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47화 (247/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47화

247화

도르호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쿠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아마 본 적은 없으실 겁니다. 사내들은 눈두덩이 깊고 수염이 북슬북슬하고, 여인들은 입 주변에 시커멓게 문신을 해서 그것도 또 수염처럼 보입니다.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꼴이지요."

그 설명을 듣자 도르호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명 내용이 아니라, 쿠이들을 적대하는 그 말투에서 떠오른 것이었다.

"기억났네. 길러미들이 몽골의 신하로 들어간 다음 몽골의 도움을 받아서 상대한 적이 있다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지?"

200여 년 전, 흑룡강 하구와 그 너머의 섬에 걸쳐 거주하던 길러미들은 몽골의 공격을 받고 패배해 신하가 되었다. 길러미들은 이듬해 바다 건너 사는 족속들, 즉 쿠이가 자신들을 해마다 침공한다며 쿠빌라이에게 탄원했고, 몽골은 길러미들의 도움을 받아 섬을 공격했다.

"맞습니다. 버일러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전해지는 말로는 그때 바다가 워낙 험해서 제대로 원정을 가지 못한 탓에 결국 쿠이 놈들을 섬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호되게 당한 덕인지 쿠이 놈들도 얌전해졌다는 말을 할아버지께 들었지요."

노인의 말에 도르호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석탄이 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지만 유황이 없는 건 아쉽군. 아니…… 잠깐만. 저 섬과 일본의 땅의 성질이 같다면 유황이 나지 않겠냐는 말을 한께 했던 건 나였지 않은가. 그리고 저 청년이 말한 것처럼 유황과 석탄은 냄새가 나고 불에 잘 타는 성질이 비슷하고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르호치의 눈이 빛났다.

'저 청년은 섬에서 유황을 본 적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기껏해야 같은 길러미들이 사는 북부에 한정된 것이고, 적어도 200년 전부터는 쿠이들이 사는 남부에 제대로 가본 길러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남부에서는 유황이 날지도 모른다. 정말로 내 생각대로 땅의 성질이라는 게 있다면 일본에 가까운 남쪽에서는 일본처럼 유황이 나고, 먼 북쪽에서는 유황과 비슷한 석탄이 난다고 한들 이상한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석탄이 난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중요한 단서를 얻은 셈이야.'

유황 확보의 가능성을 엿본 도르호치가 노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바다 건너 섬에는 따로 이름이 없는가?"

"예. 어차피 이 근처에 큰 섬이라고는 하나뿐이라 그냥 섬이라고만 부릅니다. 정 구분해야 하면 쿠이들이 사는 섬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저 섬에 쿠이들만 사는 게 아니라 길러미들도 살고, 애초에 길러미들이 살던 섬에 쿠이가 쳐들어온 것인데 어찌 놈들 이름으로 섬을 부른단 말인가. 앞으로는 길러미섬이라 부르게. 실제로도 그렇게 될 테니까."

그 말에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하시면……."

"이번에야말로 자네들이 쿠이들을 몰아내고 저 섬을 되찾는 걸 도와주겠네."

* * *

1444년 11월 중순 모일.

길러미섬. 남서부 해안 모처(현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

그 뒤로 두어 달간 도르호치는 길러미섬으로 석탄과 유황을 탐색하러 갈 준비를 착실히 진행했다. 탐색하러 갈 인원들을 선발하고, 식량과 무기를 비롯한 물자를 챙기면서 상경부에 사람을 보냈다.

흑룡강 하구의 섬을 길러미섬이라 이름했다는 것과, 길러미섬에 석탄이 난다는 것은 알아냈고 유황도 찾아보려 한다는 보고가 주목적이었지만, 꼭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정말로 이 배를 타고 오니까 금방이군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자신들이 타고 온 배를 보는 길러미 청년에게 도르호치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이런 배를 만드는 기술도 길러미들에게 가르쳐 주겠네. 그럼 바다가 얼면 썰매로 다니고, 녹으면 배로 다닐 수 있을 것이야."

원래 길러미들이 제안한 것은 한겨울이 되면 흑룡강 하구에서 길러미섬에 이르는 바다가 얼어붙으니 그 위를 건너가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길러미들은 개 썰매를 타고 얼음 위를 건넌다는 것이었다. 썰매 개들은 털이 두툼하고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 덕에, 밤에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뭉쳐서 자면 개와 사람 모두 무사히 추위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여진족의 말은 천막 안에 들여놓을 수 있는 크기가 아닐뿐더러, 방한 장비를 잘 입히더라도 한겨울의 추위에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 있었다.

무사히 섬으로 건너간다 해도 문제가 있었다. 길러미섬 서북부는 대부분이 습지라 목초지가 얼마 없을 뿐만 아니라 겨울이면 그마저도 눈에 덮여 버린다.

말을 키우지 않는 길러미들 마을에 건초가 있을 리도 없으니, 석탄이 난다는 섬 남부까지 먼 길을 가는 동안 말먹일 것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기병이 대부분인 여진족들이 군마도 없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도르호치가 생각한 것이 바로 상경부에 요청해서 흑룡강에서 쓰는 큰 배를 여러 척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이리 큰 배가 있으면 섬을 오가는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 고기를 잡을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일세. 필요하다면 지금처럼 누르간성과 길러미섬 남부를 바로 오갈 수도 있을 것이야."

"사실 배를 타고 한 번에 남부로 가자는 말씀을 처음 하셨을 때는, 저희가 쓰는 작은 어선이나 저번에 버일러께서 소금을 만들어 싣고 가시던 배만 생각해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바다가 워낙 거칠어서 작은 배로 오래 항해하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서 말입니다."

