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1화
251화
"소나 말의 창진을 앓고 나서 사람의 창진에도 걸린단 말인가?"
"예. 그래도 크게 앓거나 얼굴이 얽지는 않았지만, 앓은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 집에서 역귀를 달래서 보내는 굿을 하느라 마을 사람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서 저도 본 게 아니라 전해 듣기만 한지라 뒤늦게 기억이 났습니다."
기껏 찾아낸 방법이 창진을 완벽하게 막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노중례는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아쉽습니다. 그래도 사람의 창진을 크게 앓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그게 만일 소나 말의 창진을 미리 앓은 게 원인이라면, 소나 말의 창진을 미리 앓아두는 것도 창진을 대비하는 방법으로는 충분할 것입니다. 크게 앓지도 않을뿐더러 앓고 나서 얽지도 않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양녕에게 말하던 노중례는 노인이 또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
"뭐가 또 있는가?"
"저도 그냥 소문으로 들은 것이지만, 창진을 가볍게 앓은 대신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증상이 올라오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말의 창진처럼 말인가? 정말로 그렇다면 이 창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 아닌가. 그냥 소문일 뿐이었으면 좋겠군……."
심각한 표정의 노중례 옆에서 양녕도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지만, 그 이유는 조금 달랐다.
'창진을 앓고서도 또 걸렸지만 증상이 심하지 않고 얽지도 않았다고 한 것은 홍역이겠고, 걸렸다 나았지만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올라온다는 건 대상포진이겠군. 이것들은 당연히 천연두 면역과는 상관이 없다.'
양녕은 고민 가득한 얼굴로 어금니를 깨물었다.
'문제는 지금 이런 유사한 증상을 가진 질병들이 모두 한데 묶여 창진이라 취급된다는 것이다. 종두를 맞은 다음에 천연두에 걸리지 않더라도 홍역에 걸린다면 창진에 또 걸린 셈이니 종두의 효능이 의심될 것이고, 오래 잠복해 있다가 건강이 나빠지면 다시 올라오는 대상포진은 창진이 밖에서 옮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 수 있어.'
그렇다고 대뜸 이것들이 각기 다른 병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는 탓에 양녕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겨있는데, 양녕의 표정을 본 노중례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군. 대군께서 조금 전 제게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은 첫날이지 않습니까. 소문으로 돌던 것이니 창진에 걸렸다 낫고서도 또 앓는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 번 앓고 나면 또 앓더라도 위중하게 앓지는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으며, 거기서 더 연구한다면 확실하게 창진을 막을 방법도 나올지 모릅니다."
양녕의 표정에 눈치만 보던 노인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배운 게 없어 잘은 모르지만, 작은 마마에는 걸리더라도 큰 마마에만 안 걸린다면 그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덜할 것입니다."
"작은 마마와 큰 마마라니?"
양녕과 노중례의 진지한 시선을 동시에 받은 노인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는 무당이나 스님들이나 다 그렇게 불렀습니다. 같은 마마라도 큰 마마와 작은 마마가 있는데, 큰 마마는 앓았다 하면 죽기가 부지기수인 데다가, 창진을 돋게 할 뿐만 아니라 가렵게도 만들어서 긁어 터뜨려 얽게까지 만드는 더 무서운 마마니 더 극진히 달래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 지금 각지에 퍼지는 것이 딱 이 노인이 말한 큰 마마의 증상과 같은데, 증상이 다른 창진도 있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어쩌면 사람의 창진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지도 모르겠네."
"정말 종잡을 수가 없는 병이군요."
노중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노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걸까요?"
양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혀 아닐세. 오히려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
그렇게 말하며 노인에게 보이는 양녕의 미소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각기 다른 세 병이 창진으로 묶여있다는 걸 명확하게 밝힐 것까지도 없다. 같은 병으로 취급하면서도 큰 마마와 작은 마마로 나누고 큰 마마를 확실하게 막는 수단으로서 종두법을 도입하면, 작은 마마에 해당하는 홍역이나 대상포진에 다시 걸린다 한들 종두의 효능이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게 내가 갑자기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 노인이 말해준 것에 기반한 것이니 크게 이상하지도 않지.'
* * *
1445년 4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앞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던 이도는 모여 있던 중신들에게 말했다.
"정말로 소와 말의 창진이 사람에게 옮기도 하고, 사람의 창진에도 종류가 있고, 소와 말의 창진을 앓은 사람은 백성들이 큰 마마라 부르는 독한 창진에는 걸리지 않는 것이구려. 지금 퍼지는 것은 가려운 증상이 있으니 큰 마마고 말이오."
양녕과 노중례는 너블섬 목장의 노인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하여 이도에게 바로 보고했다. 양녕이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약간 논리를 비약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모두의 신뢰를 받는 양녕의 말인지라 이도나 중신들 모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각 고을 수령에게 조사해 올리라 지시한 내용을 종합하자 정말로 창진이 큰 마마와 작은 마마로 구분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의원들조차 그저 증세가 무겁고 가벼운 차이라고만 여겼는데, 오히려 무당과 승려들이 가려움이라는 증상의 차이에 주목해서 창진에 두 가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니, 실로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그 안에 스승이 있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의정 황보인의 말이 끝나자 영의정 황희가 이도에게 말했다.
