕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구절을 인용했다.

"보조지륭당여천양무궁자의. 보위의 융성함이 마땅히 하늘과 땅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리라."

원래 역사에서 훗날 제국주의 일본이 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천양무궁의 신칙'이라 부르며 일종의 왕권신수설로 삼은 바로 그 구절이었다.

"일본의 문헌인 데다가 그 구절도 의미가 깊으니, 전례를 깨서 오히려 자신의 정통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로군요."

"그런 셈이지. 충분히 세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그 정통성도 허울만 좋을 뿐이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개간 진척은 어떻다는가?"

"우선 갈대밭을 열심히 베어 내는 중이라고 합니다. 베어 낸 갈대는 엮어서 새로 짓는 궁궐 지붕으로 쓰고, 남은 건 여물로 쓸 모양입니다."

"갈대 지붕 궁궐이라. 괜찮은 선택이군."

땅을 파서 기둥을 박아넣어 세우고 풀을 엮어 지붕을 올리는 건축양식은 가야의 고상식 건축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다이죠카이에 쓰이는 임시 건물은 물론이고 이세의 신궁에도 쓰이는 권위 있는 양식이었다.

베어 낸 갈대를 궁궐 건축에 사용한다면 건축비를 크게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양식에서 나오는 권위는 물론이고 '갈대밭 가운데의 나라'라는 상징성까지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갈대를 모두 베어 내고 밑동만 남은 갈대밭은 가을이 되어 마르기를 기다린 다음 불을 놓아 태운다고 했습니다. 그 불로 물기를 날려 보낸 다음, 가까운 곳에 있는 언덕을 깎아낸 흙을 위에 덮어가며 개간할 예정이라 합니다."

"착실하게 잘하고 있군. 하긴, 충분히 세력을 키워야 목화솜 밀무역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겠지."

"예. 목화솜 밀무역 독점으로 이익을 얻어 세력을 키우려고 해도, 세력이 너무 미약하면 그 독점권을 지킬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그러니 혹시라도 일이 어그러지지 않도록, 남조 왜황 세력이 충분한 기반을 다지고 우리에게서 목화 농사를 배우기 전까지는 관동의 다른 세력이 목화 농사를 시작하지 못하게 잘 견제하게."

"물론입니다. 조선에 가져다 팔 방법이 없어서 목화솜은 안 산다고 못 박아 두고 있고, 그러면서도 면포도 적당한 가격에 팔아 주고 있습니다. 팔아서 이익을 낼 수도 없고 자급자족을 시도하는 것보다 사서 쓰는 게 더 싼 이런 상황을 유지하면 목화 농사를 하려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양녕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동쪽 거점으로 받은 항구는 어떤가?"

"아주 좋습니다. 위치도 위치거니와 만 입구를 섬이 막은 모양새가 실로 천혜의 요항입니다."

밀무역을 독점하게 해 주는 대가로 남조 세력에게서 받은, 동쪽 거점이자 기항지로 쓸 항구는 미우라 반도 서남단에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동으로 거점을 옮기자마자 눈독을 들이고 직할령으로 삼았을 정도로 잠재력이 있는 땅이었다.

"자네들이 그 땅을 받는 데에 불만을 표하는 이들은 없던가?"

"그 일대를 지배하던 호족인 미우라 가문은 영지 일부를 잃게 생겼으니 당연히 반발했지만, 정서대장군은 물론이고 태수와 호족들까지 다들 찬성했습니다."

"찬성했다고?"

"예. 남조 왜황이 제법 머리를 썼습니다. 목화솜 밀무역 독점권의 대가라는 말은 당연히 빼고, 관동까지 밀무역을 하려고 해도 기항지가 없어서 자주 오가기 힘드니 거점으로 쓸 항구를 하나 달라는 요청만 공개적으로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서 다들 한 마음으로 미우라 가문의 의견을 묵살하고 항구를 넘겨준 것이로군. 밀무역이 자주 오가야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되는데, 자기 땅도 아니고 남의 땅. 그것도 약소 호족의 땅을 내주는 데에 거리낌이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야."

"예. 그래도 아예 순순히 줄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딱 항구만 준 데다가, 제일 좋은 항구를 잃은 미우라 가문이 불만을 품고 소란을 피우는 것도 묵인하고 있습니다."

"관리를 어렵게 만들어서 쉽게 장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아마도 나중에 항구가 쇠락하면 미우라 가문이 되찾게 두고, 항구가 번성하면 자신들이 빼앗으려는 것이겠지. 자네들을 그냥 밀무역이나 하는 해적들이라고 알고 있으니 그리 생각할 법도 하지만……."

