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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50화 (250/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50화

250화

1445년 3월 중순 모일.

성저십리. 너블섬.

한강 가운데에는 큰 섬이 있다. 먼 옛날에는 작은 산만 있던 섬이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상류에서 흘러온 모래가 퇴적되었고, 원래 있던 산은 지극히 일부가 될 정도로 넓은 모래사장이 생겼다.

그 모습에서 따서 붙은 이름이 너블섬. 원래 역사에서 몇 번의 음차표기를 거쳐 훗날 여의도라는 이름이 되는 그 섬이었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목장이 있어서 다행이야. 괜히 멀리 오가다가는 병만 더 퍼질 수 있지 않은가."

모래밭 위를 걸어가며 양녕이 한 말에, 옆을 따라오던 전의감 판사 노중례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마침 너블섬은 한성부에 가까우면서도 강물로 막혀 있어선지 아직 이곳에서 창진 환자가 나오지도 없으니 안심할 수 있지요."

창진을 막을 방법을 털 난 짐승에게서 찾아보겠다던 양녕이 너블섬에 온 것은 이곳에 왕실 소유의 목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북으로 물이 흘러 가축들이 달아나지 않으면서도 물이 풍부하고, 넓고 평탄해 가축들이 다칠 만한 지형이 없으며 관리하기도 쉬웠다.

초지가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그것은 얕은 강을 건너서 가져다주면 그만이었으니 목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아, 저기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

목장 관리에 쓰이는 건물 앞에는 관원 하나가 서 있었다. 이윽고 양녕과 노중례가 가까이 오자 관원은 깊게 인사하며 말했다.

"대군과 판사께서 오신다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빈시 직장 향백민이라 합니다."

예빈시는 사신 접대 등의 중요한 행사에 쓰이는 음식물을 관리하는 부서라 양녕과는 별다른 연이 없었다. 더욱이 예빈시에서 쓸 가축을 키우는 목장 관리를 맡은 관원, 그것도 고관도 아니고 종7품인 직장이라면 양녕과 더더욱 엮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양녕은 관원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은인의 손자와 이렇게 만나게 되기도 하는군."

면포로 입을 가리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녕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하자 향백민이 다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주도 정벌의 마지막 전투인 오토모 성 전투 당시, 이미 조선으로 전향한 혼고 가문 가독이었던 혼고 토모히사는 양녕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혼고 가문은 향씨 성을 하사받고 도성 가까운 양천현에 땅을 받아 이주해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향백민은 바로 그 혼고 토모히사의 손자였다.

"좋아. 그럼 바로 얘기를 시작하세. 의자를 여기로 꺼내와 주겠나?"

"예? 3월이라고는 하나 강바람이 찹니다. 안으로 드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향백민의 물음에 노중례가 대답했다.

"지금 퍼지는 창진은 코로 들어와 허파를 거쳐 온몸에 퍼지는 병일세. 아무리 너블섬에 창진 환자가 없었고, 대군과 나, 자네, 대군을 호위하는 반당들까지 모두 천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고 하지만, 건물 안처럼 바람의 흐름이 없이 기운이 고이는 곳은 위험해. 그렇다고 창문을 다 활짝 열자니 결국 바깥하고 다를 바 없이 추울 것인데, 그러면 차라리 아예 밖에 있는 편이 안전하지 않겠나."

"그런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이어서 향백민이 건물에 들어가 의자 세 개를 가져 나왔다. 가장 좋은 의자에 양녕이 앉고 남은 의자에 노중례와 향백민이 앉자 노중례가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 조선 각지에 창진이 퍼지고 있어. 그래서 대군께서 창진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시는 중일세. 지금 모든 백성에게 코와 입을 천으로 가리고 다니게 한 것은 퍼지는 기세만을 잡는 것이고, 확실하게 창진을 막을 방법을 구하시는 것이지."

"예. 털 난 짐승에게서 방법을 찾으려 하신다는 것도 이미 들었습니다. 제가 어떤 것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논리가 비약하거나 상황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잘 유도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주지시킨 양녕이 향백민에게 물었다.

"소나 말도 창진에 걸리는가?"

"예. 소도 걸리고 말도 걸립니다. 증상도 사람하고 비슷해서 몸 곳곳에 창진이 돋고, 터지면 고름이 나오지요."

"그렇군. 그럼 소나 말의 창진이 사람에게 옮기도 하는가?"

"예, 옮습니다. 증상도 비슷합니다."

"사람에게도 옮는군. 소나 말의 창진이 옮은 사람이 죽기도 하는가?"

양녕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향백민이 말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알 법한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리 하게."

의자에서 일어난 향백민이 어디론가 가자 노중례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소와 말도 창진에 걸리고 그게 사람에게 옮기까지 한다니, 정말로 큰일입니다. 가축들도 천으로 코와 입을 가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의감은 의학 교육과 서적 편찬에서 약재의 재배, 의관 선발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의학 거의 전부를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그래서 전의감의 가장 높은 관직인 판사 노중례가 양녕과 함께 창진을 막는 방법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썩 좋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표정이 어두운 것도 당연했다.

"데려왔습니다, 대군. 이 목장에 저보다도 오래 있던 자입니다."

한숨을 쉬려던 노중례가 고개를 들자, 향백민과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건물에 들어가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온 향백민이 노인을 거기 앉히고 자신도 의자에 앉자 양녕이 노인에게 다시 질문했다.

