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2화
252화
1445년 4월 하순 모일.
한성부. 승록사.
석신미와 제자들이 전의감 일을 돕기로 자원하면서 양녕과도 협력하게 되었지만, 양녕은 이도와 한 말이 있으니 전의감에 갈 수 없었고, 승려 신분인 데다 외부자인 석신미가 궁에 드나들 수도 없었다. 거기서 양녕이 내놓은 대책이 궁 밖에 있는, 나라에서 조선의 불교 전반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청인 승록사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스님과 같이 일하는 것은 칠주도 이후로 오랜만이로군. 잘 부탁하오."
"소승이야말로 대군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석신미를 너무 가까이서 만나면 전의감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냐는 이도의 걱정을 받아들여서 승록사의 모든 창호는 바람이 통하도록 열려있었고, 양녕과 석신미는 의자를 멀찍이 떼어놓고 앉아있었다.
"대창진을 막는 일이 급하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야겠지만, 그 전에 궁금한 것 딱 하나만 묻겠소. 입을 가린 천에 쓴 그 실담자는 무엇이오?"
양녕의 질문대로 석신미의 입을 가린 천에는 실담자, 즉 싯다마트리카 문자 하나가 유려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아, 이것 말씀입니까? 씨앗이 되는 글자라 하여 종자라 부르는 것인데, 한 글자로 된 진언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각 불보살마다 종자가 있는데, 이 글자는 흐리흐라고 해서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을 나타내는 종자지요."
"한 글자로 된 진언이라. 대창진을 막아 달라는 의미로 써넣은 것이겠군. 그런데 그렇다면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약사여래의 것을 써넣어야 옳지 않겠소?"
양녕의 질문에 석신미가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걸린 다음 낫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걸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니, 약사여래가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청하는 것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종자를 써넣은 것 자체가 저희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 그렇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것이라니?"
"주상전하께서 새로이 정음을 만드신 덕에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고는 있으나, 아직 배움의 길이 모두 열린 것은 아닙니다. 대창진은 귀신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코를 통해 걸리는 것이라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지요. 그런 이들은 코와 입을 천으로 가리라 해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원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소."
"그래서 이렇게 종자를 써서 코와 입을 가리고 몸을 정결히 하면 불보살께서 큰 마마를 막아주어 대창진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지요. 마침 백성들이 가장 잘 아는 염불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니, 그 두 분의 불보살을 한 번에 나타내는 이 종자가 가장 적합했습니다."
"과연, 그다음 백성들이 믿고 따라 하도록 솔선해서 쓰고 다니는 것인가. 실로 기발한 방편이오."
방편이라는 말은 본래 불교에서 쓰이던 말로, 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절묘한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양녕이 석신미가 발휘한 기지를 방편이라 한 것은 제법 큰 칭찬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군."
"좋소. 그럼 궁금한 것도 풀렸으니 본론으로 넘어가겠소. 사람을 소나 말의 창진에 먼저 걸리게 해 대창진에 걸리지 않게 막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들었을 것이오. 그리고 거기에 쓰려는 창진 고름 말린 것은 총 네 종류요. 소에서 얻은 것, 말에서 얻은 것, 소의 창진을 말이 걸리게 한 다음 말에서 얻은 것, 말의 창진을 소가 걸리게 한 다음 소에서 얻은 것이지."
"한 번 다른 짐승을 거쳐서 얻은 고름도 쓴다니 신기하군요. 어떤 이유입니까?"
실제로는 제너가 종두법에 썼던 것이 마두에 걸린 소에서 얻어낸 고름이었기 때문에 그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었지만, 양녕에게는 이미 준비해둔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짐승의 창진을 사람에게, 그것도 고름으로 옮기는 것인데, 짐승에서 사람으로 바로 옮겼다가 병증이 크게 나타난다면 위험하지 않소. 그러니 다른 짐승을 한번 거치면 약해져서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오. 물론 더 강해질 수도 있지만 말이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자원하는 이들을 모아서 네 종류의 고름을 하나씩 놓아보겠습니다."
"좋소. 자세한 것은 전의감과 스님께 맡기겠소. 아무리 상황이 급하다고는 하지만 너무 서두르다 괜한 사람이 상하지 않게 하시오."
양녕의 말에 석신미는 어딘가 속 모를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대군"
* * *
1445년 6월 초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그로부터 한 달 뒤, 전의감에서 올린 결과 보고를 받은 이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말의 창진을 소에게 옮긴 다음 소의 몸에 생긴 창진에서 얻은 고름이 사람에게 놓았을 때 증상이 심하지도 않고, 증상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대창진 고름을 다시 놓아도 대창진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었구려. 이제 이 방식으로 고름을 더 많이 만들어 내면 되겠소."
예조판서 김종서가 이도의 말에 동의하듯 말했다.
"예. 정말로 이 방법에 효능이 있고, 빨리 발견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다시 생각해도 석신미라는 승려는 정말 비범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양녕의 말을 듣고 전의감으로 돌아간 석신미는 대창두 막는 방법을 자신의 몸으로 실험할 자원자들을 모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네 고름 가운데 사람에게 치명적인 것과 효과적인 것이 모두 있을 수 있으니, 괜히 동시에 실험해서 위험을 감수할 것 없이 하나씩 실험하고, 안전하고 효과적인 것이 나오면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석신미가 고른 첫 자원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에게 제일 먼저 실험했다는 것도 그렇지만, 맨 처음 실험할 고름을 고른 이유도 정말 대단하오. 말의 창진은 몸이 약해지면 다시 걸릴 정도로 독한 것이니 소를 거치며 더 강해진다면 치명적일 것이고, 약해진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골랐다니."
