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49화
249화
불이 났다는 말에도 도르호치는 크게 놀란 기색 없이 말했다.
"또 말인가? 설마 이번에는 다른 건물까지 번진 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불길이 조금 강해서 미리 피해야 안전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른 날도 아니고 쿠이들이 처음으로 금나라의 위세를 접하는 날일세. 이런 날 불나서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제대로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야."
여진 말로 대화가 오가는 탓에 내용은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느꼈는지 가만히 눈치만 살피는 쿠이들을 슬쩍 본 도르호치가 표정을 바꾸어 허허 웃더니 말했다.
"내가 직접 보고 오겠네. 무르키. 쿠이들에게는 내가 잠시 잔치 준비를 살피러 갔다 온다고 전해주게."
그 말에 조금 전 불이 났다는 말을 전했던 사내가 물었다.
"직접 가보신단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직접 가서 보고 문제없으면 다시 여기로 와서 잔치를 열면 되는 것이고, 안 되겠으면 다른 곳에 잔치 준비를 해놓은 다음 준비가 다 되었다면서 거기로 옮기게 하면 되지. 어느 쪽이건 불 난 모습을 쿠이들이 직접 보지 않는 한 크게 의심하지 않을 걸세."
"쿠이들도 손님맞이는 주인이 직접 챙긴다고 하니 버일러께서 직접 잔치를 살피시러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그대로 밖으로 나온 도르호치가 불이 났다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불은 보이지 않았지만 건물 전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도르호치가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내에게 물었다.
"상황은 어떤가?"
"퍼 두었던 바닷물을 전부 뿌렸더니 다행히 불은 꺼졌고, 다친 사람도 없습니다. 대신 망가진 도구가 많고, 만들던 소금에도 재와 잡티가 들어가서 못쓰게 되었습니다."
"불을 껐고 사람도 안 다쳤으면 괜찮네. 도구와 소금이야 새로 만들면 되지."
불이 난 건물은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곳이었다. 막대한 수량의 민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흑룡강 하구보다 이곳 바닷물이 더 짜고, 가까운 곳에 석탄도 많이 나니 아예 여기서 소금을 만들어 싣고 가는 게 좋지 않겠냐는 발상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정말 이상합니다. 분명히 제가 옛날에 듣기로는 조선 남부에서는 바닷물을 퍼다 석탄으로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데, 화력도 적당하고 연기도 나지 않아서 아주 좋다고 들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그 말대로 했는데 대체 왜 이렇게 화력도 너무 세고 연기하고 냄새도 독한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연기하고 냄새가 없는 석탄도 있단 말인가? 그런 게 있다면 나하(온돌)에 때기는 좋겠군. 뭐, 조선에서 나는 석탄은 성질이 다를 수도 있지 않은가.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하게."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망가진 도구들을 고치려면 대장간에서 쓸 숯을 더 구워야겠군요."
"숯 대신 석탄을……. 아, 석탄은 대장간에서 쓰기 어렵겠군."
"예. 연기와 냄새가 심해서 말입니다. 화력은 쇠도 녹일 정도인데 참 아깝습니다."
그 말에 도르호치가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장작을 태우면 연기가 나지만 숯으로 구워서 태우면 연기가 나지 않아 대장간에서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석탄을 숯처럼 구워서 써보는 건 어떻겠나?"
* * *
1445년 3월 중순 모일.
한성부. 경복궁 사정전.
사정전에서는 이도와 양녕, 중신들이 모인 가운데 국정 논의가 한창이었다.
"일본에서 목화솜을 추가로 사 와서 방직감에서 면포를 짜는 것은 다행히 계산대로 되어서, 목화솜이나 면포 값이 급변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면포 생산량은 크게 늘었고, 값은 약간 내렸지요. 하지만 아직 방직감의 족답직기와 방적기가 전부 개량형으로 교체된 것은 아닌지라, 교체가 완료되면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호조판서 정분의 말에 이도가 끄덕이며 말했다.
