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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6화 (25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6화

256화

발치에 떨어진 귀를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사내를 본 요시모토의 두려움이 더 커졌다. 튀는 피도, 잘린 살점도, 사람이 날붙이에 죽어 가는 모습도 해적으로 살며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어째서인지 밀려오는 두려움에 요시모토가 침을 꿀꺽 삼킨 그때, 주저앉아있던 귀 잘린 무사가 순식간에 칼을 움켜쥐고는 홍윤성 쪽으로 휘둘렀다.

"죽어라!"

귀가 잘리는 고통을 참아가며 무력화된 것처럼 보이게 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위로 올려 친 회심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홍윤성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들고 있던 계림도로 흘려내 버렸다. 다음 순간 조선인 궁수가 쏜 화살이 날아와 무사의 손목에 박히며 칼을 떨어뜨리자, 홍윤성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으니 더 쏘지 마라."

"예, 두령."

홍윤성은 이어서 요시모토 쪽을 보고 다시 어눌한 일본말로 말했다.

"일 시켜야 해서 최대한 안 죽이려고 하는데 왜 자꾸 귀찮게 하느냐. 그렇게 죽고 싶으냐?"

이어서 피가 흘러나오는 손목을 움켜쥔 무사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손을 못 쓰게 됐으니 이건 필요가 없겠군."

그리고는 무표정하게 계림도를 휘둘러 무사의 목을 날려버리는 홍윤성을 보며, 요시모토는 자신이 왜 두려워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무기를 휘두를 때는 머뭇거림이 생기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두려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숙련된 무사라도 억누를 뿐 아예 없애지는 못하는 것들이지. 하지만 저놈은 아예 그런 감정이 없어. 머뭇거림도 두려움도 없으니 검술을 이론대로 구사하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요시모토의 부하들도 비슷한 두려움에 압도된 듯 누구 하나 나서지 않자, 홍윤성의 뒤에서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두령. 혼자서 너무 앞서서 가시면 위험합니다."

"부두령 왔는가. 이 정도는 괜찮아. 그나저나 조금 늦은 걸 보니 다른 곳을 다 정리하고 온 모양이군."

"예. 이놈들은 성이랍시고 쌓은 것 같지만 기껏해야 해자와 토벽으로 보강한 해적 소굴 아닙니까. 저항하는 놈들은 다 죽이고 나머지는 다 제압해뒀습니다."

요시모토는 두 사람이 조선말로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성은 함락되었고, 저항하려고 해봤자 저 사내 근처에 가기도 전에 이쪽을 겨누고 있는 조선인 궁수들의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도망치려고 한들 섬은 포위되어 있었고, 달아나려다 붙잡히면 저 감정 없는 사내에게 무슨 끔찍한 짓을 당할지 몰랐다.

"항복하겠습니다."

결국 포기한 요시모토가 무기를 내려놓고 천천히 바닥에 엎드리자, 요시모토의 부하들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서 바닥에 엎드렸다.

* * *

잠시 후.

쿠루시마는 조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애초에 이 일대의 해역에서 그나마 안전하고 넓은 물길 바로 옆에 있고, 남쪽의 피난항인 하시하마만의 입구를 막아 주는 요충지라는 이유로 쿠루시마 가문의 거점이 되었을 뿐, 쿠루시마 자체는 그리 큰 섬이 아니었다. 독도의 동도보다도 작았으니, 아무리 독도처럼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고 해도 많은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했다. 당연히 병력도 얼마 없으니 전투도 순식간에 끝난 것이었다.

"그럼 살아있는 놈들은 다 모은 것이지?"

"예, 두령."

부두령의 대답에 끄덕인 홍윤성은 시체 세 구를 쌓아 만든 의자에 앉은 채로 앞을 둘러보았다. 성의 규모가 규모인지라 제대로 된 망루나 장대도 없어서, 성 중심부로 끌려와 바닥에 꿇어 앉아있는 쿠루시마 해적들이나, 홍윤성을 비롯한 조선인들이나 8월의 햇살을 그대로 받고 있었다. 투구를 벗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홍윤성이 입을 열었다.

