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60화
260화
1447년 1월 하순 모일.
미야코. 무로마치 어소.
히에이산에서 끈질기게 버티던 남조 무사들이었지만 결국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순간 할복하고 죽어 간 남조 무사들이 비웃음을 담아 알려준 것이 있었다.
"신기는 훔쳐 낸 당일 이미 남쪽으로 떠났고, 지금쯤 남조 미카도의 후예와 함께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고 있을 것이라니. 제대로 당했어! 그래도 다행히 남북조의 내전은 끝났군. 이제 동서조의 내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니 말이야."
쇼군 아시카가 타카모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아카마츠 노리시게가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진품인 곡옥은 무사하고, 빼앗긴 것은 둘 다 카타시로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습니까. 카타시로를 새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
미카도가 즉위할 때마다 세 신기도 같이 계승되었지만 그 세 신기 가운데 곡옥만이 진품이었다. 진품 거울과 검은 각각 이세와 아츠타의 사당에 신이 깃드는 물건으로 모셔져 있었고, 다른 거울과 검을 카타시로, 즉 진품의 힘을 깃들인 물건이라 하여 대용품으로 삼았다. 이번에 탈취당한 거울과 검은 바로 그 카타시로였다.
"새로 만든다고 능사가 아니야. 검의 카타시로는 잃어버린 다음 새로운 검으로 대신했다고 하지만 그냥 검으로 대신한 게 아니라 이세의 신궁에서 진헌한 것을 썼네. 거울의 카타시로 역시 여러 번 화재에 휘말려 녹아내리고 일그러졌을지언정 새것으로 대신하는 건 물론이고 녹여서 새로 주조하지조차 않았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고 말이야."
"그거야 그렇지만, 신기가 하나도 없는 상태로 즉위한 적도 있고, 북조와 남조가 서로 진짜 신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적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새로 만든 다음 놈들이 가져간 건 가짜였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실물을 본 사람도 없으니 확인도 안 될 거 아닙니까."
"남북조가 서로 진짜 신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남조가 일시적으로 미야코를 점령하자마자 신기부터 챙긴 덕에 남조는 그간 거짓말이었다는 게 밝혀졌지. 물론 신기를 손에 넣었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었겠지만 말이야. 덕분에 그 뒤의 북조의 세 미카도는 신기가 없이 즉위했던 전례를 끌어와서 신기 없이 즉위해야 했었고, 남북조 내전이 끝나고 신기를 돌려받은 이후의 미카도들부터 제대로 즉위할 수 있었네. 그걸 말하는 것이지?"
"예. 이번에는 우리가 그렇게 하면 됩니다. 놈들이 가져간 게 가짜라고 한 다음 천천히 되찾으면 됩니다. 지금 우리 쪽 미카도야 어찌 되건 신기를 가지고 다이죠카이 본제사까지는 마쳤으니 정통성도 훨씬 낫고, 정말로 못 되찾겠으면 계속 우겨도 되지요. 어차피 신기를 실제로 제대로 본 사람이 없으니, 우리 것이 진짜고 저쪽 것이 가짜라고 우긴들 누가 증명하겠습니까?"
타카모치는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차라리 다이죠카이 전이나 후에 빼앗겼으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놈들이 습격한 건 다이죠카이 도중이었어. 평소에 보관하다 빼앗긴 것이라면 사실 그럴 줄 알고 가짜를 대신 놓았던 것이라고 우길 수 있네. 하지만 다이죠카이에 가짜를 썼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 다이죠카이 도중에 습격할 것을 대비해서 가짜도 가져다 놓았고, 그걸 빼앗긴 것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대비하면서 유키덴이 잿더미가 되어서 다이죠사이가 중단되는 건 대비 못 했다고 할 셈인가? 그리고 빼앗긴 가짜를 찾아서 이렇게 몇 달이나 필사적으로 히에이산을 헤집고 다녔다고 할 셈이고?"
"그건…… 안되겠군요."
