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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7화 (25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7화

257화

1446년 8월 하순 모일.

성저십리. 관상대.

양녕은 관상대 내의 한 작은 건물에서 영의정 황희와 만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일부러 한성부 바깥의 관청인 관상대에서 가진 은밀한 만남이었다.

"영상께서 또 사직을 청하셨다 들었소."

"예. 이번에도 역시 전하께서는 윤허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잘 챙겨 먹고 힘내서 일하라며 고기를 내려 주셨지요."

"뭐, 알고서 청하셨던 것이지 않소. 정승의 자리에 오래 있으면 시기를 받기 마련인데, 사직을 청하고 주상께서 반려한다면 그것은 영상의 뜻이 아니라 주상의 뜻인지라 시기할 수 없어지니 말이오."

"그렇지요. 뭐, 그만큼 오래 일을 시키시겠다는 어심이기도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은 황희는 목소리를 낮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 홍윤성이라는 청년에 딸려 보낼 이들은 거의 다 군율을 어긴 자들에서 뽑아서 보내셨더군요."

"이미 파악하고 계셨구려. 그렇소. 배도 타야 하고 무기도 다뤄야 하니, 군에 있던 자들을 쓰는 것이 빠를 것이라 말이오."

"죄지은 이들을 너무 멀리, 그것도 조정에서도 모르게 보내면 배반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군율을 어겨서 사형을 앞두고 있던 이들을 죽었다고 처리하고 빼내온 것이오. 목숨을 건진 것은 물론 새 기회도 얻은 것이지. 잘만 하면 새 삶을 살 수 있는데 괜히 허튼짓을 했다가 홍윤성의 칼에 죽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오."

"배를 타고 다니면서 떳떳지 못한 짓을 하고, 욕망과 두려움으로 다스려진다니. 그야말로 해적들이군요."

"해적들의 후손을 제어하려면 해적들을 쓰는 게 제격 아니겠소."

그 말에 황희가 작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남조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었나 봅니다."

"그렇소.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새 왜황을 자기 마음대로 옹립하고, 폐위된 전 왜황이 남쪽으로 달아나 새로 조정을 세우며 남북조로 갈라졌던 것이오. 북조 왜황과 아시카가의 혈통이 지금까지 권력을 이어왔던 것이니, 왜경 일대에서 벌어진 내전은 북조 내에서의 권력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 여기 괜히 남조가 끼어들었다가는 북조 측이 잠시나마 힘을 합쳐서 남조를 끝장내려 들 수 있으니, 지금까지는 몸을 사리고 있었을 것이오."

"북조 내에서 싸움이 끝나면 어부지리를 노리려는 것이었겠군요."

"그럴 것이오. 왜황의 자리를 제대로 승계받은 게 아니라 내전에서 이긴 타카모치가 옹립한 것이니 북조 초기보다도 명분이 취약하고, 이렇게 된 것이 교대계승의 협약을 어긴 업보라고 몰아갈 수도 있소.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지금이 적시일 것이오."

양녕이 예측이 막연한 추측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때쯤 남조가 북조 조정을 향한 최후의 공세를 펼쳤다.

'원래 역사보다 북조 세력이 더 약화되었고, 칠주도에서 밀려난 키쿠치와 오토모의 두 가문도 합류했다. 쇼군직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난 탓인지 아직 공세를 시작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이렇게 원래 역사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인데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지.'

"남조가 다시 세를 일으키면 전란이 이어질 것이고,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에서 부를 얻어낼 수 있겠지요. 대신 그 뒤에 조선이 있다는 것은 철저히 숨기셔야 합니다. 홍윤성을 비롯한 이들이 조선인이라는 거야 금방 알아챌지 몰라도, 조선 조정이 얽혀있다는 것만은 하늘도 땅도 몰라야 하는 사실입니다."

"나도 알고 있소. 일본에 전란이 이어지고 조선이 그걸 이용해 이익을 보는 것은 부덕한 일일지언정, 이이제이의 계책은 천하의 모든 세력이 쓰는 것이니 큰 흠이 되지 않소. 하지만 이익을 보기 위해 전란을 일으키는 것은 역사에 두고두고 비난받을 것이니 무조건 숨겨야 하지."