"더우니 빨리 시작하지. 부두령, 통역하게."

"예."

"너희가 이 해역 물길을 잘 알고 배도 잘 탄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제일 앞에 꿇어 앉아있던 요시모토는 부두령의 통역을 거쳐 던져진 질문에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 근방에서는 저희가 제일 배를 잘 탄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남들 몰래 다닐 수 있는 물길도 잘 아느냐?"

"예. 많이는 못 하지만 가끔 몰래 조선에 가서 밀수도 합니다."

"조선?"

"예. 서쪽으로 해안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어서, 설탕을 밀수해 오곤 합니다."

두려움 탓인지 술술 말하는 요시모토의 대답을 들은 홍윤성은 이해했다는 듯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조선까지 간다는 소린가 했더니 칠주도를 말하는 거였군. 정작 조선에서는 칠주도에 아직도 약간 위화감이 있는데 오히려 일본에서 이미 조선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 나라라는 생각이 아직 자리 잡지 않은 모양이야. 좋아, 그러면 여기 쿠루시마는 한동안 우리가 거점으로 쓰겠다."

"예?"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요시모토에게 홍윤성의 짧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왜? 거점으로 쓰기 안 좋은 요소라도 있나?"

애초에 네 의견 같은 건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는 의미가 담긴 그 말에 요시모토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니지만 이요의 슈고인 코노 가문의 거점이 여기서 서쪽입니다. 그래서 코노 가문 사람들이 거점과 미야코를 오갈 때면 항상 이곳 쿠루시마를 거쳐 갑니다."

"자주 오가느냐?"

"자주는 아닙니다. 지금 누가 가독이 될지를 둘러싸고 가문 안에서 다툼이 있어서, 코노 가문원 대다수는 미야코에 가 있습니다."

"저마다 조정의 지지를 얻어내 가독이 되려는 것이겠군. 그럼 가끔 그놈들이 거점에 왔다 갈 때만 안 들키면 된다. 우리의 존재는 너희가 알아서 잘 숨겨라. 들키더라도 우리는 배가 튼튼하고 무기가 강하니 탈출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신 일을 그르친 죄로 너희는 모두 죽이고 갈 것이니까."

가을에는 고등어가 제철이니 낚시해서 구워 먹겠다는 듯한 말투로 살해예고를 한 홍윤성은 바짝 얼어붙은 요시모토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냥 시키는 것은 아니고, 일을 잘하면 보상도 줄 것이다. 우선 지금 바로 줄 게 있다. 가져와라."

홍윤성의 말에 부하 몇이 큰 궤짝 하나를 들고 와 내려놓더니 뚜껑을 열어 안이 보이게 했다. 그 안에는 새하얀 면포 여러 필이 차곡차곡 들어가 있었다.

"가져라."

"이, 이걸 다 말입니까?"

"그래. 우선 돛으로 써라. 너희가 돛으로 쓰던 풀 엮은 거적에 비하면 훨씬 가볍고 질겨서 좋을 것이다. 내가 시킬 일을 하려면 배가 좋아야 한다. 남는 건 팔아서 자금으로 써라. 대신 이건 어디까지나 너희가 밀수해 온 물건이어야 한다. 절대 들키지 마라."

홍윤성의 말을 들으면서도 요시모토의 눈은 여전히 궤짝을 향하고 있었다. 교역로가 활발하던 시절, 해적질과 통행료 갈취를 할 때 가장 쏠쏠했던 품목이 바로 면포였다. 궤짝에 담긴 면포를 다 합치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거점을 빼앗긴 건 빼앗긴 거고, 죽은 사람은 죽었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돈을 많이 벌어야 죽은 부하들 기일에 향이라도 피워 줄 것 아닌가. 다들 그러려고 목숨 걸고 해적질하는 거고 말이야.'

이번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감으로 침을 꿀꺽 삼킨 요시모토가 물었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야마토노쿠니 남부의 요시노로 가서, 여전히 남조를 따르는 가문들에게 여기로 나를 만나러 사람을 몰래 보내라고 해라."

