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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48화 (248/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48화

248화

1445년 1월 하순 모일.

길러미섬. 어투토로.

쿠이 사내 몇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무르키는 옆에 있던 도르호치에게 말했다.

"효과가 아주 제대로였던 모양입니다. 수염이 하도 많아서 눈밖에 안 보이지만, 그 눈만 봐도 겁먹은 걸 알 수 있을 정도군요."

그 말을 들은 도르호치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근처에 살던 쿠이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투토로 일대를 샅샅이 탐색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커다란 배와 처음 보는 말에 겁먹은 쿠이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에 지표면 가까이 묻힌 거대한 석탄 광맥은 금방 찾을 수 있었지만, 유황이 나는 곳은 없었다.

이제 남부로 내려가서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부하들의 말에, 도르호치는 추운데 굳이 움직일 것 있냐며 묘수를 냈다.

"한께서 가르쳐 주신 걸세. 조선이 여진족들을 불러 기를 죽일 때 이런 방법을 썼다더군."

며칠 뒤, 도르호치는 먼 북쪽에서 교역하러 왔는데 인사도 하고 겸사겸사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잔치에 초대한다며 남쪽 마을의 쿠이들을 불렀다.

그 말을 듣고 배를 타고 어투토로로 온 쿠이 사내들은 맨 처음에는 비무장한 사내들이 자신을 맞이해 주는 것을 보고 안심했지만, 부두에서 도르호치가 있는 건물까지 오면서 점점 압도되어 갔다. 일부러 쿠이들이 위압감을 느끼게끔 안내하는 동선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배가 몇 척이나 있고, 사내들은 커다란 짐승을 타고 돌아다니고, 굵은 목재를 톱으로 순식간에 썰어내고, 대장간에서는 불꽃과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는 모습 전부가 처음일 테니, 기가 안 죽을 수가 없지요."

"그러게 말이야. 자, 그럼 이쪽으로 앉히게."

좌식 생활에 익숙한 쿠이 사내들이 어색한 움직임으로 의자에 모두 앉자, 도르호치가 웃으며 말했다.

"괜히 길게 늘어놓아봤자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것이고 말로 옮기기만 어렵겠지? 나는 도르호치라고 한다. 저 먼 북쪽 출신이고, 여기에는 교역을 하러 왔다."

그 말을 무르키가 길러미말로 옮겨 통역에게 전해 주고, 통역이 쿠이말로 쿠이들에게 물었다. 다시 반대로 통역을 거쳐 무르키가 말했다.

"자신들은 남쪽의 노야우시라는 곳에서 왔다고 합니다. 높으신 분을 만나서 기쁘다고 합니다."

"하하하!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교역 좀 해본 이들이구나. 좋아, 잔치상이 준비되는 동안 우선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너희 중에 이런 걸 본 적이 있거나, 이런 게 어디서 나는지 아는 자가 있느냐?"

도르호치가 품에서 꺼내준 유황 덩어리를 건네받은 쿠이 사내는 냄새를 맡아보더니 옆에 앉은 다른 사내의 코에 대주며 무어라 말했다. 이어서 쿠이들이 자신들의 말로 뭐라 대화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갸웃거리기도 하자, 무언가 있음을 눈치챈 도르호치의 눈이 빛났다.

"이런 걸 왜 찾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물건이라고 합니다."

"역시 그렇군. 섬 남부에 이런 게 나는 곳이 있느냐?"

"이 섬에는 나는 곳이 없지만, 남쪽 섬에서 많이 난다고 합니다."

유황이 풍부하게 난다는 말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도르호치의 뇌리에 순간 걱정이 떠올랐다.

'혹시 그 남쪽 섬이라는 게 일본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쩌지?'

짐짓 태연한 척 도르호치가 물었다.

"그 섬에도 쿠이들이 사느냐? 아니면 다른 이들도 사느냐?"

"쿠이들만 산다고 합니다. 신들의 세상(카무이모시르)과는 다른 인간의 세상(아이누모시르)이라는 군요. 그 섬의 쿠이들의 고향이라서 거기 사는 쿠이들은 땅 사람(야운쿠르)이라고 하고, 여기 건너와서 사는 쿠이들은 바다 사람(레푼쿠르)이라고 구분한답니다."