"잘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황희의 말에 양녕이 피식 웃었다.

"물론이오. 그러라고 영상께서 내가 이 일을 맡게끔 하신 것 아니오. 걱정 마시오. 내가 방법을 모색하던 중에 때마침 일본에 일이 생겨 전란이 이어지게 되고, 나와 조선 조정은 그 기회를 잡았을 뿐인 것으로 후세에 남게끔 할 것이니."

"역시 대군께 맡기길 잘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일본의 수많은 태수와 호족, 귀족들은 북조 조정이 내려준 권위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남조를 오래 섬겨온 일부를 제외하고는 굳이 북조와 척을 져가면서까지 남조 세력으로 돌아설 이유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북조가 승리하는 것은 자명한 것 아닙니까?"

"물론이오.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것이오."

양녕의 말에 황희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것도 이미 대비해 두신 모양이군요. 어떤 방법입니까?"

"남조가 남조가 아니게 만들 것이오."

* * *

1446년 9월 중순 모일.

이요노쿠니. 쿠루시마.

"정말로 두 분 다 직접 오셨구려."

칠주도 정벌 최후의 전투인 오토모 가문 성 전투 직전에 탈출해 각 가문의 가독을 이은 키쿠치 모치타케와 오토모 치카츠나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걸 보고 어떻게 직접 안 오겠소."

"그러게 말이오."

'대군 말씀대로 가독들이 직접 오다니 신기하군. 누가 보냈는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올 정도로 궁금했던 건가?'

어린 나이에 사지에 남겨놓고 떠나야 했던 부친의 투구와 깃발을 받아본 두 가독의 심리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만 이해한 홍윤성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보낸 자에게서 설명을 어떻게 듣고 왔소?"

모치타케가 요시모토를 슬쩍 흘겨보더니 말했다.

"이누가미라는 자가 갑자기 나타나 쿠루시마에 머물면서, 투구와 깃발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사람을 하나씩 보내게 하라고 했다더군. 이누가미라는 이름 때문에 조선인일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었소."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소. 설령 그 물건들을 받아보았어도 조선인들이 주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의심하고 안 왔을 것 아니오."

"그건 그렇소. 사실 오긴 했지만 지금도 경계는 하고 있소. 대체 그대는 누구기에 그 투구와 깃발을 손에 넣은 것이오?"

"아직 쿠루시마 해적들에게도 말하고 있지 않았지만, 가독들께서 이렇게 직접 왔으니 얘기할 때가 되었군. 자세히는 못 말하지만 이 정도는 보여 줄 수 있소."

홍윤성의 말을 통역한 부두령이 왼쪽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팔꿈치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도관물(盜官物)이라는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관청 물건을 훔쳤다는 문신이 몸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서 정체가 중죄인들이라는 걸 눈치챈 모치타케와 치카츠나에게 홍윤성이 말했다.

"다들 어디 가서 제대로 살 수 없는 몸이오. 그래서 재주를 살려서 밀수 일을 좀 해보려고 말이오. 그래서 여기 쿠루시마에 살던 놈들을 복속시키고 자리를 잡았지."

그 말에 치카츠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 투구와 깃발을 밀수로 구했단 말이오? 그리고 밀수를 하려는데 대체 왜 그 물건들을 우리한테 보내고 사람을 보내라 한 거요?"

"질문이 많군. 우선 그 갑옷과 깃발은 알다시피 군대를 이끌었던 조선의 왕자가 전리품으로 가져갔소. 그 이후에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선물로 내려주곤 했지. 그렇게 내려진 게 이리저리 떠돌다 보면 입수할 기회가 생기오. 돈을 주고 얻건, 안 주고 얻건 말이오. 그리고 왜 가독들께 접근했는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달리 밀수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오."

양녕이 짜준 대로 말하는 것이었지만, 홍윤성의 얼굴에 거짓말하는 사람 특유의 두려움이나 긴장감이 전혀 없던 탓에 진지하게 받아들인 치카츠나가 물었다.

"밀수할 곳이 없다니?"

