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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5화 (255/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5화

255화

1446년 6월 하순 모일.

청주부. 회인현 호점산 모처.

회인현 남부 호점산에는 오래된 산성이 있었다. 고려 말, 내륙지역까지 휩쓸고 다니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지어졌던 성인 탓에 조선이 건국된 이후로는 쓰일 일이 없었고, 양녕이 칠주도를 정벌해 왜구가 근절된 뒤로는 그대로 버려지다시피 했다. 덕분에 세상의 눈을 피해 몰래 누군가를 만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스승님. 데려왔습니다."

무너진 석축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양녕은 자신을 부르는 반당(호위병)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철저히 비밀리에 온 탓에 몇 사람만 데려왔을 뿐이지만, 그만큼 믿음직한 이들로 데려온 만큼 양녕을 스승님이라 불러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에는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

"수고했네. 자네는 이리 와서 앉게."

반당이 데려온 청년이 자신의 앞에 와서 바닥에 앉자, 그 곱상하고 앳된 얼굴을 잠시 보던 양녕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홍윤성이라 합니다."

대답을 들은 양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이름 때문에 회인현까지 온 것이었다.

일본에 전란이 이어지게 하라는 이도의 지시를 받고 쓸 만한 사람을 비밀리에 수소문하던 도중, 회인현에 사는 홍윤성이라는 인물을 접하고 흥미가 동했던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홍윤성은 양녕이 폐세자된 해로부터 몇 년 뒤에 태어난다. 내가 많은 것을 바꾼 탓에 그대로 태어났을 거라는 기대는 딱히 하지 않고 있었는데 출신과 이름, 나이까지 그대로라니 안 와볼 수 없지.'

"그렇군. 사정이 있어 내 이름은 말할 수 없지만, 자네가 무예가 출중하며 용맹하고 두려움이 없다고 들어 이렇게 찾아왔네."

'물론 원손(이홍위)께서 그러하시듯 이름과 출신만 같을 수도 있다. 만일 내가 필요로 하는 게 이자의 사회적 지위나 출신이라면 이대로 써도 되겠지만, 중요한 건 이자가 원래 역사하고 비슷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야.'

"과찬이십니다."

"겸손해서 좋군. 그런데 지금은 자네가 글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 내가 들은 자네의 무예라면 무과를 보면 급제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문과를 목표로 하는 이유가 있는가?"

정체 모를 높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물어보는데도 홍윤성은 전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말했다.

"이름을 널리 드높이기에는 문관이 되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하긴, 전란이 멈추었고 심요도와 거솔도도 안정되었으니, 무관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가 쉽지 않아졌지."

간단한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해야 할 차례였다. 양녕은 홍윤성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맹자께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 가지의 근본 되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네. 그 가운데서 측은지심에 대해 말해 보겠나?"

양녕이 자신의 글공부 정도를 확인해 보려 한다 생각한 홍윤성이 바로 대답했다.

"공자께서 비유하시기를,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에게나 걱정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난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이의 부모와 가까워지려는 목적도, 칭찬을 얻고 비난을 피하려는 목적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마음이 곧 인의예지에서 인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측은지심입니다."

정석과도 같은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양녕이 불쑥 물었다.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만약 들개에 물려 죽은 새끼를 발견한 어미 고양이가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또 태어나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강아지를 여전히 품고 있는 어미 개를 본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홍윤성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만 말해도 괜찮네."

홍윤성이 말하려는 순간 끊은 양녕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누구에게나 생겨나는 마음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자네에게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니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에게는 남들과 달리 측은지심이라는 것이 없어. 있더라도 아주 미약하겠지. 아마 자네도 그 사실을 알고는 출세하려면 들키지 말아야 한다 생각했을 걸세. 그러니 경서에 통달한 다음 그 내용을 완벽하게 그대로 따라 한다면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말이야. 내 말이 맞는가?"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홍윤성의 얼굴에는 들켰다는 두려움이나 걱정의 기색은 전혀 없고, 그저 신기해하는 표정만이 가득했다.

'홍윤성. 원하는 것을 남에게서 빼앗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데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던 자. 계유정난의 공신이 되어 영의정까지 오르고 천수를 누렸지만 받은 벌이라고는 기껏해야 후손이 없던 것뿐이었던 조선 초 최악의 사이코패스. 내 앞의 이 청년이 원래 역사의 그 홍윤성과 같은 존재인지는 몰라도, 그 성격을 가진 건 확실하다. 어쩌면 더 악질일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결론을 내린 양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더 좋은 일이다.'

"다 아는 법이 있지. 그나저나 자네가 솔직하게 인정했으니 나도 한 가지 사실을 털어놓아야겠군. 내가 바로 양녕대군일세. 어디 가서 만났다고 말하지는 말게나."

그 말에 홍윤성의 눈이 커졌다.

"높으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양녕대군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정체를 잘 숨기긴 했나 보군.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서, 조정의 문신들은 하나같이 경서에 통달한 이들일 뿐만 아니라 자네에게는 없는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네. 자네가 아무리 경서에 통달해 측은지심이 있는 척을 한들 그 근본적인 차이까지 극복할 방법은 없어. 아마 그들에게 금방 들키고 말 것이야."

"그렇다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장차 하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정체를 숨기고 적임자를 찾아다니던 것인데, 지금 만나 보니 자네가 적격인 것 같네. 그 일을 맡아 주겠나?"

