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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양녕에 빙의함-246화 (246/300)

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46화

246화

1444년 8월 하순 모일.

흑룡강 하구. 누르간성(현 하바롭스크 티르) 인근.

한때 명나라가 흑룡강 일대를 관할할 목적으로 설치했던 노아간도지휘사사는 그 이름대로 흑룡강 하구의 노아간, 즉 누르간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간도지휘사사가 유명무실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며 누르간성은 명나라의 요새가 아니라 근처에 살던 부족의 거주지가 되어있었다.

"언제 봐도 참 삭막하군. 기후만 아니면 좋은 항구인데 말이야."

흑룡강 하구의 높은 언덕, 즉 명나라가 영녕사를 짓고 영녕사비를 세운 언덕 위에서 누르간성을 내려다보던 도르호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원래 역사의 21세기의 지형만 본다면 이곳은 흑룡강 하구에서 한참 안쪽으로 들어온 위치였지만 그것은 오랜 퇴적의 결과였다. 퇴적이 진행되기 전인 이 시기에는 흑룡강 하구는 누르간성이었고, 그 앞은 넓은 만이었으며, 만의 끝에 있는 해협을 지나야 비로소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버일러, 너무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들려온 목소리에 도르호치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있는 것은 두툼한 가죽옷을 입은, 누르간성에 사는 부족의 부족장인 노인이었다. 아는 얼굴을 만난 도르호치는 웃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래야지. 괜히 바닷바람에 밀려 떨어져 죽기라도 하면 얼마나 꼴이 우습겠는가. 그래, 자네는 그간 잘 지냈는가?"

"버일러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여기에는 주변을 살피러 올라와 계셨던 겁니까?"

"그렇네. 누르간성에 왔더니 자네가 배 타고 나갔다지 뭔가. 주변도 살필 겸, 저 많은 배 중에 자네가 어디에 타고 있나 보러 올라왔지. 결국 이렇게 자네가 직접 올 때까지 못 찾았지만 말이야."

도르호치가 흑룡강 하구 만에 가득한 고깃배를 가리키며 농담하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늘따라 고기가 잘 잡힌다기에 저도 잠시 도우러 나갔었지요. 아무래도 손님이 오시니 잘 대접하라고 케르크(바다)께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신 모양입니다. 저도 왔고, 바닷바람도 추우니 이만 내려가시지요."

"그러세."

노인과 함께 언덕을 내려가다 영녕사 앞을 지나던 도르호치는 영녕사 입구에 원래 있던 기와를 올린 문은 사라지고 굵은 나무를 엮어 만든 조악한 문이 대신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전에 있던 문은 어디 갔는가?"

"지난겨울에 눈이 많이 왔을 때 무너졌습니다. 무너져 내린 기왓장하고 목재는 경내에 쌓아 놓고 대신 저걸 만들어서 세웠지요."

"사찰 문이 무너지다니. 부족원들이 불안해하지는 않던가?"

"참(샤먼)이 잘 수습했습니다. 마을로 오던 역병을 여신께서 막아 주셨지만 대신 문이 무너진 거라고 하면서, 경내에 쌓아 놓은 문 잔해에 곰고기를 바치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뒤로 별다른 일도 없어서 지금은 다들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찰에서 고기를 바치고 기도했다는 그 말에 도르호치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찰을 짓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비석 옆면에 육자진언을 여러 말로 새겨놓은들, 진언을 읽는 건 고사하고 그게 뭔지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관세음보살이 그저 병을 막아 주는 여신으로 여겨질 뿐인가. 뭐, 아예 틀린 것도 아닐뿐더러 이들이 영험한 것으로 여기고 영녕사와 비석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군.'

* * *

잠시 후.

흑룡강 하구. 누르간성.

누르간성에서 가장 큰 건물인 노인의 집에서는 도르호치 일행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놓여 있는 나무접시는 많고 담겨있는 음식 종류도 다양했지만, 그 재료는 거의 다 생선인 것을 본 여진족 청년 하나가 작은 소리로 도르호치에게 물었다.

"길러미들은 미곡을 안 먹습니까?"

