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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3화 (253/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3화

253화

1446년 5월 초순 모일.

한성부. 척동상단 본부.

양녕이 한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자, 척동상단 대방 한명회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그래. 아주 맛이 좋군. 이게 정확히 무슨 차인가?"

맛으로 이미 지금 마신 차의 정체를 알아차린 양녕이었지만, 모르는 척 던진 그 질문에 한명회가 신나서 대답했다.

"홍차에 유락(버터)을 넣고, 설탕을 조금 넣은 것입니다. 경원부나 거솔도에 사는 신백정들은 달여낸 홍차에 가축 젖을 넣어서 먹는다는 말을 듣고 궁금해졌는데, 아무래도 한성부에서는 가축 젖을 바로 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축 젖으로 만든 것을 대신 넣으면 어떨까 했는데, 수유(치즈)를 넣자니 냄새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유락을 넣어 본 것입니다. 제 입에는 약간 비릿해서 설탕도 넣었지요."

'찻잎을 찌거나 덖지 않고 시들게 두어서 만든 차가 발명된 것도, 추운 지역에서 그 차를 오래 달여내 물을 섞어 마시는 것도, 찻물 색을 따라 홍차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원래 역사 그대로라 신기했는데 이제는 밀크티까지 나오는군. 신기한 일이야.'

"나도 신백정들이 그리 마신다는 말만 들었지 직접 마셔본 적은 없는데 이렇게 마셔보게 되는군. 물론 가축 젖을 유락으로 대신한 것이니 맛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매우 맛있네. 어쩌면 가축 젖을 바로 넣은 것보다 이게 맛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양녕의 칭찬에 한명회는 더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좋겠군요."

"그나저나 아무리 가축 젖보다야 구하기 쉽다고 하나 유락 역시 귀한 것이라 약으로 여겨지기도 하지 않는가. 자네도 구하느라 돈을 제법 들였을 것인데, 이런 걸 내가 훌쩍 마셔도 되는지 모르겠군."

"대군께서 종두법을 만드신 덕분에 나라를 어지럽히던 대창진이 물러갔고, 척동상단 일에도 지장이 없었고, 저 또한 종두를 맞아 대창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 대접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이것이 약이라면 애쓰신 대군께서 몸을 보하실 수 있으니 마음 쓰지 마시고 드셔도 됩니다."

"고맙네."

"그나저나 오늘은 어떤 일로 오신 겁니까?"

한명회의 질문에 양녕이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일찌감치 종두를 맞긴 했지만, 주상께서 혹시 다른 온역도 돌고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사람을 만나지 말라 하셨었네. 덕분에 종두법 개량을 돕거나 책을 쓰면서 지냈는데, 해가 바뀌어 봄이 되고도 대창진은 물론이고 다른 온역도 퍼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시고 주상께서 이제 괜찮다고 하셨어. 그래서 그간 못 들은 세상 소식을 좀 들어보려고 왔네. 척동상단이 조선에서 제일 소식이 빠른 곳 아닌가."

"전하께서 실로 대군을 소중히 여기시는군요. 사실 척동상단이라고 해서 별다른 소식이 있지는 않지만……. 아, 유학자들 사이에서 한문이 아니라 삼한말로 노래를 짓는 게 유행한다고 합니다."

"삼한말로 짓는 노래라면 영언(시조)을 말하는 것인가?"

"영언만이 아니라 더 길게 쓰기도 하고, 모여서 읊기도 하고 정음으로 써서 책을 만들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정음이 반포된 지 몇 년 지나긴 했지만 지금껏 그런 적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조정에서 삼한말에 관한 책을 새로 찍기라도 한 겁니까?"

양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집현전에서 운서를 통일하고 문법을 정리하는 일이 끝나기는 했지만 아직 책으로 찍지는 않았네. 하지만 어째서인지 대충 짐작은 가는군."

"무엇입니까?"

