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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4화 (254/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4화

254화

의식을 잃은 요시노리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여전히 심장이 뛸 때마다 목의 상처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이미 몸속의 피 대부분이 빠져나간 상태라 조금 전처럼 요란하게 피 안개를 만들지는 않았고, 그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으… 으윽."

요시노리의 옆에 주저앉아있던 히코히토는 그 모습을 보고 창백하게 질렸다. 피붙이끼리도 칼을 겨누고, 자결을 종용하고, 망설임 없이 거기에 따르는 무사들의 습성을 모르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시노리에게 강제로 미카도로 옹립되고 나서도 그런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던 탓에 충격에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끝났구려."

반면 사다츠네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선혈이 낭자한 광경을 처음 보는 것은 형인 히코히토와 마찬가지였지만, 두려움과 포기, 이 지루한 내전이 막을 내린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오히려 침착했던 것이다.

칼집에 계림도를 집어넣은 타카모치는 그런 사다츠네를 웃는 얼굴로 보며 말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다 끝났습니다. 다시 이 일본 땅에 한 분의 미카도와 한 사람의 쇼군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시대가 열렸음을 기념해 새 연호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쇼코인께서 승하하신 이후로 마지막 연호였던 오에이를 50년 넘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

50년이 넘게 한 연호가 쓰이는 이례적인 상황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호를 건의하는 것은 조정이지만 승인자가 미카도가 아니라 쇼군이었던 탓이었다.

네 형제가 저마다 쇼군을 자처하며 내전 중이니, 괜히 조정에서 연호 얘기를 꺼냈다가는 저마다 자기야말로 조정에서 인정한 진정한 쇼군이라며 연호를 승인하겠노라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가는 자칫 조정까지도 내전에 휘말릴 위험이 있으니 조정에서는 입을 다물었고, 각 세력도 괜히 연호 얘기를 꺼냈다가 다른 형제가 연호를 승인하게 되면 명분에서 불리해지니 아예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타카모치가 연호를 새로 정하자고 하는 것은 형제들을 모두 꺾고 자신이 유일한 쇼군이 되었다는 선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겠소. 그럼 조정에 명을 내려서, 고전에서 좋은 구절을 골라 연호 후보를 몇 정해서 올리라 하겠소."

고전의 문장에서 두 글자를 취해 연호를 정하는 일본의 독자적인 풍습과 조정에서 올린 연호 후보 가운데 쇼군이 결정하는 관례를 따르는 말이었으나, 사다츠네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이제 내가 유일한 미카도가 되었다고 하지만 이건 날 강제로 옹립한 타카모치가 경쟁자를 모두 없앴기 때문이지, 내가 정통성이 있어서가 아니야. 아무리 유폐한다고 하지만 형님이 살아있는 한 차남인 내 명분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더 강한 명분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타카모치가 갈아치우려 들 수 있다. 그러니 빨리 안전을 확보해야 해.'

조정이 자신의 명을 따르는 사례를 한 번이라도 만들면 조정에서 자신을 미카도로 인정한 셈이 되고, 그것으로 타카모치가 자신을 쉽게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조정, 나아가서는 귀족들까지도 자신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굳이 차남인 사다츠네를 옹립한 시점에서 타카모치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연호란 본래 군주가 시간마저 통치한다는 의미로 미카도가 선포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건의하고 미카도가 승인할 수는 있어도, 일개 신하인 쇼군이 승인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을지라도 앞으로는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정론일 뿐만 아니라 미카도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말이기도 했지만 그 말을 들으며 사다츠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기서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의 말이 맞소."

"또한 폐하께서 이제 정진정명한 일본의 미카도가 되셨음을 연호를 제정하여 만방에 알려야 하는데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습니다. 마침 제가 폐하께 정이위인 좌대신의 자리를 받았으니 저 또한 조정의 신하입니다. 그러니 제가 조정의 대표로서 연호를 건의하여도 문제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했다.'

사다츠네의 머릿속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울렸다. 타카모치는 연호를 승인하는 권위 하나를 자신에게 돌려주고, 조정 장악이라는 더 큰 것을 얻으려는 속셈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타카모치는 명분은 물론이고 권력까지 있으니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지금까지 연호 제정에 한 번도 안 쓰인 고전이 있습니다. 저도 최근에야 읽었는데, 이런 좋은 책이 왜 널리 안 알려져있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좋은 구절이 많았습니다. 거기서 취한 연호를 건의 드리고자 합니다."

"알겠소. 무슨 책이오?"

"논어집주라 합니다."

* * *

1446년 6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타카모치가 마침내 다른 형제들을 모두 꺾었다는 중요한 소식은 조선에도 빠르게 전해졌다. 그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중신들을 소집한 이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곧 결판이 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정말로 결판이 날 줄은 몰랐소. 그럼 그 타카모치라는 자가 왜경의 내전에서 승리한 것이오?"

척동상단에서 바로 올라온 긴급한 소식인 탓에 예조판서 김종서가 아니라 호조판서 정분이 대답했다.

"완승은 아닙니다. 자신이 옹립한 왜황에게 새 연호를 선포하게 하고, 자기는 물론 수하들에게도 벼슬을 내리게 하여 자신이 정이대장군 자리를 둘러싼 내전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것처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타카모치를 인정하지 않는 각 세력 잔당들이 남아 있어서 자리를 확고히 하는 데에는 조금 걸릴 것이라 합니다."