양녕의 말에 홍윤성의 눈이 빛났다.

"어떤 일입니까?"

"그건 말할 수 없네. 거부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용을 말할 수 있을 일이라면 내가 정체까지 숨기고 적임자를 찾아다니겠는가? 다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은 알려 주겠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면 출세도 못 하는 것 아닙니까?"

"자네가 측은지심이 없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려면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쪽이 좋지 않겠나?"

측은지심이 없다는 것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말에 홍윤성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양녕이 이어서 말했다.

"대신 중요한 게 있네. 이 일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내 안위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야. 자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움직이곤 하지?"

"맞습니다. 누가 귀찮게 굴거나 하면 참기 어려울 때가 많지요."

"그걸 참아 내야 하네. 만일 못 참고 일을 그르치면 나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어. 만일 해동의 오 태백이라는 내 명성에 누가 될 짓을 한다면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자네를 죽여 없앨 걸세. 하지만 내가 맡긴 일을 잘 해낸다면, 나중에는 세상에 드러나는 부귀를 누릴 수 있게 해 주겠네."

죽이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홍윤성은 전혀 두려움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중에는 출세할 수 있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참아 보겠습니다. 제게 그 일을 맡겨 주십시오."

그 대답에 양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좋아.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우선은 자네를 도울 이들을 좀 더 모아야 하니, 그동안 일본말과 검술을 배우고 있게."

* * *

1446년 8월 하순 모일.

이요노쿠니. 쿠루시마.

원래 역사에서 훗날 세토 내해라 불리게 되는 해역은 하루에도 몇 번씩 뒤집히는 해류가 수많은 섬 사이를 지나며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급류를 만드는 탓에, 익숙하지 않으면 항해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위험했다.

이 해역 서쪽의 여러 섬에 자리 잡은 무라카미 가문은 그런 지역적 특징을 역으로 살려 해적질을 생업으로 삼았다. 급류에 휘말린 선박을 약탈하고, 좁은 수로에 관문을 설치해 통행료를 뜯어내었다. 대신 돈을 받으면 자신들이 아는 안전한 물길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나 그 돈벌이도 이제 옛말이 되어 버렸다. 16년 전 계응국이 척동상단을 통해 미야코 북부로 이어지는 교역로를 새로 만들면서 이 해역을 오가는 교역선이 급감해 버렸다. 그나마 조금 오가던 교역선들도 오우치 가문이 아키 지역을 확실하게 장악하면서 씨가 말라 버렸다.

결국 무라카미 가문의 세 분가 가운데 아키 지역에 가까운 북쪽 섬에 자리 잡았던 두 분가는 쇠퇴하고, 남쪽 섬인 쿠루시마에 자리잡은 분가, 통칭 쿠루시마씨만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빨리 퇴로라도 뚫어라! 섬에서 나가기라도 해야 된다!"

그런 쿠루시마 분가의 가독인 쿠루시마 요시모토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서쪽에서 나타난 큰 선박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기대감이 먼저 앞섰다. 화포가 보이지 않으니 상선이 분명했고, 서쪽에서 오는 것을 보면 조선에서 오는 물자를 싣고 있을 것이니 오랜만에 두둑하게 뜯어낼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저히 무리입니다! 놈들의 배가 섬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다급하게 뛰어온 부하의 말에 요시모토가 발로 바닥을 구르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쿠루시마 해적들은 무장을 갖추고 배에 나눠 탄 다음, 서쪽에서 나타난 선박들의 앞을 틀어막으러 호기롭게 나섰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날아오는 화살에 하나둘 죽어 나갔다. 어떻게든 근접전으로 넘어가면 유리해질 것이라며 겨우 다가간 배도 있었지만 배의 높이 차가 너무 커서 갑판으로 넘어갈 수 없었고, 그대로 튼튼한 선체에 들이받힌 배는 처참하게 박살 나 물 위를 떠다녔다.

서쪽에서 온 선박들은 그대로 거점인 쿠루시마를 포위했고, 거기서 하선한 사내들은 순식간에 성을 점령해 들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요시모토가 있는 성 중심부뿐이었다.

"해적질이 본업이라더니 생각만큼 잘 싸우지는 못하는군."

계림도에 묻은 피를 휘둘러 털어내며 나타난 홍윤성을 본 요시모토가 말했다.

"저놈이 아무래도 대장인 것 같다. 조선인이지만 군인들은 아닌 것 같으니, 저놈만 어떻게 해치우면 각개격파할 수 있을 거다!"

근거 없는 그 말에 무사 셋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홍윤성을 향해 동시에 돌진했다. 조선인 궁수들의 화살이 날아오기 전에 홍윤성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성공했지만, 무기를 제대로 휘둘러보기도 전에 홍윤성의 계림도가 번쩍였다.

"아악!"

칼을 떨어뜨린 무사가 손가락 하나가 사라진 왼손을 부여잡으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계림도 끝으로 눈을 깊게 찔린 무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다 절명했다. 칼등으로 옆구리를 세게 맞고 바닥에 주저앉은 마지막 무사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지 가슴을 부여잡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마지막 무사의 투구를 벗겨내더니 태연하게 한쪽 귀를 잘라낸 홍윤성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두려움에 휩싸인 요시모토에게 귀를 던지며 어눌한 일본말로 말했다.

"네가 대장이냐? 항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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