"그래서 이렇게 고민 중인 걸세. 그나저나 이번 일을 두고 슈고와 호족, 귀족들은 어떤 반응인가?"
타카모치가 주제를 돌리자 머쓱한 표정으로 있던 노리시게가 표정을 바꾸어 대답했다.
"대부분 남조 놈들이 잘못했다는 반응입니다. 저들도 결국 북조 미카도와 아시카가 쇼군이 내려준 권위를 기반으로 삼은 자들입니다. 당연히 북조 미카도를 정통으로 여겨야만 하지요. 그런데 정통이 아닌 남조 잔당들이, 그것도 다이죠카이 도중에 쳐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신기를 탈취했으니 좋게 볼 리가 있겠습니까. 신관과 승려들은 특히나 화가 난 모양입니다."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군."
"그렇지만 또 마냥 쿠보의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놈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다이리까지 와서 난리를 쳤는데 제대로 막아 내지 못한 책임이 있다는 반응도 제법 있습니다."
"일단은 나를 지지하고 저쪽을 조적으로 취급하지만, 신기를 못 찾아온다면 나에게 책임을 물어 견제하겠다 이건가."
"아마도 그런 듯합니다. 그러니 빨리 병력을 모아 관동으로 가서 신기를 찾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병력이 쇼군 마음대로 잘 모여 주면 지금쯤 큐슈를 조선에게서 되찾은 지 오래겠지."
핀잔 섞인 말에 노리시게가 말없이 뒷머리만 긁자 타카모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옆에 앉아 있던, 다이리가 또 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처소인 무로마치 어소로 데려와 붙잡아 두었던 미카도 사다츠네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에게 물어봐도 마땅한 수가 없소……."
"그러십니까."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대강 대답하고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타카모치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사다츠네에게 물었다.
"이세의 신궁은 내궁에서는 야타의 거울을 신체로 삼아 아마테라스를 모시고, 외궁에서는 풍요의 여신이신 토요우케히메를 모시지요?"
"그렇소."
"아츠타의 신궁에서도 쿠사나기의 검을 신체로 삼아 아마테라스를 모시고 말입니다."
갑자기 타카모치가 두 신기의 소재를 확인하자 사다츠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맞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묻소?"
"이세와 아츠타의 신궁이 미카도의 시조와 풍요의 여신을 모시고 있으니, 이는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이 도성인 미야코에서 멀리 벗어나 있으니 이는 예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지요."
씨익 웃은 타카모치가 이어 말했다.
"두 신궁을 미야코로 옮겨오라는 조칙을 내리십시오."
아무리 타카모치에 눌려 지내는 사다츠네였지만,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두 사당의 위치는 역사가 오랠 뿐만 아니라 신탁을 받아 정해진 것이오. 아무리 미카도라고 한들 내가 함부로 옮길 수는……."
타카모치는 웃음을 거두고 귀찮다는 듯 사다츠네의 말을 끊었다.
"함부로가 아니라 안전을 위해서 옮기는 겁니다. 이세는 이곳 미야코에서는 산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 가기 어렵지만, 남조 놈들이 자리 잡은 키이와 야마토의 산지에서는 지척에 있습니다. 카타시로를 훔친 놈들이 진품인들 못 훔치겠습니까?."
그 말에 침을 꿀꺽 삼키는 사다츠네를 향해 타카모치가 말을 이었다.
"아츠타의 신궁도 마찬가지입니다. 놈들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갔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쿠마노 일대의 해적 놈들을 포섭한 것 같은데, 아츠타의 신궁은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곶에 위치해있지요. 작정하고 습격한다면 정말로 쉬운 목표입니다."
옆에서 듣던 노리시게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애초에 이세의 신궁을 옮겨 온다면 그보다 더 멀리 있고 격도 낮은 아츠타의 신궁을 못 옮겨올 것도 없지요."
"만일 미야코로 옮겨오지 않았다가 검이나 거울의 진품을 빼앗긴다면 우리가 저들보다 약하다는 소리가 될 뿐만 아니라 명분도 저쪽이 더 강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저쪽으로 넘어가는 세력이 늘어나기라도 한다면, 남북조의 두 번째 내전은 저번과는 다르게 끝날지도 모릅니다."
