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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9화 (259/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9화

259화

1446년 11월 하순 모일.

이요노쿠니. 쿠루시마.

일개 해적 소굴에서 홍윤성과 그 부하들의 거점이 된 쿠루시마에는 점차 여러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성 중심부에 들어선 제법 큰 지휘소 건물에는 모치타케와 치카츠나가 다시 찾아와있었다.

"그나저나 저 발 뒤에 있는 것은 누구요?"

모치타케가 가리킨 곳에는 큰 발이 나란히 쳐져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발 너머가 어두워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렴풋한 윤곽선으로 볼 때 누군가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 스승님이시오. 이번 묘수도 저분께서 내신 것이오."

"발 뒤에 모습을 감춘 밀수꾼의 스승님이라……."

홍윤성의 무뚝뚝한 대답에 모치타케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발 뒤에 앉아있던 양녕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정체를 알면 아마도 둘 다 칼을 뽑아 들고 나를 죽이려 들겠지.'

남조 세력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더라도, 양녕이 이곳에 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시만 내려놓고 결과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아무리 세세하게 지시를 내린다 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은 일어나는 법이다. 하물며 홍윤성은 다른 이들과 달라서, 자칫하면 그런 상황에서 일을 그르쳐버릴 수 있어. 그렇다고 다른 이들을 보내자니 이번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또 늘어나 버린다.'

결국 양녕은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우선 계응국에 가고, 돌아오는 길에 몰래 쿠루시마에 들르기로 했다. 거기에 더해서 쿠루시마에서 만날 남조 세력들에게 양녕의 정체가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모습을 보고 짐작하는 것까지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 발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반갑소. 거사는 어찌 되었소?"

발 너머에서 들린 양녕의 물음에 모치타케가 대답했다.

"곡옥은 탈취하는 데 실패했지만, 검과 거울은 무사히 우리 손에 들어왔소."

"들키지는 않았소?"

"우리가 여기 오기 직전까지도 조정에서 남쪽으로 병력을 보내는 낌새는 없었소. 아마도 아직 히에이산을 뒤지고 있겠지. 놈들이 언제 알아차릴지는 모르지만 이미 동쪽으로 갈 준비는 거의 끝났으니, 우리가 여기서 돌아가는 대로 출발할 수 있을 것이오."

"다행이군."

"공께서 내신 묘수 덕분이오."

모치타케가 자신을 공이라고 불러주자 양녕이 약간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밀수꾼의 스승에게 공이라니, 내 정체가 누구인지 아시오?"

"그 세계나 이름까지야 정확히 모르지만, 고려의 황손이시지 않으시오?"

모치타케의 말에 양녕을 비롯한 조선인들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모치타케의 추측이 사실과 다르다 못해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가 버린 탓이었다.

정작 모치타케와 치카츠나는 자신들이 정확하게 맞춰서 당황하는 것이라 오해했는지 슬쩍 미소 지었다.

'설마 자신들하고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일본은 역성혁명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으니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것이 일본의 남북조 내전과 비슷한 왕위 다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조 세력인 자신들이 해적질로 세를 회복하려 했던 것처럼, 고려 세력도 밀수로 세를 회복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이걸 오히려 우리 정체를 완전히 숨기고 저들을 의도대로 써먹는 데 쓸 수 있겠어.'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결론을 내놓은 양녕이 일부러 시치미 떼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려 황손이라.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보다는 동쪽으로 간 다음 어떻게 할지가 더 시급하지 않겠소?"

양녕이 딱히 부정하지 않으면서 말을 돌리자, 양녕의 의도대로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모치타케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일단은 카마쿠라로 갈 것이오. 관동부가 거기 있기도 하고, 해로로 가기 좋은 데다가 지형도 방어하기 좋지. 애초에 그래서 카마쿠라가 관동의 중심이 된 것이겠지만 말이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이오?"

"그다음이라니?"