갑자기 홍윤성이 남조 얘기를 꺼내자 요시모토의 기대감은 다시 당황스러움이 되었다.

"예? 해적인 저희가 가서 말한다고 그자들이 사람을 보내겠습니까? 면포를 어디서 얻었는지도 숨겨야 하는 상황이니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니,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아마 안 올 것 같습니다."

"그냥 가면 당연히 안 오겠지. 이것들을 가져가라."

홍윤성이 손짓하자 다른 부하들이 또 무언가를 가져와 앞에 내려놓았다. 화려하지만 조금 낡은 일본식 투구 두 개였다.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던 요시모토는 각 투구 옆에 접혀 있는 비단 깃발 하나씩이 놓이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란히 놓인 매 깃털 문장과 은행나무꽃 문장……. 설마!"

"알아보는구나. 그래, 키쿠치 가문과 오토모 가문의 문장이지. 조선군의 손에 죽은 키쿠치 가문 가독 키쿠치 카네토모가 마지막으로 썼던 투구와 깃발, 마찬가지로 조선군의 손에 죽은 오토모 가문 가독 오토모 치카아키의 방에서 찾아낸 투구와 깃발이다. 다른 가문은 몰라도 키쿠치와 오토모 두 가문은 이걸 본다면 사람을 안 보낼 수 없을 거다."

그 말에 요시모토의 눈빛이 흔들렸다. 30여 년 전 남조 잔당의 해적질을 참다못한 조선이 명나라의 동의를 받아 큐슈에 대병력을 보냈다.

쇼니와 시마즈 두 가문은 배신하고 조선으로 넘어갔고, 남조 충신이던 키쿠치와 오토모 가문은 끝까지 결사 항전했다. 하지만 결국 두 가문 모두 가독이 전사하고 모든 영지를 잃었고, 일부 생존자들만이 겨우 피신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다른 남조 충신 가문들의 도움을 받아 요시노에 정착했지. 무사라면 모르는 자가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자가 어떻게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거지? 아니, 그 전에 이자는 대체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뒤늦은 질문입니다만, 공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그게 왜 궁금하지?"

곱상하고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한 시선과 차가운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낀 요시모토가 황급하게 둘러댔다.

"그, 이제부터 공을 섬기고 지시를 따르려면 제가 먼저 공께 말을 걸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어찌 불러야 예법에 맞는가 해서 말입니다."

"그 얘기였군. 어떻게 부르는지라……. 하긴 이놈들은 내 부하가 아니라 도구니까 날 두령님이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지. 어디 보자, 내가 듣기로 너희 왜인들은 귀신을 많이 섬긴다고 하는데, 그중에 가장 센 놈이 누구냐?"

혼잣말하던 홍윤성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요시모토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같은 이요지만 여기 근처는 아니고, 이요의 슈고인 코노 가문이 사는 지역에 유명한 요괴가 있습니다. 팔백 년을 살아 신통력을 얻은 너구리인데, 다른 너구리 요괴 팔백 마리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입니다. 그 너구리 요괴들은 하나같이 둔갑에 능해 사람으로 변해서 남을 돕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지요."

"일본 너구리도 조선 너구리처럼 둔갑을 하는군."

재밌다는 듯 말하는 홍윤성의 옆에서 통역하던 부두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둔갑에 능해 정체를 숨기고 남을 돕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는 너구리들과 그런 너구리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너구리라. 저희하고 닮았군요."

"듣고 보니 그렇군. 좋아. 그럼 그걸로 하지."

"그걸로 한다니요?"

부두령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은 홍윤성은 다시 요시모토를 내려다보며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 귀신의 이름이 무엇이냐?"

"흔히들 이누가미님이라 부릅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너희는 나를 이누가미님이라 불러라. 만약 그 너구리 귀신이 제 이름을 빼앗겼다고 화를 내면 나를 찾아오라고 해라. 가죽을 벗겨서 옷을 해 입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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