쿠이들만 산다는 말에 도르호치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한결 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 사람을 얘기하는 데 쿠르라는 말이 많이 들렸던 걸 보면, 그게 쿠이하고 같은 말인 모양이군. 그나저나 변변찮은 도구도 없는 쿠이들이 많이 난다고 할 정도면 대체 유황이 얼마나 흔한 것이냐?"

"쿠이들이 아투사누푸리…… 그러니까 헐벗은 산이라고 부르는 산들이 있는데 거기서 솟아 나온다고 합니다."

"유황이 산에서 솟는 데다가 그런 산이 한둘이 아니란 말인가? 허허허, 광석을 캐서 가열하고 받아내고 할 필요도 없겠군. 아주 좋아. 그래, 그럼 그 아투사 뭔지 하는 산 중에 가장 가까운 것은 어디쯤 있느냐?"

"섬 동쪽 끝의 길게 뻗은 땅이 아마 배를 타고 가기 가장 좋을 것이라고 합니다. 시르 에토크라고 해서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곳인데, 얼마 전에도 산이 터지면서 돌하고 유황이 잔뜩 쏟아졌다는군요."

그 말에 도르호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상의 끝이라, 유황 찾겠다고 세상 끝까지 가게 생겼군. 좋아, 그럼 그 시러토코라는 곳까지 가는 길은 어떠하냐?"

"바다가 그쪽으로 흘러서 금방 갈 수 있고, 어지간히 바다가 거친 날이 아니면 항해도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드디어 안심한 도르호치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이 타고 다니는 배는 통나무를 깎아 바닥을 만들고 널빤지를 엮어 옆면을 만든 투박한 것 아닌가. 그런 걸 타고 오가면서도 저렇게 쉽게 말하는 것을 보니 여진족 배로는 훨씬 쉽겠지."

"예. 정말 다행입니다. 저들이 과장한 것인지 아닌지는 직접 가봐야 알겠지만, 저들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유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배가 많이 오가게 되면 이 어투토로 항구로 감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도르호치가 마찬가지로 안심한 부하들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무르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버일러. 쿠이들이 방금 새로운 얘기를 했습니다."

"음? 무언가?"

"조금 전에는 남쪽 섬에 쿠이들만 산다고 했는데, 정확하게는 섬 남쪽 끝에 다른 이들이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를 말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뒤늦게 말하고서 눈치를 살피는 쿠이들을 슬쩍 본 도르호치가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니?"

"시삼들이 산다고 하는데, 시삼은 쿠이들이 저희를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 먼 남쪽 끝에 길러미들이 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그럼 대체 누가 산다는 것이지?"

그때 도르호치의 옆에 있던 사내 하나가 나섰다. 금나라에 가면 자유로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출세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금나라로 도망쳐 온, 왜구 가문 출신으로 노비가 되었던 일본인 사내였다. 별다른 기술은 없지만 무예가 뛰어나서 도르호치가 멀리 갈 때면 항상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이였다.

"쿠이 말로 시삼이 정확히 무슨 뜻이오?"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은 무르키가 통역에게 물어보더니 대답했다.

"이방인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이건 저도 지금 알았습니다."

"그렇군. 그럼 그 이방인들이 쿠이들에게서 매 깃털을 사서 가는지 물어봐 주겠소?"

영문 모를 질문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통역을 거쳐 대답을 들은 무르키가 말했다.

"예. 매 깃털을 사간다고 합니다."

사내는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으로 작게 끄덕이더니,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만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에게 짧게 말했다.

"섬 남쪽 끝에 산다는 이방인들은 일본인입니다."

"일본인들이라고?"

당황해서 되묻는 도르호치에게 사내가 말했다.

"예. 일본에서는 매의 깃털을 화살 깃 재료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칩니다. 특히나 북방에서 교역해 온 큰 깃털은 일본 각지에서 비싸게 팔리지요."

"일본인들도 그 섬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정확히 쿠이들에게 뭘 팔고 뭘 사간다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무르키가 통역을 거쳐 쿠이들과 한참을 말하더니 드디어 여진말로 말했다.

"깃털과 모피를 사 가고, 쇠로 된 도구들하고 칼, 그리고 뿔 달린 보물의 신을 판다고 합니다."

철제 도구와 칼을 판다는 말에 얼굴이 어두워지던 도르호치는 마지막 말을 듣고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되었다.