"카마쿠라는 이미 관동부 장관과 그 보좌인 관령의 안마당이나 다름없소. 관동부 장관이 정서대장군이 되고 카마쿠라가 도읍이 된다면 거기에 권위까지 더해지겠지. 그러면 북조가 세운 미카도들처럼 실권은 없이 위신만 주는 존재가 되는 건 피할 수 없지 않겠소?"

모치타케는 작게 끄응 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북조와 똑같은 꼴이 될 수는 없지. 혹시 무슨 대책이 있으시오?"

"관동부 장관을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되, 도읍은 다른 곳에 두시오."

"자신들의 근거지인 카마쿠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데 장관과 관령이 받아들이겠소? 우리에게 강행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무사시노쿠니 동남부 해안가로 가면 될 것이오. 카마쿠라는 장관인 아시카가 가문과 관령인 우에스기 가문 모두의 세력권이오. 하지만 무사시는 우에스기 가문의 세력권이면서 장관의 세력이 미치지 않으니, 장관이 정서대장군이 되어 너무 권력이 강해지는 것을 반기지 않는 우에스기 가문은 찬성할 것이오."

"그럼 관동부 장관은 반대하지 않겠소?"

"우에스기 가문이 자리잡은 무사시 중심부로 간다면 미카도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길 것이 명백하니 무조건 반대하겠지만, 동남부는 우에스기 가문의 기반이 크게 없는 변두리니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오. 관동부 장관이 정서대장군이 되는 것에 우에스기 가문이 반대하지 않고 그 권위를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잘 협상하게 한다면 관동부 장관도 찬성하게 할 수 있을 것이오."

이번에는 옆에서 듣고있던 치카츠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무사시 동남부가 변두리인 이유는 갈대밭만 넓게 펼쳐진 습지라서라고 알고 있소. 그런 곳에서 실권을 얻기 위한 세력을 키울 수 있겠소?"

"오히려 그런 곳이니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것이오. 그대들은 관동에 영지가 없지 않소? 그렇다고 기존의 관동 영주들에게 영지 삼을 땅을 나눠 달라고 해봤자 곧이듣지도 않을 것이오. 하지만 갈대밭만 있는 습지라면 기꺼이 줄 것이오."

"그야 뭐…… 쓸모없는 땅이니 주어도 아깝지 않고, 어찌 되건 땅을 주었으니 더는 달라고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오."

"그렇게 넘겨받은 갈대밭을 개간해 넓은 땅으로 만들고 도읍으로 삼으시오. 새 미카도의 도읍으로 이만한 곳도 없지 않소?"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듣던 치카츠나와 모치타케는 양녕의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

갈대밭 가운데의 나라(아시하라노나카츠쿠니)는 일본 신화에서 천상과 저승 사이에 있는 지상의 세계, 즉 일본을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는 천상에서 추방된 신인 스사노오와 그 자손들이 다스리고 있었지만, 천상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니니기가 내려와 그 지배권을 넘겨받아 일본을 세우고 왜황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신화가 무사시 동남부의 쓸모없는 갈대밭과 결합되자 어마어마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렇소. 이미 항구로도 괜찮은 입지를 가진 곳이니, 개간만 한다면 도읍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오. 이걸 전해 주게."

발 뒤로 들어온 홍윤성이 책 한 권을 받아 나가서 모치타케에게 주자 양녕이 이어 말했다.

"간척과 개간의 기술이 담긴 책이오."

"이런 걸 우리에게 줘도 괜찮소? 아니 그보다도 설마 이렇게 될 걸 알고 챙겨온 것이오?"

"주려고 가져온 것이니 괜찮소. 그리고 동쪽으로 천도하는 묘수를 낸 것은 나요. 당연히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계획해 둔 것뿐이지, 무슨 신통력이 있어서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오."

"이 정도면 신통력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요."

그렇게 말하며 책을 조심스럽게 넘겨보던 모치타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책에는 해당하는 내용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간척해서 생긴 땅에는 무엇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도 알려줄 수 있소? 소금기가 있으니 아무 작물이나 키울 수는 없을 것 아니오."

"소금기에 제일 잘 견디는 것은 목화와 보리고, 다음이 밀과 벼고, 그다음이 콩이오."

