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61화 (261/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1화

261화

1447년 3월 중순 모일.

한성부. 예조.

남조 세력을 지원하는 일을 두고 양녕은 예조판서 김종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제일 바람직한 상황은 남조 세력이 관동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일본 조정과 비등하게 대립하며 전란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오. 그런데 밀무역을 통해 각종 물자를 공급해주는 것만으로는 남조 세력이 일본 조정과 대등할 정도로 힘을 키우기가 어려울 것이오."

"예. 기본적으로 수단이 밀무역이니만큼 물자를 많이 보내기 어렵지요."

"그뿐만이 아니오. 원래도 왜황은 실권 없는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소. 하물며 지금의 남조 왜황은 동쪽으로 달아나다시피 한 상황이니, 본인은 물론이고 같이 따라간 남조 세력들도 실권은 고사하고 아무런 기반도 없을 것이오."

"그렇겠지요. 관동부에 속한 이들이 남조 왜황으로부터 정서대장군을 비롯한 각종 벼슬을 받기는 했지만, 거칠게 말하자면 그렇게 자신들에게 권위를 내려준 것으로 남조 왜황의 쓸모는 다한 셈이니까요. 오히려 괜히 세력을 키워서 자신들의 자리를 넘보면 안되니 실권과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게 견제할 것입니다."

김종서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더니 말했다.

"대종백의 말대로요. 들리는 소식으로는 관동부 장관과 관령, 태수와 호족들의 조율을 거쳐서 남조 왜황과 그 세력들에게 해안가 습지의 갈대밭을 정착할 땅으로 주었다고 하오."

"도읍이 될 땅인데 갈대밭을 주다니, 척박하긴 하지만 땅을 받았으니 더 달라는 소리하지 말라는 속내와, 개간에 힘을 쏟느라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의도가 너무 노골적인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이 없는데 어떻게 관동의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중심이 될 것이며, 중심이 없는데 관동의 세력들이 어떻게 서쪽의 일본 조정과 비등하게 맞서겠소."

"밀무역으로 물자를 보낼 뿐만 아니라, 남조 왜황이 관동 세력의 중심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그렇게 해서 일본을 동과 서의 두 나라로 쪼개 버리는 것이 내 목표요."

그 발상의 규모에 김종서가 감탄하듯 말했다.

"역시 대군께서는 계획하시는 것도 남다르시군요. 그런데 남조 왜황을 관동 세력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해도 조선에서 관동에 개입할 방법은 밀무역, 그것도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무라카미 해적들을 통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지 않습니까? 혹시 바로 개입할 다른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남조 세력에게 조선은 칠주도를 빼앗아 자신들을 확실하게 몰락시킨 이들이니, 설령 바로 개입할 방법이 있더라도 쓸 수 없소. 우선 무라카미 해적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협력하건 포섭하건 해보려 하오. 그들이 어느 정도 우리 뜻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간접적으로나마 관동에 개입할 수 있으니 말이오."

"직접 가신다니……. 괜찮으시겠습니까?"

김종서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양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원래도 이렇게 외교에 관해서 중요한 일은 내가 직접 갔었을뿐더러, 해적들은 내가 그간 상대해온 이들에 비하면 위험한 축에도 들지 않소."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럼 이후의 대책은 대군께서 놈들을 만나고 돌아오신 다음에 논해야겠군요."

"그래야겠지. 그럼 이 얘기는 이쯤 하고, 요즘 뭐 새롭게 진행 중인 일이라도 있소?"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던 김종서는 양녕이 주제를 돌리자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태종대왕부터 목조대왕까지 주상전하의 6대조까지의 위업을 찬탄하는 노래를 정음으로 써서 편찬하자는 건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상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셔서 없던 일이 되었지요."

그 말에 양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윤허하지 않으셨단 말이오? 설마 조종의 위업을 중국 역대 제왕의 고사와 대응시키는 구성이기라도 했소?"

"아닙니다. 온전히 위업만 찬탄하는 내용이었는데도 굳이 그런 노래를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원래 역사의 용비어천가 같은 것을 만들지 않더라도 조선의 정통성이 충분하다는 것인가.'

양녕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데, 어딘가에서 작은 종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벌써 미초(13시)군."

건물 한쪽에 있던 놓여있던 시계를 돌아본 양녕이 그렇게 말했다. 몇 번의 개량을 거쳐 마침내 시계로서 손색이 없는 정밀도로 완성된, 장영실의 역작인 기계시계였다. 아직은 양산하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는 데다가 수요도 그리 많지 않아서, 우선은 육조를 비롯한 각 관청부터 하나씩 들여놓는 중이었다.

"아, 시계를 보니 생각난 게 있습니다. 종각 옆에 누각을 짓고 큰 기계시계를 두어 시계각이라 하기로 했습니다."

"문경공(권제)이 하고자 했던 일이로군. 만들어 두면 종각에서 제때 종을 치기도 좋고, 백성들이 날씨에 상관없이 시간을 알기도 좋고, 그 외에도 두루두루 좋겠지. 하지만 그만한 것을 만들려면 적잖이 돈이 들 것인데 괜찮을지 모르겠소."

"돈이라면 괜찮습니다. 애초에 척동상단의 권 대행수가 힘닿는 한 돈을 보태겠다며 건의해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권람이 돈을 대겠다며 건의했다는 그 말에 양녕이 쓴웃음을 지었다.