양녕은 가소롭다는 듯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감히 조선의 큰 계획을 방해하려 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지금 받은 항구인 삼기항(미사키항)은 물론이고, 그 주변까지도 확실하게 확보하도록 하게. 필요한 게 있는가?"

"제일 필요한 것이라면 역시 사람이겠지요. 관동까지 오가는 배의 선원도 그렇고, 삼기항 일대를 장악하려면 정착하고 방어할 인력도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이라……. 자네들이 일단은 쿠루시마 해적이니 조선에서 공개적으로 사람을 보내줄 수는 없네. 군율을 어기고 사형을 기다리던 이들은 이미 다 빼내 와서 거의 남지 않았고, 그렇다고 군문에 사형수가 그렇게 많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잠시 생각하던 양녕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괜찮은 방법이 하나 생각났네. 여기로 유배지로 삼자고 조정에 건의해 보겠네."

"유배지라니요?"

"지금까지는 유배형을 받은 죄인들은 북방으로 전가입거 시켜서 강제로 정착하게 했네. 하지만 자칫하면 중요한 기술이 여진족에 넘어갈 우려가 있는 데다가, 유배지라는 인상이 강해지면 자발적으로 이주해 가는 이들이 줄어들 수도 있어서 전가입거는 중단되었네. 그래서 외딴 마을이나 섬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이 또한 해당 고을이 불만을 품는 문제가 있지."

"하지만 유배는 어찌 되건 나라 안에서 보내는 것인데, 쿠루시마는 조선은 물론이고 계응국에도 속하지 않은 땅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부분을 건의하려는 것이야. 자네가 포섭된 다음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고 관동에 각종 물자를 잘 공급해 주는 조건으로, 밀무역을 묵인해주고 천호장의 자리를 내려주는 것이지."

"예전에 여진족들이 천호장 자리를 받던 것처럼 말입니까? 그러면 쿠루시마가 천호소가 되겠군요."

"그래. 그리고 천호소로 유배를 보내는 것이야. 물론 천호소 유배가 전례가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차피 유배의 모양새를 갖췄을 뿐 실제로는 중죄인을 추방하는 목적으로 쓸 것이니 조정신료들도 이해할 걸세. 또 아무리 중죄인이라고 해도 목숨은 귀한 것인지라 조선에서는 사형을 그리 쉽게 집행하지 않네. 그런 사형수들도 유배로 감형하는 대신 쿠루시마로 보내면 숫자도 그리 부족하지 않을 걸세."

"예, 대군."

우려되던 문제가 해결되자 홍윤성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자네들에게 조선의 물자를 팔고 자네들이 가져온 물건을 사들이는 데에 쓸 항구는 바로 이곳에 만들 걸세. 쿠루시마에서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오면 바로 닿는 곳이고, 칠주도 안쪽으로 들어가기에는 육로가 불편하고 주변 물살도 거칠고 위험하지. 뒤에 말한 것들은 원래대로라면 항구로서는 좋지 않은 조건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밀무역이라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니 오히려 장점이 되네. 오늘 말하고자 한 것은 이걸로 끝일세. 혹시 더 물어보거나 얘기할 게 있는가?"

양녕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홍윤성이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들은 이상한 소문이 하나 있는데, 그걸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일본 북쪽으로 이어진 섬에 에조라는 이들이 사는데, 그 섬에 건너가서 살던 일본인들하고 에조들 사이에 크게 싸움이 난 모양입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쯤 에조치(홋카이도)로 이주한 일본인들과 원래 살던 에조(아이누) 사이에 거의 백여년간 분쟁이 이어진 끝에 일본인들이 승리했지. 지금 일본은 원래 역사보다 약해져 있지만, 혹시라도 자원이 풍부한 에조치를 얻는다면 변수가 될 수 있으니 상황을 파악해둬야겠군.'

"그렇군. 그런데 그걸 이상하다고 한 이유는 뭔가? 그냥 변방에서 다툼이 일어난 것 아닌가?"

"에조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가끔은 폭발하는 화살을 쏘아 공격한다고 합니다. 제가 알기로 이것은 조선군의 전술인데,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사는 이들이 어떻게 이 전술을 사용하는 것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양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홍윤성이었지만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그조차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듣기에도 이상해서 그렇네. 알려줘서 고맙네. 이건 내가 조사해 볼 것이니, 자네는 걱정하지 말고 맡은 일에 집중해 주게."

"예, 대군."

적당히 둘러댄 양녕은 초조함을 숨기며 침을 삼켰다.

'변수 정도가 아니라 모든 일이 틀어져 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 당장 척동상단에 말해서 알아보라고 해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