"원래 밀수는 교역이 없거나 금지된 곳에 가서 해야 이익이 나는 법인데, 조선은 주변 나라들과 교역이 활발해서 밀수가 끼어들 곳이 거의 없소. 그런데 딱 하나, 여기에서 나니와 쪽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만은 상인들이 거의 오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쓰지 않은 지가 오래요. 밀수하기에 딱 맞지."

"그건 알겠소. 하지만 여기에서 나니와에 이르기까지 상인들은 많소. 교역이 끊긴 지 오래라 밀수하자고 하면 반길 이들이 많지. 그런데 굳이 내륙인 야마토까지 들어와서, 그것도 이렇게 투구와 깃발까지 구해와서 상인이 아닌 우리에게 밀수를 하자고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이오?"

"밀수만이 아니라 모든 장사는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팔아야 이익이 큰 법 아니오. 남조 세력은 조선에서 들어오는 물자가 필요하겠지만 북조 쪽에서 계속 견제하는 탓에 기존의 교역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오. 기존의 교역에도 그럭저럭 참여하는 어지간한 상인들보다도 훨씬 더 밀수를 필요로 하지."

"우리 상황을 제법 알고 있구려. 그러니 접근한 것이겠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물자를 얼마나 필요로 할 줄 알고 접근해 온 것이오? 그대들이 밀수해 온 물자를 우리가 전부 사준다는 보장이 없지 않소?"

"그대들이 조만간 미야코에 쳐들어가서 미카도의 권위를 나타내는 세 신기를 빼앗아 오려면 우리가 밀수해 오는 물자를 다 사고도 부족하지 않겠소?"

그 말에 모치타케가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굳은 얼굴로 홍윤성에게 말했다.

"뭐요. 대체 그걸 어떻게 안 것이오?"

홍윤성은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그렇게 놀라는 걸 보니 확실하군. 간단하오. 북조 세력 간의 내전이 끝났으니 남조 세력에게는 지금이 놓칠 수 없는 기회인데, 힘으로 북조 세력을 이기는 것은 무리니 명분이라도 확실히 가져오는 것이 최선이지 않겠소. 그리고 가져올 수 있는 명분이라면 세 신기만 한 것이 없고 말이오. 세상의 흐름만 안다면 충분히 내다볼 수 있는 일이오."

양녕이 말한 것이 전부 맞아들어가는 것이 신기해서 지은 홍윤성의 밝은 표정을 자신만만함과 당당함이라고 생각한 모치타케가 경외감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

"지식이나 안목이 밀수나 하기에는 아까울 정도로군. 맞소. 조만간 거사를 일으킬 것이오."

"그렇군. 그런데 세 신기를 무사히 뺏어왔다고 치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이오?"

"야마토와 그 남쪽의 키이는 대대로 남조의 기반이었소. 비록 북조 찬탈자 놈들이 자기편을 슈고로 임명했지만 호족들은 여전히 하나같이 남조를 따르고 있지. 그리고 산이 많고 험하니 방어에도 유리하오."

"방어만 해서 이길 수는 없소. 그리고 산이 많고 험하다는 건 농경지가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하오. 나는 기왕이면 그쪽하고 오래 거래를 하고 싶은데 오래 버틸 수 있겠소? 아니, 우리가 밀수해 온 물건하고 교역할 물건은 충분하오?"

"세 신기가 남조의 것이 되면 전국에서 호응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오."

"다들 내전 때문에 바쁜데 무슨 호응을 하오? 그게 아니더라도 산에 박혀서 방어만 하는 이들에게 호응할 일이 뭐가 있으며, 그런 것에 상관없이 호응할 충성심을 가진 이들은 이미 다 세력이 꺾이지 않았소. 그대들을 포함해서 말이지."

듣는 이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던지는 날카로운 그 말에 모치타케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어쩌자는 것이오! 우리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것 아니오!"

모치타케의 반응이 울분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이해했을 뿐이지만, 원하는 흐름이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홍윤성이 태연하게 말했다.

"내게 그 상황을 해결할 묘수가 있소."

"무엇이오?"

소리를 질렀음에도 무덤덤한 홍윤성이 정말 거물이라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본 모치타케에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동쪽으로 달아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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