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양녕에 빙의함 243화
243화
좌중이 술렁이는 가운데, 양녕이 말한 내용을 단번에 이해한 한명회가 말했다.
"야마나 가문은 목화 재배에서 면포 직조에 이르는 기술을 익혔을지 모르지만, 퍼뜨리려는 대상인 일본의 다른 영주들은 아닙니다. 기술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목화를 재배하는 것도, 실을 뽑아 면포를 짜는 것도 서투르겠지요. 조선에서 쓰는 여러 도구도 없고 요령도 없으니, 아마 초기에 생산한 면포들은 그 품질이 참 처참할 것입니다."
"직접 면포를 처음부터 만드는 것과 목화솜 상태에서 조선에 팔고 면포를 사 오는 것. 둘을 비교해서 직접 만드는 것이 손해라면 사서 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이도의 말에 양녕이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렇게 되면 굳이 손해를 보면서 면포 제작 기술을 익힐 필요가 없지요. 분명히 일본 각지에서 목화 농사를 짓게 되었지만, 야마나 가문 놈들이 바라는 것처럼 각지에서 면포를 자급하게 될 일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면포 교역이 늘어 조선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오우치 가문에도 도움이 되겠지요."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각지에 면포 제작 기술을 퍼뜨리며 권위라도 높일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조선이 먼저 가로채게 되는군요."
"맞습니다. 게다가 야마나 가문의 기술이라고 해 봤자 이리저리 실험하다가 겨우 알아낸 몇 가지뿐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퍼트릴 것은 원래부터 면포로 유명하던 조선이 직접 가르쳐 주는 기술입니다. 같은 조건이라면 영주들이 어느 쪽 기술을 배우려 할지는 자명하지요."
양녕은 앞에 펼쳐둔 일본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일본에 유황이나 구리, 주석, 수은, 납과 같은 광물이 풍부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일본 땅 어디에서나 나는 것은 아닙니다. 큰 광산이 있는 영지가 있는가 하면 광물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영지도 있겠지요. 그런 곳의 영주들은 면포를 사서 쓰려고 해도 내다 팔 교역품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호조판서 박종우가 양녕에게 말했다.
"그런 이들이 목화 농사를 지어 목화솜을 조선에 팔고 면포를 사 가게 하는 것이로군요. 교역 대상이 아니던 이들을 교역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은 저도 좋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면포 제작 기술을 어떻게든 익히려 할 것입니다. 조선 면포의 품질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 품질에 이 값이면 살만하다 싶을 정도로만 가격을 낮출 수 있다면 주변에 팔아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고, 광산이 없는 영지라면 그렇게 파는 면포가 중요한 수입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소. 하지만 조선에서 파는 것이 면포만은 아니지 않소. 사치품인 도자기나 불경은 제외하더라도, 내전 중인 일본에서 조선이 파는 철은 중요한 군수물자요."
"자신들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그걸 쥐고 흔드시려는 것이로군요."
"그렇소. 심지어 우리가 직접 나서서 철을 안 팔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것도 없고, 그저 그 주변 지역에 면포를 더 싸게 팔아서 그들이 만든 면포가 팔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오. 철을 살 돈이 필요하니 직접 만든 면포는 자급자족에만 쓰거나 아예 생산을 포기하고, 남는 목화솜을 조선에 팔고 철을 살 수밖에 없게 되지 않겠소?"
박종우는 이해한 듯했지만, 이번에는 우의정 황보인이 신중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조선에는 목화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목화솜을 일본에서도 사 오게 된다면 목화 값이 폭락해서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아예 목화 농사법을 일본에 널리 퍼뜨릴 것이니 사 오는 양도 당연히 많겠지.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그리고 목화솜을 많이 사 오더라도 그걸 다 면포로 짜지 못한다면 내다 팔 수가 없습니다. 이익이 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해에 다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듬해의 목화 농사에도 영향이 갑니다."
양녕은 이번에도 인정한다는 듯 끄덕였지만, 곧 자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문제들의 해결책은 간단하오. 조선 땅에서 난 것과 일본에서 사 온 것을 합쳐서 모든 목화솜으로 면포를 짜버리면 그만이지 않소? 공급이 그대로 수요가 되었으니 목화 값이 폭락할 일도 없고, 내다 팔 면포도 충분하고, 목화 농사에 지장도 없으니 말이오. 아, 물론 직접 면포를 만들려는 일본 영주들을 압박하려면 값이 싸야 하니, 면포 생산에 드는 비용도 줄여야겠구려."
"모든 목화솜으로 면포를 짜고 비용도 줄인다니,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의 면포 교역에 문제가 생기고 더 나아가 각종 원료 공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소."
양녕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기술로는 무리일 것이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곧 가능하게 만들 것이니."
* * *
1444년 2월 하순 모일.
나주부 무안현. 방직감.
조선 면포가 일본은 물론이고 명나라와도 교역하는 중요한 물품이 되면서, 나주부 일대는 면포 생산의 중심지로 번성하고 있었다. 그 나주부 전체의 외항이나 마찬가지인 무안현의 목포진은 쉴 새 없이 오가는 배들로 가득했고, 항구 근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큼직한 장보고 사당은 그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 육지에는 면포 생산의 중심지인 방직감이 있었다.
"지금 방직감에서 쓰이는 각종 기계는 거의 다 부정께서 만드셨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저희만 와서 과연 잘 될지 걱정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선공시 관원의 그 말에 차를 마시던 양녕이 싱긋 웃었다. 면포 생산 기술을 발전시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양녕은 이도의 승인을 받아 선공시 관원과 소속 장인들 몇 사람을 직접 선발해 방직감에 내려왔고, 지금 말한 관원이 그 대표였던 것이다.