"자네는 이번에 처음 와서 잘 모르겠군. 맞아. 아까 고깃배가 엄청 많았던 걸 보면 알겠지만 이들의 주식은 물고기고, 주변에서 채집한 풀이나 나무 열매를 곁들이네. 아주 가끔 사냥도 하지. 사실 길러미들만 이러는 건 아니야. 자네는 젊어서 잘 모르겠지만, 한께서 여진족들을 모아 금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이렇게 사는 여진족들도 많았네."

도르호치가 말한 길러미는 흑룡강 하구 일대에 사는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도르호치의 말대로 어업과 채집을 생업으로 하는 이들이었는데, 길러미라는 이름은 여진말이었고 그들의 말로는 자신들을 사람이라는 뜻의 니브흐라 불렀다.

"여진족들도 이렇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니……."

청년은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를 엮어 만든 노인의 집은 겨울에도 방한을 크게 기대할 수 없어 보였지만, 문 바깥으로 보이는 다른 이들의 집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천막을 세운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부족장 집의 격에 맞는다고 해줘야 할 정도였다.

"집이 많이 허술해 보이지? 나도 처음 소금을 만들러 여기 왔을 때는 이런 집에서 어떻게 겨울을 나는가 싶었지만, 두툼한 모피옷 덕분에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다더군."

그 말에 청년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족장 노인이 앞에 와 앉으며 말했다.

"음식은 입맛에 맞으시오?"

노인의 능숙한 여진말에 청년이 당황해서 말했다.

"예? 예. 아주 맛있습니다. 부족장께서는 여진말을 아주 잘하시는군요."

"원래 이 근처에는 여진족도 많이 살았소. 누르간이라는 성 이름도 여진족이 붙인 이름이지. 그래서 길러미와 여진족은 서로의 말을 아는 이들도 많았는데, 이 일대 여진족들이 전부 금나라로 떠나고 나서는 여진말을 오래 써온 나 같은 이들을 빼고는 여진말을 잊어버리거나 아예 접한 적 없는 이들이 많을 뿐이오. 뭐, 덕분에 버일러께서 소금을 만들러 오셨을 때는 내가 많은 도움이 되어드렸지만 말이오."

"그런 것이었군요."

싱긋 웃은 노인은 이번에는 도르호치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소금을 만들러 오신 겁니까?"

"그렇네. 이번에는 아예 거점을 만들고 소금을 꾸준히 만들 생각이야."

한때 여진족은 생필품인 식량, 철, 면포, 소금을 전부 조선과 명에 의지하다시피 하던 때가 있었고, 그 상황에서 조선이나 명의 심기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4윤작법으로 농사도 짓고, 효율 문제로 재료를 조선에서 사오기는 하지만 제철 기술도 있다. 면포는 비록 직접 생산하지는 못하지만 몽골을 통해서 들여오는 수량이 있는 데다가, 없다고 해도 모피 옷으로 어떻게든 겨울을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소금은 아니야. 내륙에서 소금은 가축에게나 사람에게나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지금이야 조선과 다시 교역하면서 소금을 구하는 게 원활해졌지만, 조선이 우리 목숨을 쥐고 있는 상황은 절대로 좋은 게 아니다. 양은 비록 많지 않더라도 우리 힘으로 소금을 확보할 기반을 마련해 두어야 해.'

"거점을 만드신다 하면, 여기 와서 계속 자리 잡고 소금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그렇네. 정확히 말하자면 거점을 만드는 건 우리지만, 자리 잡고 소금을 만드는 건 자네들 길러미가 할 걸세."

그 말에 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가 말입니까?"

"그래. 버일러인 내가 계속 여기서 소금만 만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데려온 이들이 여기에 거점을 만들고 머물면서 자네들에게 소금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걸세. 자네들은 그걸로 소금을 만들어서 우리의 식량이나 철하고 교역하는 것이지. 어떤가?"