"하긴 완승을 거두었으면 굳이 서두를 것도 없지. 지금 왜황의 형이 유폐되어있다고 했으니, 잔당들은 그자를 구출해서 새로운 기회를 노리려고 하겠소."

대화를 듣던 김종서가 말했다.

"하지만 잔당들이 아무리 애써 봐야 이미 기울어진 판세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세력을 회복해 타카모치와 비등해지는 것은 지극히 확률이 낮고, 시간을 끄는 게 고작일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렇게 낮은 확률에 기대느니, 차라리 타카모치가 어떤 자인지를 알아내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잠시 말을 흐렸던 이도가 정분에게 물었다.

"타카모치가 왜황에게 선포하게 한 연호가 무엇이오?"

"경정(經政)이라 합니다."

이도는 이번에는 양녕에게 물었다.

"예전에 일본에는 고전의 문장에서 글자를 취해 연호를 정하는 풍습이 있다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이도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형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잘 되고 있었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 생각보다도 빠른 것 같습니다."

이도와 양녕이 왜 웃는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중신들을 보던 세자 이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논어집주요."

그러자 우의정 황보인이 바로 이해하고 말했다.

"안연편이로군요."

정확하게는 안연편에서 제나라의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해 물어본 부분이었다. 공자는 그 질문에 '군군신신부부자자', 즉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하는 것이라 대답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주석이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도의 큰 이치(大經)이고 정사(政事)의 근본이다. 그 구절에서 따온 것이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연호를 정해 왜황에게 선포케 한 것을 보면, 타카모치가 자기 권력을 확고하게 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겠군요."

영의정 황희의 말에 이향이 대답했다.

"그렇소.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다. 즉 왜황은 권위만을 내려주는 꼭두각시고 정이대장군이 모든 실권을 가진 예전 상황으로 돌아가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 구절을 골랐을 것이오."

"혹시라도 왜황이 국정을 돌보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의미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좌의정 하연의 말에 양녕이 고개를 저었다.

"일본에서는 도교의 책인 포박자에서 연호를 따온 적은 있어도 논어나 맹자에서 연호를 따온 적은 없소. 천명이니 역성혁명이니 하는 것이 왜황의 권위를 흔들 수 있어서겠지. 그런데도 오랜 풍습을 무시하고 논어집주에서 연호를 딴 것을 보면 그럴 확률은 얼마 되지 않소."

"그렇군요. 하긴, 왜황에게 권력을 돌려줄 것이라면, 그 권위가 흔들릴 위험을 감수하면서 옛 풍습을 무시할 이유가 없지요."

"그리고 본래 연호는 조정에서 건의하고 정이대장군이 승인하는 것이 관례였소. 그러던 것을 이번에는 왜황이 승인하게 했지. 권력을 돌려줄 생각이 없으면서 이렇게 했다는 것은, 자신은 대신 조정을 장악하겠다는 뜻일 것이오."

"큰일입니다. 그 타카모치라는 자가 단순히 정이대장군의 자리를 얻을 무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명분을 다루는 노련함도 있으니, 자칫하다가는 다시 일본을 하나로 뭉치려 들 수도 있습니다."

하연의 말에 정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지금 일본에서 얻어내는 부는 조선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다시 하나가 된다면 반드시 서쪽으로 칼끝을 향할 것입니다. 칠주도까지 오지는 못하더라도, 계응국의 석견 은광만 빼앗기더라도 우리에겐 치명적입니다."

이도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든 일본에 전란이 이어져야 조선이 유리하오. 하지만 지금 조선이 일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은 전변항과 잇시키 가문을 통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데, 그들을 통해 일본에 전란을 유지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오."

"잇시키 가문도 전란이 이어져야 각종 물자를 왜경에 팔아 이익을 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새 정이대장군인 타카모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타카모치의 눈치를 보지 않는 다른 가문을 새로 지원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정분에 이어 김종서도 말했다.

"예, 교역을 통해 다른 가문을 지원한다면 잇시키 가문이 불만을 품을 것이고, 그냥 물자를 주어 지원한다면 일본의 전란을 이어지게 하려는 목적이 너무 드러나 버립니다."

중신들의 말을 들은 이도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향과 다른 중신들도 저마다 무언가 생각하느라 사정전 안이 잠시 고요해진 그때 황희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양녕대군에게 맡겨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지목당한 양녕은 물론이고 이도도 당황한 표정으로 황희를 보았다. 그 순간 이도와 양녕 둘 다 황희의 예리한 눈빛에서 그 숨은 의도를 읽어 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형님께 말이오?"

"예. 양녕대군은 일본이 지금의 정세를 이루는 데에는 관여한 바가 많으며, 지금까지 일본만이 아니라 여진족, 명나라, 몽골에 이르기까지 외교를 통해 나라를 이롭게 하는 많은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에도 적임자가 아닐까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도의 질문에 양녕이 대답했다.

"영상이 추천하고 주상께서 맡겨 주시는 일인데 제가 어찌 감히 거부하겠습니까? 비록 저 역시 지금 당장은 마땅한 방법이 없으나 반드시 대책을 마련하여 이번 일을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양녕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씨익 웃고 있었다.

'실록에 남아서는 안 되는 일은 내가 적격이긴 하지. 영상이 날 아주 잘 알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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