"생산 속도가 더 빨라져서 오히려 목화솜이 부족해질 수도 있겠군. 중요한 일이니 대사도께서 잘 관리해주시오."
"예, 전하. 또 계응국이 가지고 있던 조선과의 교역 독점권은 전부 척동상단의 고본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기존에 고본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처음에는 종자돈 전체가 늘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계응국이 새롭게 받은 고본 일부를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 비율에 맞게 나누어주겠다고 하니 반기더군요. 양녕대군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고본을 거래하는 건물도 척동상단 옆에 따로 지었으니, 나머지는 저들끼리 알아서 거래하며 맞춰나갈 것입니다."
이어서 예조판서 김종서가 말했다.
"계응국 내부에서 호족들에게 고본을 나누어주는 것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중요한 일이라 오우치 가문에서 먼저 도움을 청해와서, 호조와 예조에서 같이 도와주는 중입니다."
"일본이 혼란스러우니, 번방인 계응국의 안정은 곧 조선의 안정으로 이어지오. 대종백께서 잘해 주시리라 믿소."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말하던 이도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그 안건만 남았군. 시작하게."
이도의 말에 관리 하나가 사정전 밖으로 나가고, 잠시 뒤 폭음이 연달아 들렸다. 폭음과 함께 전해진 진동에 사정전 문이 흔들릴 정도였지만 누구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있었다.
모든 폭음이 멈추자 이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역신도 대포로 날려 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좋소, 그럼 지금 전국으로 퍼지고 있는 온역을 어찌 대처할 것인지 논의를 시작하겠소."
조금 전의 폭음을 궁 안에서 화약만 넣고 대포를 쏘는 소리였다. 전국에 온역, 즉 날이 풀리며 생기는 전염병이 퍼지고 있어서 그 대책을 논하기 전에, 역신이 자기 얘기 하는 것을 듣고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로 쏜 것이었다.
"그럼 우선 온역이 퍼지는 상황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각 고을에서 처음으로 환자가 나온 날짜를 종합해 보았더니, 가장 먼저 여순항 일대에 퍼지고 점차 가까운 다른 고을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김종서의 설명을 들은 이도가 끄덕이며 말했다.
"여순항이라……. 그렇다면 역시 명나라에서 들어온 것이겠구려."
"예. 교역에 종사하는 집에서부터 환자가 나온 것을 보면 확실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넘어온 역병이 퍼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토록 빠르고 넓게 퍼지는 것은 처음인 것 같소."
이도의 말에 양녕이 대답했다.
"조선이 번성하고 있기에 오히려 퍼지는 기세가 큰 것입니다. 지금 조선은 요역과 군역의 제도를 고친지 10년이 넘어 장정의 숫자가 크게 늘었습니다. 마침 전국에 도로와 항구가 놓여있으니,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사내도 많지요."
"빈 땅을 찾아 개간하거나, 장인 밑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거나, 상단에 들어가거나 하는 이들이 늘었지요. 훈련만 받으면 현역을 면하고 바로 예비역에 넣어 주고 땅도 준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북방으로 가는 이들도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예. 그렇게 물자와 사람이 전국을 오가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고을도 많습니다. 당연히 역병도 잘 퍼지겠지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역병이 퍼지면 그 속도가 빠를 것 아닙니까. 큰일이군요."
이도가 어두운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자, 양녕은 이번에는 김종서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정확히 어떤 병이 퍼지고 있는 것이오? 온역이라고 해도 한두 종류가 아니지 않소."
"창진입니다."
김종서의 짧은 대답을 들은 양녕은 이도가 평소보다도 심각한 표정이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창진은 천연두와 홍역을 합쳐 부르는 말이었다. 더 정확하게는 조선 초까지는 두 병의 증상이 유사한 탓에 하나의 병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병명도 하나만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창진은 양녕과 이도의 아우인 성녕대군 이종의 목숨을 앗아간 병이기도 했다.