하지만 상경부에서 온 것은 길러미들이 이전에 본 적 없는 크기의 배들이었다. 거기에 사람과 물자는 물론이고 군마와 건초까지 전부 싣고 한 번에 목적지에 온 것이다.

"이제 직접 타고 와봤으니 괜찮다는 걸 알겠군"

"예. 누르간성에 돌아가면 이런 배의 유용성을 아버지께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청년이 말한 아버지는 바로 누르간성의 부족장 노인이었다. 도르호치를 안내할 길러미들을 통솔하고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 부족장의 아들이 여진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서 적임자였던 것이다.

"그나저나 쿠이들이 사는 마을 가까이에 대뜸 온 것이라 전투까지는 아니더라도 저항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하군."

"이 모습을 보면 저항하려던 생각이 있다가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허허허, 그런가?"

청년의 말에 도르호치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안에서 안쪽으로 들어온 만에는 커다란 배가 몇 척이나 정박해 있었다.

가까운 숲에서는 여진족 청년들이 쉴 새 없이 나무를 하는 통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다른 청년들은 그렇게 해온 나무를 톱과 자귀로 다듬어가며 정착지를 만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쿠이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말일 것입니다."

"말을 무서워한다고?"

도르호치의 질문에 청년은 푸륵거리며 건초를 뜯는 군마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 저희는 말을 키우지는 않지만 어떤 짐승인지는 알고 있었고, 여진족들이 타고 다니는 것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쿠이들은 다릅니다. 기껏해야 옛날 몽골과 싸우면서 본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게 고작일 것이고,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겠지요."

도르호치가 끄덕이며 말했다.

"방한 장비까지 둘러놓았으니 그야말로 털이 북슬북슬하고 빠르게 뛰어다니는 큰 짐승으로 보이겠군. 그런 걸 타고 돌아다니는 우리는 더 위험해 보일 것이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저런 큰 배도 처음 봤으니, 그야말로 바다를 건너온 괴물의 뱃속에서 튀어나온 기이한 짐승들 같겠지요."

"저항한다면 우선 화약으로 놀라게 해 기를 죽이고, 그래도 덤벼들면 싸우려고 했는데 그럴 것도 없이 말만 보고도 겁을 먹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괜찮겠나? 장차 이 섬을 온전히 길러미들의 것으로 만들려면 차라리 저들하고 싸우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네. 우리 무장이라면 전혀 피해 없이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아."

도르호치의 말에 청년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버일러께서 그 석탄과 유황이라는 것을 찾으러 오신 것 아닙니까. 괜히 쿠이들과 싸움을 시작해서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들게 되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놈들을 몰아내건 복속시키건, 나중에 차근차근하면 됩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길러미섬 남부를 탐사하려면 거기 오래 살던 쿠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고 말이야. 그나저나 이 지역 이름은 뭐라고 하는가? 알아두어야 나중에 한께 보고도 하고 지도도 만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도르호치의 질문을 들은 청년이 길러미말로 뭐라 부르자 다른 길러미 청년 하나가 급히 뛰어왔다. 쿠이말을 할 줄 알아서 통역으로 따라온 청년이었다. 청년은 통역과 뭐라 말을 하더니 이내 도르호치에게 말했다.

"길러미말 이름은 없고 쿠이말로는 에투토르라고 한다 합니다. 곶 사이라는 뜻이라는군요."

"지형 그대로가 이름이로군. 어투토로라. 기억해두도록 하지."

여진말에는 'ㅔ'발음이 없이 'ㅓ'발음이 있고, 모음으로 끝나는 단어가 대부분인 탓에 도르호치가 듣고 말한 지명은 원래 발음과 약간 달라져 있었지만, 어차피 길러미들이 붙인 이름도 아니라서 청년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그나저나 석탄이나 유황은 언제쯤 찾으러 가실 계획이신지요?"

"지금은 탐색하러 가기에는 인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겨울도 오고 있네. 정착지가 완성되어야 쿠이들이 기습하건 갑자기 추워지건 걱정이 없으니, 탐색은 그 뒤에 해야지."

도르호치의 말에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석탄이라는 게 땅에서 파내는 것이고 연료로도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날이 더 추워지고 땅이 얼면 파기 힘들어질 것이고, 반대로 미리 파내어 둔다면 겨울을 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도르호치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군. 하긴, 쿠이들이 말만 보고도 겁을 먹을 정도이니 기습을 크게 걱정할 것도 없고, 애초에 쉽게 덤비지 못할 테니 소규모 인원으로 석탄을 찾으러 다녀도 그리 위험할 건 없으려나. 좋아, 일단 정착지에 꼭 필요한 것들만 갖춰지고 나면 바로 탐색에 나서는 게 좋겠군. 자네가 아주 중요한 점을 짚어주었네. 하마터면 언 땅을 깨고 다녀야 할 뻔했어."

"버일러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참, 자네 이름이 뭐라 했지? 이거 원, 길러미말은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단 말이지."

"무르키입니다. 뿔이라는 뜻이지요."

"무르키라. 알겠네. 이번에는 꼭 기억해 뒀다가 한께 말씀드리겠네. 누르간성에 아주 영특한 사내가 있다고 말이야."

그 말에 무르키의 눈이 빛났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마침 내가 상경부에 돌아가려면 한참 남았으니, 그때까지 자네가 나를 많이 도와주게. 그래야 한께 말씀드릴 것도 많아지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온 힘을 다해서 버일러를 돕겠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예? 탐색은 정착지가 어느 정도 된 다음 하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무르키의 그 질문에 도르호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탐색이 아니라 정착지를 짓는 되는 동안 내가 말 타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걸세. 말을 탈 줄 알아야 나하고 같이 다니면서 도와줄 것 아닌가."

그것이 자신들을 금나라의 봉신으로 복속시키려는 계획인 줄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무르키는 환한 표정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