"보물의 신을 판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저도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맞다고 합니다. 키라우 우스 토미 카무이라는 이름이랍니다."

"쿠이 말로 한들 우리라고 알겠는가. 흠……. 어떻게 생긴 건지 그려보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모양을 보면 알 수도 있지 않겠나?"

그 말을 전해 들은 쿠이 청년 하나가 일어나더니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자, 가만히 보던 일본인 사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저걸 왜 사 가지?"

다른 이들은 그림을 보고서도 대체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터라, 그 중얼거림을 듣자마자 사내에게 물었다.

"저게 뭔지 아는가?"

"예. 일본 갑옷의 투구에 붙이는 장식입니다. 그런데 투구도 아니고 장식만 사 간다니, 대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 장식을 뿔 달린 보물의 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영험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 같네."

사내는 갑자기 심각해진 도르호치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저 그림대로 생겨서 크기도 크고, 구리판으로 만들어서 번쩍거리는 장식입니다. 그런 걸 만들 기술이 없는 쿠이들은 그렇게 여길 만하긴 하지요.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도르호치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투구 장식을 영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걸 만들어 낼 수 있고 머리에 달고 다니기까지 하는 일본인들은 얼마나 영험한 존재로 여기겠는가? 말 그대로 신을 만들어서 머리에 달고 다니는 것 아니냔 말이야. 쿠이들이 실제 쓸모는 하나도 없는 저런 걸 교역할 정도라면, 예상보다 남쪽 섬에 일본의 영향력이 큰지도 몰라."

"그래도 남쪽 끝에만 산다고 하는 데다가, 거래 품목에 유황이 없으니 별문제 없지 않겠습니까?"

상황을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사내에게 도르호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섬은 우리가 유황을 원활하게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네. 금나라의 안위가 이 섬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데 만일 일본인들이 화약의 제조법을 알아낸다면? 그게 아니더라도 유황의 다른 쓸모를 알아내거나, 아니면 우리가 유황을 필요로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 섬을 지배하고 유황을 독점하려 하겠지요. 자신들이 쓰건, 금나라에 비싸게 팔건 하려고 말입니다."

"그래. 그리고 여기는 금나라에서는 멀지만 일본에서는 가까운 곳이야. 저들이 작정하고 나서면 우리는 손 쓰기가 어렵네."

"그럼 큰일이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행히 아직은 일본이 유황의 중요성을 모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움직임도 모르고 있을 걸세. 이 틈에 서둘러서 남쪽 섬을 확실하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지."

도르호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길러미섬 남쪽의 섬은 쿠이섬이라고 하겠네. 쿠이들이 고향으로 여긴다고 하니 그렇게 이름을 지어도 문제없겠지. 그리고 쿠이섬을 빨리 확보하려면 가까운 곳에 큰 거점이 있어야 할 테니, 여기 길러미섬 남부에 큰 항구를 만들 걸세. 괜찮은 항구 터가 있는가?"

길러미인 무르키가 듣고 있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다른 속내도 있었다.

'쿠이섬 확보에 길러미들의 도움을 너무 받으면 길러미들이 두 섬에 걸친 영향력을 갖게 되고, 그러다 너무 세력이 커지면 금나라에서 다루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길러미섬 남부에 금나라에서 직접 큰 거점을 만든다면 길러미들의 영향력이 남쪽으로 뻗는 걸 제한할 수 있겠지.'

"섬 남쪽에 쿠이들이 쓰는 큰 항구가 있다고 합니다. 산이 주변에 있어 바람을 막아 주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넓은 땅도 있다고 하는군요."

"좋아. 거기 규모를 키워서 쓰면 되겠군. 이름이 뭐라 하는가?"

"어…… 그냥 큰 항구입니다. 쿠이 말로는 포로안토마리라고 한다는군요."

"이름 참 어렵군. 그냥 그 뜻 그대로 여진말로 불러야겠어. 앞으로 그 항구 이름은 암바 다룬(큰 항구)일세."

길러미 말이나 쿠이 말의 음을 딴 것이 아니라 온전한 여진 말 이름으로 지어 항구 건설의 의도를 확실하게 한 도르호치가 씨익 웃는데, 여진족 사내 하나가 급한 표정으로 건물에 달려들어 오며 말했다.

"버일러, 피하시지요. 불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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