'부친인 권제를 그리 싫어했으면서도, 그가 이루지 못한 시계각을 만들기 위해 돈을 내가며 건의하다니. 복잡한 애증이로군.'

"그렇다니 다행이구려. 하지만 그렇게 길거리에 큰 기계시계를 둔다면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기술이 유출될 우려가 있지 않소? 도성 복판의 종각 옆에 짓는 것이니 다른 건물로 가려서 위장할 수도 없고 말이오."

"그 문제는 사신이 올 때는 중요한 부품들을 빼서 다른 곳으로 옮겨놓아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사신이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니 겸사겸사 정비하고 수리하는 기회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애초에 사신들이 빈 누각에 큰 관심을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겠지요."

"명나라에 무슨 일이 있소?"

"아, 대군께서는 아직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삼양이 모두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결국 그리되었구려. 명나라 조정을 떠받치던 세 기둥이 모두 사라졌으니, 앞으로 환관들이 판을 치겠소."

"안 그래도 이미 태감 왕진이 황제를 등에 업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통에 신하들의 불만이 크다 합니다."

"벌써 말이오?"

"예. 강성해진 오이라트를 달래기 위해서 이미 손해를 보면서도 면포를 주고 말을 사 오고 있었는데, 오이라트에서 말값을 올리겠다고 했답니다. 그걸 조정의 반대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서 말값을 올려 줬다는군요."

"아니, 명나라에는 면포가 남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럴 리가 없지요. 그래서 면포 대신 화살촉과 종이를 판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이때쯤 왕진이 전횡을 부리고 오이라트에 화살촉을 팔아넘겼던 것은 원래 역사와 같다. 하지만…….'

"오이라트가 종이를 사 간단 말이오?"

"예. 싼 종이라도 잘 사서 간다고 합니다. 사실 종이는 큰 문제가 아니지요. 명나라에 위협이 되는 오이라트에게, 그것도 다 만들어진 화살촉을 팔다니 왕진이 권력에 비쳐서 사리 분별이 안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양녕은 천천히 고개를 젓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 화살촉보다도 종이가 더 위험할 것이오."

* * *

1447년 4월 초순 모일.

상경부. 금나라 궁궐.

"놈들이 우리가 왜 종이를 사들이는지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하오?"

쌓여 있는 종이를 보던 금나라의 한 야르하치의 질문에 옆에 서있던 버일러 도르호치가 대답했다.

"예. 눈속임으로 불경 몇 권하고 같이 사 오면서 사경에 쓸 거라고 한 덕분인지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불경 말고 종이만 사 와도 될 것 같다는군요."

"하긴, 놈들이야 화약만 사 갈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겠지."

오이라트에 명나라에서 화살촉과 같이 사들인 종이는 북원계 부족들을 통해서 금나라에서 사오는 화약값에 보태졌다. 그리고 이렇게 종이를 사들이는 진짜 이유는 당연히 불경 사경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애초에 북원이나 우리와 달리 오이라트 놈들은 조선군의 폭발하는 화살에 당해 본 적도 없으니까요. 종이가 무기가 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할 것입니다."

지난 전쟁에서 조선군이 쓰는 것에 호되게 당한 덕분에 각종 화약 무기의 개념은 여진족들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 쿠이섬에서 유황을 확보하면서 화약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개념을 알고 있는 화약 무기 가운데 기병 중심의 금나라 군대가 바로 채택해서 유용하게 쓸 수 있으면서 복잡한 가공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폭발 화살의 개발을 먼저 시작한 것이다.

"아주 좋아. 그럼 신무기의 개발은 버일러께 맡기겠소. 다른 일들은 어떻소?"

"숭가리 강(송화강) 일대에서 새로운 석탄 광맥을 또 찾았습니다. 거기서 캔 석탄 역시 길러미섬의 석탄과 같은 성질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같은 성질이라는 것은 그 석탄도 숯 굽듯이 구워 내면 제철에 쓸 수 있다는 것이겠구려."

"맞습니다. 이제 국내에서 나는 사철과 철광석, 조선에서 사온 철을 제련하는 데에는 그 석탄들을 구워서 쓰고, 길러미섬에서 나는 석탄은 소금 생산에만 써도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야르하치가 흡족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말했다.

"당초 계획과는 여러모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다 잘 풀리고 있군."

비록 조선의 소석탄 제철과 같은 것은 아니라서 효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석탄을 구워서 사용하는 독자적인 제철 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금나라의 철제 도구 생산량은 크게 늘어났다. 그것이 벌목과 조선, 채굴과 농경지 개간 등으로 이어지면서 금나라 각지가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었다.

"참, 조선 쪽에 교역하러 갔던 이들에게서 재밌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엇이오?"

"일본에 난리가 나서 나라가 반으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그걸 기회로 삼아서 이것저것 팔아넘겨서 이익을 보려는 모양입니다."

"오호.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이군."

"좋은 소식이라니요?"

도르호치의 질문에 야르하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라가 반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게 되었다면 당연히 변방까지는 신경 쓸 상황이 아니지 않겠소?"

"지금이 기회로군요."

"버일러께서도 이해하신 것 같군. 맞소. 일본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우리도 쿠이섬 남부에 정착한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쿠이섬을 완전히 금나라의 영토로 만들어야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대신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폭발 화살이 개발되면 써 보려는 것이오?"

"그것도 있지만 기왕에 일본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한 가지를 더 해볼까 합니다."

도르호치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쿠이들을 훈련시킨 다음, 쿠이섬 남부의 일본인들을 몰아내는 데에 투입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