"그렇군. 또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까지는 밀수품값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금과 은을 주었지 않소?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금과 은만으로 대금을 치를 수는 없을 것인데, 혹시 사가고자 하는 것이 있소?"

양녕은 모치타케가 의도하는 것을 대강 짐작했지만 일단 대답했다.

"뭐든 돈이 된다면 사갈 것이오. 금은과 구리는 물론이고, 제련된 금속, 공예품, 책, 약재, 수은, 유황까지 가리지 않소. 대신 남의 무덤을 파헤쳐서 나온 물건은 절대로 받지 않을 것이오."

양녕이 도굴품은 절대 받지 않겠다 하는 것에는 도덕적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밀수가 성행하면 도굴도 따라서 성행하게 되는 법이다. 훗날 고고학이 발전한 다음 발굴되면 일본이 고대로부터 삼한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유물이 많은데, 그런 귀중한 유물들이 당장의 이익을 위해 도굴되는 것은 막아야지.'

"그럼 혹시 목화솜도 사 가줄 수 있소? 지금이야 키이 일대에서 금은이 어느 정도 나서 그것으로 대금을 치를 수 있었소. 하지만 관동으로 가면 밀수품은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인데 관동에는 광산이 거의 없다시피 하오."

"대신 간척지에서 목화를 키울 수 있으니, 그것을 팔겠다는 것이로군."

"그렇소. 관동이 있는 일본 남쪽 바다로는 조선 상인들이 오지 않아서 지금까지 목화 농사도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고, 면포나 다른 조선 물건이 필요하면 이전처럼 그냥 미야코에서 들어오는 것을 사서 썼다더군. 그런데 만일 우리가 관동에서 목화솜 교역을 한다면 세력을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걸려들었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은 양녕이 말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목화 농사를 일본에 전파한 것은 조선 조정에서 한 일이오. 즉 목화솜 교역을 조정에서 관리하는 것이지, 그러니 출처가 불분명한 목화솜을 가져다 파는 것은 우리로서는 조금 힘든 일이오."

양녕은 일부러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만 출처를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양이라면 가능할지 모르오. 물론 정말로 가능한지, 그 양이 얼마나 될지는 해봐야 알 것이오. 성공하더라도 매번 가능할지, 사 간 것을 다 팔 수 있을지의 변수도 많소."

긴장하며 듣던 모치타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는 괜찮소. 제대로 된 교역이 아니라 밀수이니 그럴 것이라는 건 생각하고 있었소."

"좋소. 한번 노력해 보겠소. 잘만 되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니 말이오."

"정말 고맙소!"

'대성공이다. 이제 이들을 통해 관동의 세력을 키워서, 일본이 동과 서로 나뉘어 다른 미카도를 섬기며 대립하게 만들어 전란이 계속 이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소."

"무엇이오?"

"그대들이 목화 농사를 지어 우리와 교역하기 시작하면 관동의 다른 이들도 끼어들고자 할 것이오. 그런데 조금 전에 그대들이 관동에서 목화솜 교역을 해 세력을 키우겠다고 한 것은, 우리와의 목화솜 밀무역을 독점하겠다는 뜻으로 한 것이오?"

모치타케는 다시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우리가 사 가서 팔 수 있는 목화솜의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대들이 농사지은 목화솜을 먼저 사 가는 것이 맞겠지. 하지만 우리가 팔 수 있는 양이 그대들이 농사지은 양보다 많아진다면 다른 이들이 농사지은 것도 사 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오. 그런데 만약 그들이 그대들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목화솜을 팔게 된다면 우리가 직접 사들이는 것보다 이익이 줄어들겠지."

침을 꿀꺽 삼키는 모치타케를 향해 양녕이 말을 이었다.

"아, 거부하려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저 그 줄어든 이익만큼 다른 것으로 채워주면 되오. 그리해준다면 기꺼이 밀무역을 독점하게 해 줄 수 있지."

"무엇을 원하시오?"

발 너머로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양녕이 대답했다.

"동쪽 거점이자 기항지로 쓸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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