"소와 말도 창진에 걸리고 그게 사람에게도 옮는다고 들었네. 그렇게 창진이 옮은 사람이 죽기도 하는가?"

"옮은 사람은 많이 봤지만 죽은 사람은 못 봤습니다."

그 말에 노중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증상은 어떤가? 크게 앓는가?"

"살갗에 창진이 돋고 고름도 나오기는 하지만, 앓아누울 정도는 아닙니다."

그 말에 노중례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그럼 다른 질문인데, 사람은 창진을 한 번 앓고 나면 죽을 때까지 다시 걸리지 않는다고 하네. 그래서 백세창이라고도 하지. 소나 말도 창진을 한 번 앓고 나면 다시는 걸리지 않는가?"

노인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말은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증상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소는 그런 경우는 못 봤지만, 이것이 말하고 달라서 다시 안 걸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소라는 짐승은 말하고 달리 고비가 많지 않습니까."

그 말에 양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지. 소는 매 잔칫날이 목숨의 고비니까. 소도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증상이 올라오지만, 증상이 올라오기 전에 잔치상에 먼저 올라가 버리는 탓에 못 본 것일 수도 있겠군."

양녕은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다음 질문일세. 그렇다면 소나 말의 창진에 걸렸던 사람이 그 이후에 사람의 창진에 걸리기도 하는가?"

"그건 좀 생각해 봐야 떠오를 것 같습니다."

"좋네. 천천히 생각하게."

노인이 생각에 잠기며 조용해진 가운데, 노중례가 작은 목소리로 양녕에게 말했다.

"대군. 설마……."

'지금까지의 질문과 대답만으로 알아챈 건가. 역시 의관으로 들어와 그 실력만으로 전의감의 가장 높은 자리인 판사까지 오른 사람답군.'

양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런 경우는 듣거나 본 적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어릴 적에 창진 걸린 가축들을 돌보다가 창진이 옮아서 앓은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이 나이가 되도록 남들 걸리는 독한 창진에 걸린 적이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 어찌 생각하는가?"

'전부 내가 정리하는 것보다는, 다른 학자를 통해 결론을 내리는 게 더 자연스럽겠지.'

양녕의 질문을 받은 노중례는 신중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해 가며 말했다.

"사람과 소, 말 사이에 옮기도 하고 증상도 같은 것을 보면 세 창진이 같은 창진인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소는 확인이 안 된다고 하지만 사람은 한 번 걸리면 다시 걸리지 않고, 말은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증상이 올라온다고 하는 것을 보면 같은 창진이되 그 성질은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중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한 번 앓고 나면 다시는 걸리지 않는다는 성질만은 세 창진에 공통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나 말의 창진은 사람이 앓으면 목숨까지 위험해지지는 않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양녕이 작게 끄덕이며 노중례의 말을 받았다.

"사람을 소나 말의 창진에 먼저 걸리게 해서 가볍게 앓고 나면, 사람의 창진을 앓아 위중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정말로 털 난 짐승에게 방법이 있었군요. 털 난 짐승은 금에 속하고 창진은 화에 속하는 것이니 원래대로라면 소나 말 역시 창진을 앓으면 위중해져야겠지요. 하지만 소나 말은 그 체질이 크고 강하니 금이 화를 상모(오행의 상성이 역행함)하여 창진이 크게 해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해진 창진이 사람에게 옮으면 역시 증세가 심해지지는 않지만, 앓은 것은 앓은 것이니 다시 앓지 않게 되고 말입니다."

노중례가 알아서 교차면역의 개념에 비슷하게 도달하자 양녕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내가 알던 종두법의 지식은 원래 역사에서는 지금부터 300여 년 뒤에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300년이라는 시간은 바이러스가 변이를 거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혹시라도 이 시대에는 바이러스의 특성이 달라서 교차면역 자체가 생기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 특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때 노중례가 노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소는 모르지만 말은 몸이 안 좋아지면 다시 걸린다는 것을 보면 사람의 창진과는 성질이 좀 다른 것 같군. 혹시 소나 말의 창진을 앓고서 사람의 창진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앓은 것이 정확히 소에서 옮은 것인지 말에서 옮은 것인지 알 수 있는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자세히 물어본 적이 없고, 저도 소와 말이 창진에 동시에 걸려서 돌보다가 옮았던 것이라 어느 짐승에서 옮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렇다면 소나 말 둘 중 하나의 창진만 지금처럼 앓아도 심하지 않고 사람의 창진을 막아주고, 다른 쪽 창진은 사람이 앓아도 위험하면서 창진을 막는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노중례는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지만, 양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오늘이 첫날인데 벌써 큰 성과가 있지 않았는가. 오늘 알아낸 것을 토대로 더 많은 사례를 찾아보고 분석하면 과연 어느 창진이 사람의 창진을 막아 주는 것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야."

"예. 그렇겠지요. 이거 원,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마음만 앞섭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러다 자네가 아프면 누가 나를 돕겠는가."

그렇게 양녕과 노중례가 대화를 나누는데 노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대군 마님. 지금 기억난 것입니다만……."

"음? 무엇인가?"

이어진 노인의 대답에, 기껏 안도하던 양녕과 노중례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소나 말의 창진을 앓은 후에 사람의 창진도 앓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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