"만일 자신이 제일 위험한 고름을 놓은 탓에 죽는다면 다른 고름으로 실험할 제자들은 조금이나마 안전해질 것이고, 자신에게 놓은 고름이 효과가 있는 것이라면 다른 이들이 목숨을 걸고 나머지를 실험할 필요가 없으니 두루 좋은 일이라 골랐다 하였지요. 몸을 죽음에 내던져 인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하늘도 감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종서의 말에 양녕도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후에 같은 방법으로 실험한 석신미의 제자들도 모두 무사했지요. 덕분에 그들이 한 것처럼 팔뚝을 깨끗하게 씻고 굵은 바늘로 상처를 낸 다음 약간의 고름을 집어넣으면 안전하리라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예. 아마도 연비식에서 떠올린 방식이겠지요. 그렇다면 이제 효과가 확인되었고 재료와 놓는 법도 갖추어졌으니, 대창진을 막는 방법이 정리된 셈입니다. 이름은 무엇이라 하는 게 좋을까요?"
이도의 질문에 짧게 생각한 양녕이 대답했다.
"창진을 다른 말로 두진이라고도 하지요. 창진 고름을 씨앗처럼 팔뚝에 심는 방법이니, 두진을 심는다 하여 종두법이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종두법이라……. 괜찮군요. 앞으로 이 방법은 종두법이라 하겠습니다."
그때 영의정 황희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백성들이 이 종두법을 순순히 따라 줄지가 걱정입니다. 백성들이 천에 실담자를 써서 코와 입을 가리고 다니는 것도, 그냥은 왜 가려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서 불보살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종두법의 부작용으로 사람이 소나 말이 될지도 모른다며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원래 역사에서도 있었던 반응이지. 역시 대단한 안목이다.'
양녕이 황희의 말에 감탄하면서도 쓴웃음을 짓는데, 이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괜찮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처음만 어려울 뿐이오. 아마 처음도 그리 어렵지 않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성들은 대창진을 큰 마마라 부르며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소. 아마 환자가 많이 나온 고을에 이웃한 다른 고을 백성들은 그 큰 마마라는 귀신이 자신들에게도 올까 봐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오. 그런 고을에 가서 종두법을 시행하려 하면 너도나도 받으려 할 것이오. 소나 말이 되는 부작용은 뜬소문이지만, 코앞에 다가온 대창진은 확실하게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지 않소. 실제로도 환자가 많이 나온 고을에 이웃한 고을이 가장 위험하니, 그들에게 먼저 종두법을 시행하는 것이 맞기도 하고."
삭막하게까지 들리는 그 말에 황희가 잠시 말이 없자, 이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석신미가 한 것처럼 안도감을 주는 방편도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이렇게 두려움을 이용해서라도 백성들을 구하는 것도 방편 아니겠소. 그렇게 고을 하나만 종두법의 효과로 대창진을 겪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다면, 그 고을 백성들만큼 증인이 생긴 셈이니 이후로는 좀 더 수월할 것이오. 어쩌면 형님께서 만드신 방법이라고 하면 첫 고을부터도 백성들이 믿고 종두법을 받으려고 할지도 모르고 말이외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사도께서는 종두법과 관련해서 척동상단에 단단히 일러두셔야 할 것이 있소."
"아, 척동상단이 전국 각지를 다니니 속한 이들 모두 일찌감치 종두법을 시행 받아두고, 가는 곳마다 종두법을 알리고 권장하라 할까요?"
정분의 말에 이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대요. 미리 시행 받아두는 것은 맞지만, 종두법에 관해서는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않게 잘 입단속 하라 지시하시오."
"예? 말하고 다니지 않게 하라니요?"
"조선 땅 안에서는 권장하고 다녀도 좋소. 하지만 명나라나 금나라, 일본과 가깝거나 사람이나 물자가 오가는 곳에서는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않아야 할 것이오."
"금나라나 일본이야 강해지면 조선에 위협이 되니 그렇다 치지만, 명나라에 종두법을 알려주면 조선에 고마워하지 않겠습니까?"
"명나라가 어디 고마운 걸 아는 이들이오? 아마 종두법에 대해서 알게 되면 종두법에 쓸 고름을 모아서 조공으로 보내라 요구할지도 모르오. 이미 지금도 걸핏하면 약으로 쓰겠다며 산삼을 캐어 보내라고 하지 않소. 하물며 산삼과 달리 종두법은 조선 백성들의 목숨과 직결된 것이오."
조공의 폐해를 이유로 들었지만, 양녕은 이도의 표정에서 다른 의도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대창진을 막는 법이 퍼진다면 명나라가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하긴, 일본도 백제를 도우러 왔다가 패배한 병사들이 돌아가면서 퍼진 대창진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으며 정권이 흔들렸고, 원래 역사에서 훗날의 청나라 역시 대창진으로 황제가 죽기도 하고 황위 계승자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한번 창궐하면 이렇게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질병이니, 조선만이 막는 법을 가지고 있고 주변 다른 나라에서는 가끔 일어나도록 두는 것이 장기적으로 조선에 유리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지금 기승을 부리는 대창진이 가라앉은 뒤에도 종두법을 개량하거나, 소창진을 막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이오. 그럴 때 필요할 수 있으니, 대창진 고름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모아 두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양녕이 슬쩍 이도를 보았지만, 이번에는 이도의 덤덤한 표정에서 아무런 것도 읽어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