"이번에 조정에서는 대창진이 명나라에서 넘어왔다는 것과 종두법을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렸네. 대창진이 귀신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옮는 병임을 알려 두려움을 줄이고, 종두를 안심하고 맞게끔 내 권위를 빌린 것이지."

"그게 삼한말로 노래 짓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까?"

"있지. 백성들이 보기에는 명나라에서는 대창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조선까지 퍼졌지만, 조선에서는 종두법을 만들어 내어 대창진을 물리친 셈이네. 그럼 조선이 명나라보다 뛰어나다고 여겨도 이상할 것 없지 않겠나?"

"그 생각이 한문이 아니라 삼한말로 노래를 짓는 것으로 이어졌다는 말씀이로군요. 하긴 다른 병도 아니고 큰 마마라 불릴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대창진이니 더욱 그렇겠습니다."

"마침 통일된 운서와 정리된 문법이 책으로 찍혀 나올 것이고, 사전, 그러니까 삼한말을 정리한 책의 편찬도 거의 끝나 가고 있어. 이 책들이 인쇄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가면 삼한말로 노래를 짓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걸세. 어쩌면 이렇게 삼한말로 노래를 짓는 것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고 자리 잡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차를 마시려던 한명회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일본 쪽 일은 들으셨습니까?"

그 질문에 양녕도 찻잔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대답했다.

"일본 쪽 일이라니?"

"잇시키 가문을 통해 입수한 일본 내부 상황입니다. 입수하자마자 조정에 보고를 올려서 대군께서도 아시는 줄 알았는데 아직 대군께는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요."

"척동상단을 통해 일본 소식이 전해졌다면 내가 세상 소식을 구하러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어떤 상황인가? 어차피 나중에 조정에서 전달받는다고 하더라도 미리 알아두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쇼군의 자리를 두고 전임 쇼군의 네 형제가 각각 세력을 이끌고 내전을 벌이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러던 것이 형제 중 둘은 패망해 목숨을 잃었고, 남은 둘이 그 세력을 각각 흡수해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각자 자기 쪽이 정통이라며 왜황도 하나씩 옹립해서, 지금 일본에는 왜황이 둘이라 합니다."

그 말에 양녕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허,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그래서 어떻게 되어가는가?"

"각지의 영주나 호족들도 내전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각자 누구를 쇼군으로 지지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병력을 보내지는 못하는 모양입니다. 실질적으로 왜경 근처 영주와 호족들 일부만 참전한 탓에 지리멸렬한 전투를 10년 넘게 이어왔는데, 이번에는 결판이 날 것 같다고 합니다."

"누가 이길지는 모른다는가?"

"백중세라서 잇시키 가문도 모르겠다 합니다."

"결판이 날 것 같지만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을 상황이라니, 잇시키 가문이 어느 한쪽 편을 잘못 들었다가 그쪽이 패배하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상황인 것 아닌가?"

양녕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한명회가 말했다.

"저도 그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몸을 잘 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잇시키 요시츠라 말로는 잇시키 가문이 실제로도 조선과의 교역을 도맡아서 하는 데다가, 독점 교역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도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은 덕분일 것이라 합니다."

"괜히 잇시키 가문을 자극했다가 상대편에 붙어 버리면 자신은 교역품이 끊기고 상대편은 풍족해져서 불리해질 수 있으니. 거기에 자신이 쇼군이 된 다음 권력 유지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조선에서 사 오려면 독점 교역권을 가진 이들이 무사해야 하니, 어느 쪽 편을 들지 않더라도 딱히 뭐라 하지 않는 것인가. 그나마 다행이군."

"예. 조정에 보고한 내용도 대략 이 정도입니다."

"알겠네. 조만간 주상께서 이 일로 나를 부르실 테니, 그때까지 몇 가지 대책을 생각해 둬야겠군."

말을 마친 양녕은 생각에 잠긴 진지한 표정으로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 * *

1446년 5월 중순 모일.

미야코 모처.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한때 기엔이라는 법명의 승려였던 자신을 쇼군으로 옹립한다며 찾아왔던 무사들은 하나같이 실력도 뛰어나고 충직한 이들이었다.