"지금 장 부정이 기계시계를 개량하느라 바쁘다고는 하지만, 설령 바쁘지 않았더라도 데려오지는 않았을 걸세. 자네들 실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이리 데려온 것이니 자신을 갖게나."
"감사합니다, 대군."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초로의 여인은 양녕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감독하던 일을 마저 끝내느라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는지요."
"아닐세. 방직감이 바쁘게 돌아간다니 좋은 소식이군. 자, 어서 와서 앉게."
양녕의 말대로 탁자 앞에 앉은 여인은 마주 앉은 관원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혈색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관원도 다정한 표정으로 여인에게 말했다.
"누님께서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오."
여인의 이름은 방사철. 양녕의 사노였으나 방직감이 만들어질 당시의 공로로 면천되어 방직감 관원이 되었고, 지금은 승진해 외명부 5품 품계인 의인을 제수받고 5품관인 판관이 된, 방직감의 실질적인 관리자였다.
그리고 마주 앉은 선공시 관원은 그 아우인 방기특이었다. 양녕의 가르침을 받고 잡과에 합격했고, 지금은 종6품관인 선공시 주부로 있었다.
"남매가 자주 만나지 못해서 많이 그리웠겠군."
양녕의 말에 방사철이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비록 얼굴은 보기 힘들어도 편지는 꾸준히 주고받고 있지요."
"편지를 말인가?"
"예. 주상전하께서 만드신 정음 덕분입니다. 덕분에 까막눈이던 저도 동생이 보낸 편지를 읽고 답장을 써서 보낼 수 있게 되었지요. 또 방직감에 와서 일하는 여인들마다 정음을 가르쳤더니 각종 기록과 보고가 수월해져서 방직감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그렇게 정음을 배운 여인들이 집에 가서 남편과 자식들에게도 가르쳐준 덕분에 나주부 백성들은 누구라도 최소한 자기 이름은 정음으로 쓸 줄 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양녕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잘 되었군. 주상께서 정음을 만드신 뜻이 바로 그것이야. 이 얘기를 들으시면 주상께서도 분명 매우 기뻐하실 걸세."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양녕은 본론으로 넘어갔다.
"좋아, 그럼 좋은 소식도 들었으니 할 일을 해보세. 이번에 우리가 온 이유는 이미 들었지?"
"예. 면포 기술을 더 발전시켜서 생산량을 높이시려 한다 들었습니다."
"맞네. 혹시라도 다른 문제가 없다면 방직 과정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
양녕의 말에 방사철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대군께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베틀부터 개선하시는군요. 무언가 이유가 있습니까?"
"베 짜는 일이니 베틀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개선하는 것이 순리이고 말일세."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양녕의 정확한 의도는 따로 있었다.
'사실은 필요가 발명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다. 맨 마지막 단계인 방직 과정을 개선해서 실 공급량이 면포 생산량을 못 따라오게 만들고, 실 공급량을 늘리면 이번에는 목화솜 생산량이 따라오지 못하게 될 테지. 그럼 목화솜이 더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명분을 가지고 일본에서 목화솜을 사는 것도 수월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목화솜을 일본에서 사 오려 한다는 내용이 먼저 퍼지면 목화 농사를 짓는 백성들이 반발할 수 있으니 방직감은 물론 선공시에도 비밀로 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듣고 보니 참 간단한 이유입니다."
"그렇지? 마침 내가 생각해 둔 개선 방안도 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양녕의 그 말에 옆에 있던 방기특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 며칠 사이에 벌써 말입니까?"
"그래. 지금 나라에서 면포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것은 교역이 늘어난 만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서일세. 그런데 단순히 족답직기를 더 만들고 사람을 더 많이 써서 생산량을 늘린다 한들 임시변통일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족답직기 자체를 개선해야 하지. 그리고 그렇게 조건과 목표가 명확하다면 오히려 개선안은 빨리 나오는 법일세."
"역시 대군께서는 대단하십니다. 그럼 그 개선 방안은 어떤 것입니까?"
"자세한 것은 이따가 다른 관원들과 장인들까지 모두 모아놓고 설계도를 그려가며 설명하겠네. 복잡하다면 복잡할 수도 있어서 말이야. 그래도 지금 한 가지 먼저 말해 주자면 족답직기의 좌우 폭을 넓힐 걸세. 만들어지는 면포의 폭이 세 자가 되게끔 말이야."
양녕의 그 말에 방사철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폭을 세 자로 말입니까? 물론 폭이 넓어지면 한 사람이 만드는 면포의 양은 늘어나겠지만, 이 정도 폭을 작업하기에는 너무 힘들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속도가 떨어질까 걱정입니다."
놀란 얼굴로 팔을 좌우로 쭉 펼쳐 보이는 방사철을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보던 양녕은 무언가를 깨닫고 껄껄 웃었다.
"하하하! 자네가 왜 놀라나 했네. 아무래도 내가 말한 세 자와 자네가 생각한 세 자가 달랐던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생각한 세 자는 포백척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네. 맞습니다. 그야 포목을 재는 것이니…… 앗."
뒤늦게 눈치챈 듯한 방사철을 보고 양녕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렇군. 내가 말한 세 자는 이번에 전국의 도량형을 일치하며 정해진 황종척을 기준으로 한 것이네. 포백척 한 자는 황종척 한 자 세 치가 넘으니, 자네가 놀랄 만도 하지."
"허허허. 누이는 방직감에서 일하다 보니 포백척이 자연스럽고, 대군께서는 황종척에 익숙하셔서 잠시 얘기가 어긋났군요. 황종척으로 세 자면 그렇게 긴……."
잠시 말을 흐렸던 방기특이 양녕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종척으로 세 자라고 해도 작업하기에는 좀 길지 않습니까?"
"맞아, 길지.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걸세."