'천연두와 홍역 중에 성녕이 걸렸던 것이 무엇인지, 지금 퍼지는 것과 같은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구분 없이 창진으로 여겨지니, 창진이 퍼진다는 소식에 주상의 용안이 어두워지는 것도 당연하지.'
"창진이라. 그렇다면 살갗에 창진이 돋고, 갑자기 열이 나고, 가려움이 심해지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대군께서 말씀하신 증상 그대로입니다."
'지금 퍼지는 건 천연두로군.'
양녕이 창진의 일반적인 증상과 같이 은근슬쩍 물어본 가려움은 홍역에는 없는 천연두만의 증상이었다. 갑자기 창진이 사실은 두 가지 개별적인 병이라는 주장을 할 수는 없지만, 양녕 자신은 정확히 알고 있어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기에 확인한 것이었다.
"창진은 온역 가운데서도 지독한 것이니,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더 퍼지지 않게 하는 게 시급할 것이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혹시 대군께 좋은 방법이 있으십니까?"
영의정 황희의 질문에 양녕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가진 지식을 그대로 쓸 수 없으니, 이 시대에 맞게 설명해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과연 잘 될는지.'
"걸리는 과정을 알아야 퍼지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창진은 코로 들어와 허파를 통해 퍼지는 병인 듯하오."
"코를 통해서 말입니까?"
황희는 처음 듣는 말에 의아해했지만, 이도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온역 걸린 집에서는 나쁜 기운이 생기는데 그것을 맡으면 몸에 퍼져 온역에 걸린다. 만약 나쁜 기운을 맡았는데 경황이 없으면 종이를 꼬아 콧속을 더듬어 재채기를 하게 하면 온역에 걸리지 않을 수 있다. 득효방에 나온 방법이오. 과연 냄새는 코로 맡는 것이고, 재채기는 허파에 든 공기를 세차게 내보내는 것이니 형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소."
이도가 의학서인 득효방을 거론하며 양녕의 추측을 지지하자, 우의정 황보인도 한마디 했다.
"불의 기운이 강한 해에 온역이 심하다고 하고, 온역에 속하는 창진에 걸리면 실제로도 열이 나니 창진은 오행의 화에 속할 것입니다. 그리고 허파와 냄새, 후각은 모두 오행의 금에 속하는 것이지요. 병은 사람의 약한 곳을 타고 들어가는 법인데 금은 화에 약하니, 화에 속하는 창진은 금에 속하는 코와 허파를 타고 들어갈 것입니다. 제 생각에도 대군 말씀이 맞는 듯합니다."
예상한 것과 달리 순식간에 이도와 황보인이 자신의 주장에 이 시대에 딱 맞는 이론적 근거를 만들어 준 덕에 잠시 당황한 양녕이었지만, 바로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입과 코를 깨끗한 천으로 가려서 나쁜 기운이 폐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창진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창진에 걸리지 않게 하는 약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려면 약재 구하기도 힘들고 약을 보내면서 사람끼리 만나게 되니 병이 더 퍼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면포는 방직감에서 많이 만든 덕에 전국에 많이 있고, 방법만 알려주면 되니 사람이 많이 오갈 것도 없지요. 실로 유용한 방법입니다."
기뻐하는 이도를 보며 양녕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창진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선 퍼지는 기세만 잡아 두고, 창진을 막을 확실한 방법을 찾아보아야지요."
그 말에 이도만이 아니라 중신들의 기대 가득한 시선이 양녕에게 모였다.
"확실한 방법이라 하시면 무언가 짚이는 게 있으신 겁니까?"
'지금 퍼지는 창진이 천연두라는 것은 알아냈다. 이 천연두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지. 다만 그 과정이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이 난점이었는데, 주상과 우상 덕분에 해결되었어.'
"창진은 허파를 통해 걸리는 병이니 허파를 보하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허파는 오행의 금에 속하는 것인데, 짐승 가운데서 금에 속하는 것은 털 난 짐승이지요. 그렇다면 털 난 짐승에게서 찾으면 허파를 보할 방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