"실로 그렇습니다. 다만 한낮 병 일으키는 귀신을 가리켜 큰 마마니 작은 마마니 높여 부르는 것은 참람한 일일 뿐만 아니라, 병에 걸리고 낫는 이치를 따져 생각하지 않고 귀신의 소행으로 치부하는 미신의 소산입니다. 앞으로는 각각 대창진과 소창진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영상의 말이 맞소. 백성들이 그리 부르는 것은 막을 수 없더라도, 적어도 유학을 배우는 자라면 그리 부르지 않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그 대창진을 막는 법에 관해서 새롭게 알아낸 것이 있소. 대종백께서 말씀하시오."
이도의 말에 예조판서 김종서가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창진이 산동성에서 여순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온 것이 확인된 다음에, 어릴 적 창진을 앓아 얽은 자국이 있는 관원을 산동성에 보냈습니다. 명나라에서 들어온 병이라면 명나라에는 이미 대책이 있을 것이니 찾아보라 한 것이었지요."
"찾았소?"
양녕 질문에 김종서가 대답했다.
"예. 명나라에도 치료법은 없지만, 걸리지 않는 방법은 있었습니다. 창진에 걸린 사람의 고름을 말려 가루를 낸 다음, 물에 개고 솜에 적셔 그 솜을 콧구멍에 넣습니다. 그러면 창진에 걸리게 되는데 그 증상이 약해서 쉽게 나으며, 그렇게 한 번 걸린 사람은 창진에 다시는 걸리지 않게 된다 합니다."
호조판서 정분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하듯 말했다.
"코를 통해서 걸리게 한다니, 정말로 대군께서 분석하신 것처럼 대창진은 코를 통해 옮는 병이었군요. 또 가볍게 미리 앓아서 다시 걸리지 않게 하는 방법 역시 대군께서 고안하신 것과 통합니다."
"대신 문제가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대창진 고름을 쓴다는 것입니다. 코를 통해 대창진에 걸렸는데 증상이 강하다면 그대로 죽게 되는 것이고, 약하게 앓는다고 해도 창진에서 고름이 나오니 주변 사람들에게 옮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군께서 소와 말의 창진에 먼저 걸려도 대창진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셨고, 소와 말의 창진은 사람에게 증상이 그리 심하지 않다고 하니 그 방법을 그대로 쓰되 고름만 소와 말의 것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분의 말에 이도가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그렇게 하면 훨씬 안전하겠지. 형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마침 명나라에서 인두법의 지식이 들어와서 내 주장이 더 확고해졌고, 코를 통한 접종법 역시 명나라에서 쓰이던 것이니 바로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코는 기본적으로 이물질을 걸러내는 기관이다. 코를 통해 접종하려 해도 효과가 없을 수 있고, 효과를 내려고 한 번에 쓰는 고름의 양을 늘리면 접종할 수 있는 사람 숫자가 줄어들어 버린다.'
잠시 생각하던 양녕이 이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무리 사람이 걸렸을 때 크게 앓지 않는다고 하나 소나 말의 창진도 창진입니다. 바로 코를 통해 폐에 들어간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마 소나 말을 치는 이들은 코로 고름이 들어갔다기보다는 일하다가 손에 난 작은 상처로 고름이 들어가서 걸렸을 것 같습니다. 폐에서 먼 몸 끝을 통해서 걸렸으니, 폐까지 퍼져 증상이 나타날 때는 이미 그 힘이 약해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코를 통해 걸려도 증상이 약할 수는 있겠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니 그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우선 침을 놓고 그 자리에 말린 고름이 들어가게 해보고, 만일 효과가 없다면 코를 통해 걸리게 하는 것이 옳겠군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또한 아직 소와 말의 창진 가운데 어떤 것이 사람의 대창진을 막아주는지 확실하지 않으니, 더욱 안전하게 진행해야겠지요."
"예. 형님께서 정말로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제 고름을 모으고 말리고 사람에게 걸리게 하는 것 등은 전의감에 맡기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다른 일을 맡아주시거나, 아니면 확실한 방법이 나올 때까지 사저에 계시기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이도의 말에 양녕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창진을 막을 방법은 이제 막 연구되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저더러 다른 일을 하라니요?"
"이미 형님께서 초석을 놓으셨으니 나머지는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됩니다.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도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우에 이어 형님까지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도의 그 말에 양녕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양녕은 자신이 조선의 기술이나 제도 발전에 중요한 인물이니 위험에 처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도는 아우인 성녕대군 이종을 창진으로 잃었던 것이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창진이 기승을 부리니 다른 일을 진행하는 것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일을 한들 제 손에 잘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직접 고름이나 환자를 다루지는 않더라도, 문서를 통해서라도 전의감의 일을 계속 돕겠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대창진을 막는 방법이 확실하게 갖추어지면, 그때는 그 방법을 저에게 쓴 다음 직접 나서기도 하겠습니다."
양녕의 단호한 말에 잠시 말없이 생각하던 이도가 졌다는 듯 말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하신다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겠지요."
"감사합니다, 주상. 그런데 전의감에 인력은 충분합니까? 연구에 실험까지 하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한데, 지금은 새롭게 관리를 뽑고자 사람을 모으는 것도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자원한 이들이 있습니다. 수양이 추천했지요."
"수양이 말입니까?"
"예. 석신미라 하는 승려와 그 제자들인데, 간경도감의 일을 도와줬던 연으로 알게 되었다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