그 뒤 10년도 더 넘게 이 지루한 전쟁에서 자신을 보필해 왔지만, 지금은 모두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아무리 마지막 전투라지만 무슨 생각으로 직접 나서나 했는데, 검술이 아주 대단하구나."

가까운 시체에서 잘라낸 옷자락으로 계림도에 묻은 피를 닦아내던 검은 갑옷의 사내가 그 말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칭찬 고맙소, 형님. 형님 부하들도 실력이 제법 괜찮았소. 몇몇 검술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라 자칫하면 당할 뻔했지 뭐요. 움직임은 다 기억해 뒀으니 나중에 따라서 써봐야겠소."

그렇게 말하며 피 묻은 옷자락을 던지는 사내의 이름은 아시카가 타카모치. 요시노리의 배다른 동생이고, 한때는 기쇼라는 이름의 승려였다.

"옆에 서 있는 자네는 어째 낯이 익군그래."

요시노리가 말을 건 것은 타카모치의 옆에 서 있던 장신의 사내였다. 타카모치처럼 화려한 장식은 하나도 없고 천 부분에도 먹물을 들인 검은 갑옷을 입은 그 사내는 요시노리의 질문에 당당하게 말했다.

"아카마츠 노리시게라 합니다. 저번 전투에서 전사한 공의 부하인 아카마츠 미츠스케가 제 맏형이지요."

이름을 들은 요시노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네놈이 그 호소카와 가문 저택에서 칼부림을 벌였다는 놈이구나."

"저를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라이고인에 승려로 계시던 쿠보를 쇼군으로 옹립한 것도, 쿠보께 검술을 처음 가르쳐드린 것도 바로 저입니다. 지금은 저를 훨씬 뛰어넘으셔서 오히려 제가 배워야 할 정도지만 말입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 말하는 노리시게의 말에 요시노리는 실소를 흘렸다.

"그래. 막내들끼리 잘해 보거라."

"그래도 전쟁에서 지는 맏이들보다는 이기는 막내들이 뭘 해도 더 하지 않겠소?"

요시노리를 조롱한 타카모치는 그대로 뒤를 돌아보며 앳된 얼굴의 청년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경의 말이 맞소."

타카모치의 질문에 무덤덤하게 대답한 청년은 죽은 전임 미카도의 8촌 형제인 사다츠네였다. 그리고 요시노리의 옆에 자포자기한 듯 주저앉아있는 청년이 사다츠네의 친형인 히코히토였다. 형제는 서로 속한 편은 달랐지만, 그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점과 반강제로 미카도로 옹립되었다는 점만은 똑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조적 요시노리를 토벌하였으니, 여기서 바로 처분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린 나이에 강제로 옹립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생활만 해온 데다가, 조금 전에는 타카모치가 직접 나서서 상대편 무사들을 베어 넘기는 모습을 보기까지 한 사다츠네는 거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시오."

"신 아시카가 좌대신 정이위 미나모토 아손 타카모치가 아룁니다. 조적 요시노리는 이대로 압송하여 공모자가 더 있는지 알아내고, 조적에게 속은 히코히토왕은 그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 분명하니 다이리(궁궐) 북쪽의 후시미도노에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옵니다."

난데없이 예법을 갖추어 건의하듯 말했지만, 실상은 자신의 형인 요시노리는 처형하고, 사다츠네의 형인 히코히토는 유폐하겠다는 통보나 다름없었다.

"경의 뜻대로 하시오."

"그렇게 되었는데, 형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시오?"

요시노리는 타카모치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꼭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물어보는구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저 내 머리를 내거는 짓만 하지 마라. 세상에 추한 모습을 남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물론이오."

타카모치가 말을 마치자마자 요시노리는 들고 있던 계림도를 목 옆에 가져다 대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잡아당겨 그었다. 칼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잘린 경동맥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고, 의식을 잃기 전의 짧은 순간에 요시노리는 막내아우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옥에서 기다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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