"저희에게도 이로운 일이군요. 하지만 저희가 워낙 먹고사는 게 바빠서 소금 만들 시간과 일손이 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네. 내가 이번에 철제 도구도 많이 가져오고 목수와 대장장이 같은 기술자들도 많이 데려왔어. 철제 도구는 자네들에게 줄 것이고, 기술자들은 각종 도구 만드는 것부터 집 짓는 것까지 온갖 기술을 가르쳐 줄걸세. 그러면 사는 게 좀 나아질 테니 소금 만들 여유도 생기지 않겠는가?"

그 말에 노인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그런 것들을 배우면 저희도 여진족처럼 살 수 있게 되겠군요. 혹시 농사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일세. 이미 종자도 챙겨왔네. 이 추운 곳에서 과연 농사가 잘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시도는 해보아야 하지 않겠나."

"정말 감사합니다. 한과 버일러께서는 저희의 큰 은인이십니다."

얼핏 보면 각종 기술을 전수해 주는 대신 안정적인 소금 공급을 얻는, 금나라와 길러미 양쪽에 이익이 되는 거래처럼 보이지만 금나라 쪽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철제 도구를 한번 쓰기 시작하면 이전의 불편하고 조악한 도구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있는 철을 가공할 수는 있어도 새로 생산하는 법은 모를 테니 결국 우리에게서 계속 철을 살 수밖에 없을 것다. 그리고 그렇게 철을 사려면 소금을 계속 생산해야 한다.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지.'

교역품의 내용만 조금 달라졌을 뿐, 조선이 여진족에게 쓰던 전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렇게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세력을 갖추게 한 다음에는 금나라의 봉신으로 삼을 것이다. 천자국에는 제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도르호치는 속내를 숨기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신난 얼굴의 노인에게 말했다.

"참, 자네에게 물어볼 게 하나 있네. 사실 이게 오늘의 본론이기도 해."

그렇게 말하며 도르호치가 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 펼쳐 보였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주먹만 한 유황 덩어리였다.

"이게 뭡니까? 약간 역한 냄새가 나는데……."

도르호치는 전혀 모르는 듯한 노인의 말에 약간 불안해지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유황이라고 불이 잘 붙는 덩어리일세. 혹시 이런 비슷한 게 이 근처, 특히 바다 건너 섬에서 나는가? 꼭 이렇게 노란 덩어리가 아니라도 괜찮아. 이런 냄새가 나는 돌덩어리면 되네."

"글쎄요……. 건너 섬에 자주 오가는 이한테 물어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인이 무어라고 하자 청년 하나가 다가와 앉았다. 유황 덩어리를 손으로 가리켜가며 청년과 한참 길러미 말로 대화하던 노인은 다시 도르호치에게 여진말로 말했다.

"이런 노란 덩어리는 물론이고, 이런 냄새가 나는 돌덩어리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대신 비슷한 성질의 돌은 많이 난다고 합니다."

"비슷한 성질의 돌이라니?"

"노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고, 이런 역한 냄새가 아니라 다른 독한 냄새가 나는 돌이라고 합니다. 대신 불에 잘 타는 성질은 똑같다는군요."

그 말에 도르호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석탄이다!'

비록 유황은 아니었지만 석탄 역시 유용한 자원이었다. 게다가 변변찮은 도구도 없는 길러미들이 많이 난다고 말할 정도라면 땅속 깊이 묻힌 것도 아닐 터였다.

"바다 건너 섬 어디에서 나는가?"

도르호치가 눈을 빛내며 묻자 약간 당황한 노인이 다시 청년에게 물어보더니 대답했다.

"여기서 배 타고 바로 건너갈 수 있는 곳에는 없고, 섬 남쪽으로 한참 가서 쿠이들 사는 곳 근처까지 가야 있다고 합니다."

"쿠이?"

생소한 이름에 도르호치가 되묻자 노인이 설명했다.

"아, 모르시는군요. 저 섬에도 길러미들이 살긴 하지만 섬 북부에만 삽니다. 섬 남부에는 그 남쪽 섬에서 넘어온 놈들이 살지요. 쿠이는 놈들 말로 사람이라는 뜻이라 합니다."

노인이 쿠이라 칭한 그 종족의 말에는 쿠이 말고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또 있었다. 바로 아이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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