끝장나기 싫으면 잘 생각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그 말에, 사다츠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알겠소. 두 신궁을 미야코로 옮겨오라 조칙을 내리겠소."
* * *
1447년 3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마침내 전변항과 척동상단을 통해 조선 조정에도 알려졌다.
"남조 왜황의 자손이 칼과 거울을 훔쳐내 동쪽으로 간 다음 즉위식을 올렸다라. 그 칼과 거울이 이를테면 전국옥새와 비슷한 물건인 모양이오."
이도의 질문에 예조판서 김종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원래는 곡옥까지 합쳐서 한 벌인데, 곡옥은 못 훔쳐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즉위식을 올린 다음 관동부의 장관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일본이 동서로 나뉘게 된 셈이구려."
그렇게 말한 이도가 양녕을 슬쩍 보았다. 이번 일이 실록에 남지 않게 하려고 만전을 기한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진상을 아는 사람은 양녕과 영의정 황희뿐이었다. 다른 중신들은 물론이고 이도마저도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렇습니다. 제가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일본에서 알아서 전란이 이어지게 되어 버렸지요. 이 상황을 이용하기만 하면 되니 실로 잘된 일입니다."
"예. 하지만 이 상황에 맞춘 대책을 새로 마련하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 그것에 관해서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비록 다들 정확하게는 모르더라도 이번 일을 양녕이 일으켰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양녕이 새 대책을 마련하게 하고 그대로 추진하는 흐름을 만들어야 양녕의 계획대로 흘러갈 것이었다.
"대책을 마련하려고 조사하다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라카미 해적들이 관동부까지 이어지는 밀무역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해적들이라면 계응국이 예전에 쓰던 교역로를 틀어막아 결국 척동상단에 의지하게 만든 놈들이군요."
"예. 자기들 손으로 교역로를 망쳐 버리고 나서는 살길을 찾고자 밀무역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남조 세력은 일본 동쪽에는 딱히 기반이 없는데, 갑자기 배를 타고 관동부로 갔다는 것을 보니 무라카미 해적들이 분명 이번 일에도 관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놈들을 이용해서 남조 세력과 교역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일본 조정에 들키는 것도 감수하고 관동부로 가는 것을 도와줬을 정도니, 앞으로도 남조 세력과 밀무역을 할 것은 분명하군요. 밀무역이라……. 잇시키 가문이 일본 조정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다른 세력을 공공연히 지원해서 전란이 이어지게 할 수는 없지만, 밀무역이라면 몰래 지원하는 것인 데다가 들키더라도 우리 책임은 아니니 괜찮겠습니다."
이도의 말에 이어 김종서도 말했다.
"작은 세력도 아니고 남조의 왜황을 중심으로 한 관동부 전체이니, 잘만 지원한다면 전란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도 쉽겠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오우치 가문이 알게 된다면 불만을 품지 않겠습니까? 원래 오우치 가문이 쓰던 교역로를, 그것도 망쳐 놓은 당사자인 무라카미 해적들을 통해 조선이 다시 쓰려는 것 아닙니까."
"예전이라면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결과적으로 그 교역로가 끊긴 덕에 호족들을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소. 게다가 이제는 척동상단의 이익이 곧 계응국의 이익으로 이어지니, 밀무역이라고 해도 조선의 교역이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반길 일이오. 아마 별 불만은 없을 것이오."
그 말에 이도가 끄덕이더니 말했다.
"다행이군요. 그럼 무라카미 해적들을 통해 남조 세력을 지원하는 일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형님께서 맡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일본 조정과 남조 세력 모두가 조선과의 교역에 의지하게 만들겠습니다. 그리되면 양쪽 다 조선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어느 한쪽이 강성해져서 상대방을 이기고 일본을 통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내전으로 힘을 낭비하면서 자원을 조선에 팔고 조선의 물건을 사가게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